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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세요(2010년 3월21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03.21 15:29 | 조회 2181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2010년 3월21일(사순절다섯번째주일) 눅11:1-34

오늘 말씀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는데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 마침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고 나서인 것을 볼 때,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보였길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기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보통 호흡, 대화, 하나님과 하나되기라 이야기 하는데, 그 말이 그대로 맞다는 것입니다. 호흡은 들이 마시고 내 시고 하는 반복적인 운동을 통해 몸안의 CO2를 내 보내고, 공기 중의 신선한 O2를 몸 안으로 들이는 것인데, 그래서 더러워진 내 몸을 호흡을 통해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전증에 걸린 분들은 늘 정규적으로 피를 걸러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가 나빠져 몸에 각 종 질병을 야기시킬 수 있는 고질병입니다. 예전에 혜린이 외할머니이신 안삼준 교우님이 늘 병원으로 가서 투석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자꾸 새로워 져야합니다. 육적인 몸은 호흡을 통해 맑게 하지만 영은 무엇으로 맑게 할까요? 영적호흡, 즉 기도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수한 정보와 지식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의 가치와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현대인들의 삶을 가장 오염시키는 주범은 역시 물질입니다. 자본의 가치가 모든 것을 우선으로 하니 삶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질의 우상이 한 가운데 우뚝 서면 그 아래로 문화, 교육, 의식주, 의료, 직장, 결혼, 등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로 굴러갑니다. 이를 위해 모든 가치들은 희생을 감수합니다. 사랑, 평화, 나눔, 인내, 낮아짐... 최근 돌아가신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입으로, 머리로 이지 실제의 삶에서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생명 가치는 사라지고 썩어 없어질 물질의 가치가 죽음과 폭력의 냄새를 사방에 피워냅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스스로에 몰입되어 살아갑니다. 편리함, 화려함, 신속함, 대형화, 풍요로움, 얼짱, 몸짱의 가치체계가 큰 물줄기를 이루어 세대와 세대간을 흘러갑니다. 이러한 가치의 흐름에서 소외될까 기를 쓰지만, 그러한 가치에 깃발을 꽂는 사람은 극 소수일 뿐입니다. 그로부터 오는 긴장감, 의무감, 소외감, 그리고 좌절과 무력감이 사회를 어둡게합니다. 이것은 아닌데, 우리가 꿈꾸던 것은 이렇게 살려고 한 것은 아닌데 하지만 이미 고속도로에 올라탄 차가 싫다고 차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이 사회가 씽씽 달리는 고속도로 같습니다. 그 빠른 속도감에 어지러워 어쩔줄 모르지만 도중에 멈출 수 없는 그러한 형국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이러한 혼탁한 가치 체계,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육적 호흡을 통해 나쁜 공기는 뱉고, 좋은 공기를 마시듯, 영적 호흡을 해야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1 주일을 지내는 마지막 금요일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올리브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 말은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라는 말은 단지 겟세마네 동산이 아니겠지요. 이 말은 반대로 어디서나, 언제나 깨어서 기도하는 곳에 주님이 함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뭐라 하십니까?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선택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죽을 정도로 힘이드신 모양입니다. 아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물리쳐야 하나 라는 죽음의 문제를 놓고 죽을 정도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죽을 정도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홀연히, 담담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기도가 없었다면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할 때에 기도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시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우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내신 기도의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어인지 아시는분? 예, ‘나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한 번 불러보세요. 마음이 참 편합니다. 기도 할 때 첫 마디는 아빠, 아버지입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부모가 없는 아이를 고아라고 합니다. 제가 불광동의 은광교회의 부교역자로 있을 때일입니다. 그 지역에 보육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곳은 미혼모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었는데, 시설도 그만하면 깨끗하고 나름대로 시설과 규모를 갖춘 곳인데, 아이들을 보면 우선 눈에 띠는 것은 피부병입니다. 아이들 얼굴과 몸이 그렇게 진물르고, 터지고 한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곳에 어느 분이 방문을 하여도 그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남자에게는 “아버지”, 여자에게는 “엄마”입니다.

엄마, 아빠를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친 부모는 그 곳에 없으니 안타까운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그렇게 목말라 불러대며, 그리움에 지쳐 몸도, 마음도 상하여, 제 생각으로는 면역이 떨어져 그렇게 아이들의 피부가 온통 피부병으로 진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4:1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
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분명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아버지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니고데모를 부를 때 “믿음으로 낳은 참된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보육원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생명을 준 엄마와 아빠를 보지 못하니 온갖 몸에 헌데가 생깁니다. 오늘 인류가 영적 부모를 잃어 지금 이렇게 온 지구가 헌데를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회복이며, 자유이며, 평화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영적 아버지’, ‘영적으로 태어났다’, ‘영적 존재’다라고 할 때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저도 영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만약에 누가 보았다면, 그것은 귀신이지요. 영은 맛도, 색도, 느낌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영으로 낳았다고 할 수 있고, 아버지라 할 수 있을까요? 요즈음 제가 용인 시민단체 사람들과 만나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불교 쪽에서는 신갈 대덕사의 탄탄스님이란 분이 계신데 저와 함께 종교인으로 용인희망연대라는 시민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일 전에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것에대한 회한의 