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내 십자가(2010년 3월28일, 사순절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03.28 15:35 | 조회 2044


내 십자가
2010년 3월28일(사순절여섯번째주일) 마16:21-28

오늘 읽은 말씀은 ‘그 때부터’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마태복음은 이 말씀으로 크게 단락이 나뉘어집니다. 이 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사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말씀은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밝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전에는 고난, 십자가, 죽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고난에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부터’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는 2번 나옵니다. 1번은 마4:17에서이고, 또 한 번은 오늘 본문 말씀인 마16:21에서입니다. 마4:17에 보면 ‘이 때부터’, 그러니까 비로서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왔다’고 천국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16:21에도 보면 ‘그 때부터’ 비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 죽음, 부활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라는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전환점, 변화를 뜻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 4:17의 ‘그 때부터’는 예수님께서 일반사람들과 같이 생활하시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그리고 요한이 체포된 후부터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아간 때입니다.

또한 2 번째인 마16:21의 ‘그 때부터’는 십자가, 고난, 죽음의 시작입니다. ‘그 때부터’라는 말은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는 때입니다. 교우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그 때부터’라는 시기가 있는지요? 대나무가 자라면 마디를 남기듯이, 나무라면 나이테를 두르듯이 우리의 신앙이 ‘그 때’, ‘이 때’. . . 그러니까 받은 은혜의 때, 변화의 때, 세로워지는 때가 있는지요? 애기들이 태어나 커 가면서 새로워집니다. 옹알이를 하고, 뒤집기도 하고, 기어다니기 시작하기도 하고 돌 때 쯤 되면 어느새 벌 떡 일어나 한 발을 내 디딜 때의 그 감격을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후,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 까지 거듭 자라나야 합니다.

이 번에 우리 교회가 연속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중고등부를 포함해서 한 25 명 정도가 참여한 것 같은데, 지난 수요일 저녁8-9시에는 주조양 선생님과 중등부 아이들이 연속기도회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염려가 되었던 것은 1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그리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년 아이들이 더구나 중 1년 생이 한 시간을 꼬박 앉아 있기가 그리 쉽지는 않아서, 제가 주조양 선생님한테 기도회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을 생각해서, 좀 편하게 기도회를 진행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주조양 선생님께서 잘 알았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시작되었고, 9시가 다 되어, 끝나는 시간에 예배당 앞에 서 있었는데, 나는 아이들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주조양 선생님이 먼저 나오시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했는데, 잠시 후 아이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드라구요, 그래서 물었지요 준영이 한테, “준영아 너무 지루했지” 했더니 아니 좋았어 하드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뭐가 좋았다는 거지”했지요, 그리고 석민이하고 종현이 그리구 담하도 같이 나오길래, 석민이에게 물었습니다. “좀 지루했지?”했더니, “아니요” 하더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허 이놈들 봐라!’했지요. 그래서 한 번 더 물었지요, “왜 지루했잖아!” 하고 물었더니, “아니거든요!”하며 귀찮다는 듯이 이야기 하는 것에 제가 ‘뻥’하고 나가 떨어졌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첫 기도일텐데, 좀 걱정이 되었거든요. 이 기도시간이 지루하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까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 선생님이 아이들을 잘 인도해 주신 것 같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그 날 아이들이 선생님과 기도 탁자를 앞에 놓고 빙 둘러 앉은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신앙이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 까지 성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자라기만 하면 안되겠지요. 열매가, 영적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자라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6:22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에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은 자라게 하고, 무성하게는 하지만 열매를 맺지는 못하게 합니다. 벼가, 밤나무가 한 여름 입사귀를 내어 푸르게 자라는데, 그리고 가을에도 거듭 푸르려고 한다면, 나무의 에너지를 입과 자라는 것에 다 쏟아 부으면 나무는 아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이 지날 때 쯤 찬 바람이 한 번 휙 하고 불기 시작하면, 아니 그 이전에 나무들은 벌써 그 때를 알고 자라기를 멈추고 이제 열매로 그 양분을 모으기 시작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고는 한 철을 마감하는 것을 볼 때, 그래서 그 잎사귀들이 노랗고, 붉은 색을 내며 한 해를 조용히 마감 할 때를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읽은 말씀처럼 ‘그 때부터’ 비로서 십자가, 고난, 죽음을 ‘밝히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는 어느 때 일까요? 바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대해 처음 밝히셨을 때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바로 전 까지 천국의 열쇄를 준다고 했으며,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지금은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지목을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베드로의 메시야 관이 잘 못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백하는 메시야가 어떤 메시야인가에대해서는 여타 사람들과 똑 같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메시야관에 확실한 도장을 찍은 것은 베드로와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제자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욕심이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된다는 시나리오를 이미 제자들은 다 돌려서 보았고, 거의 숙지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모르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무수한 이적과 기사를 베풀자 사람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뫃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에는 모두 개선 장군을 따르는 것 같이 하였습니다. 로마의 모든 억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왕으로 따랐습니다.

마18:1에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하고 예수님께 묻는 것을 보면, 그리고 막10:35에서도 야고보와 요한이 서로 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자기들을 좌, 우에 앉혀 줄 것을 요구하자 다른 제자들이 분개하여 서로 옥신 각신 다투는 꼴이 되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베드로는 한 껏 칭찬을 들었고, 그런데 기껏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에대해 이야기 하자 베드로는 즉시 “주님,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로 붙들고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죽 급하면 예수님을 따로 내어 말하였겠습니까. 22절 말미에는 무어라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 대들었다고 합니다. 다른 번역을 검토해 보면 ‘비난했다’는 말도 있고,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하는 것 처럼 ‘책망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지금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홀로 빙 둘러 싸여있는 형태입니다. 홀로 왕따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그 대변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진 다 와 가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지금 패거리를 치고 있는데, 예수님이 시나리오대로 따라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향하여 쓴 소리를 하십니다. “사탄아!” 이 것은 베드로에게만 하는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욕망의 씨스템, 패거리를 보고 일 갈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시대의 천박한 자본주의에 붙들린 시정잡배와 같이 폭력적이고 천박한 사람, 교회, 단체에대하여 ‘사탄아 물러가라!’말씀하십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마19:27에서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28-30에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
스러운 보좌에 앉고 만물이 새롭게 될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백 배나 받을 것이요, 또 영생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영광 전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깊은 사상으로 한 시대의 흐름을 일으키며, 인격적인 감동으로 스승의 자리에 서거나, 사람들에게 단지 빵을 베풀고자, 또는 병을 고치고 기적을 베푸는 사람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심으로 , 아버지의 뜻, 즉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베풀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메시야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너무했나 십지만, 먼저 꾸짖은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베드로와 제자들이었습니다. 마치 무슨 시정 잡배들 처럼, 아니 욕망에 사로잡혀 시정 잡배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로 불러내어 꾸짖었으니, 예수님도 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사탄’이라 하시며 심하게 꾸짖으셨을까요? 베드로를 심하게 꾸짖으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크고 무겁고, 어떤 사람은 가볍고, 믿음에 따라 각기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 혹 주님의 십자가를 미화할까 염려가 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십자가이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냅니다. 일본의 문학 작가 중에 <오이겐자부로>라는 작가 분이 계시는데 지난1994년 노벨 문학상을 타신 분입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성적 인간>,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타오르는 푸른 나무>등이 있는데, 그 이전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 같은 분들이 노벨 문학상을 탔는데 이들은 일본을 미화하는 고집스러운 국수주의자였다면 오이겐자부로는 모든 아시아인과의 공생과 공여의 비전을 주장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나는 일찍이 문학계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문학 평론가로 혹은 작가로 명성을 떨치던 어느 날 내 삶에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내 아이가 정박아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그것 때문에 우리 부부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고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나의 문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 그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아이를 통해서 새로운 소설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정박아 히로키는 나의 문학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내 글 속에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그 힘은 바로 내 아이 히로키로부터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아픔을 통해 자기 생명이 새롭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픔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러한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지 않았는가라는 것입니다. 실제 손가락 마디 하나에 작은 가시가 하나 박혀도 온 몸이 힘들고 아픕니다. 더구나 큰 병에 걸리면 온 몸이 그 병과 싸우고, 대응하고, 회복하기 위해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여 그 아픔에 대처합니다. 그래서 몸의 아픔이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다 새롭게, 보다 생명력있게, 그리고 내 몸의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놀라운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의 400년간의 노예 생활이 인류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시키지 않았습니까? 고통은 그냥 아픔이 아니라 생명의 비죤을 열어주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고통과 아픔이 와도 너무 고통에 붙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아픔으로 아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도우심, 주님의 비죤을 열고자 하는 주님의 뜻이 그 곳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찿으라는 것입니다. 이 전에 맛 보지 못한 새로운 나라, 새로운 변화에로 우리를 인도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 자기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6/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26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88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57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43 2005.09.02 16:30
275 [일반] 개미, 꿀벌, 거미(2010년7월18일, 성령강림절후여덟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534 2010.07.18 13:05
274 [일반] 자랑스런 아빠다!(2010년7월11일, 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0 2010.07.11 14:41
273 [일반] 하나님 나라 • 작은 나라(2010년7월 4일, 성령강림절후여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7 2010.07.04 14:16
272 [일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5 2010.06.27 14:14
271 [일반] 영 생, 믿 음, 사 랑(2010년6월20일, 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33 2010.06.20 15:04
270 [일반] 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2010년6월13일, 성령강림절후세 첨부파일 하늘기차 2527 2010.06.13 15:00
269 [일반] 세상을 피하여 소망을 붙드는 자(2010년6월 6일, 성령강림절후두번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5 2010.06.06 14:04
268 [일반] 길 떠나는 룻(2010년5월23일, 성령강림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45 2010.05.23 13:55
267 [일반] 우주(宇宙)는 한 가족(2010년5월16일, 스승의 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788 2010.05.16 14:41
266 [일반] 폭포수 같이 흐르는 생명의 은혜(순종) 첨부파일 하늘기차 2295 2010.05.09 11:01
265 [일반]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010년 5월 2일, 어린이 첨부파일 하늘기차 2447 2010.05.02 15:27
264 [일반] 팔당 기도처에서 첨부파일 하늘기차 2204 2010.04.30 18:36
263 [일반] 하나님의 열심(2010년 4월25일, 부활절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5 2010.04.25 15:25
262 [일반] 이방사람에게 보내진 사도 바울(2010년 4월18일, 부활절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1 2010.04.18 14:19
261 [일반] 또 나타나신 주님(2010년 4월11일, 부활절후첫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73 2010.04.11 15:53
260 [일반]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예배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58 2010.04.08 12:07
>> [일반] 내 십자가(2010년 3월28일, 사순절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45 2010.03.28 15:35
258 [일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세요(2010년 3월21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2 2010.03.21 15:29
257 [일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2010년 3월14일, 사순절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7 2010.03.14 13:48
256 [일반] 나는 내 길을 가야하겠다(2010년 3월 7일, 사순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9 2010.03.07 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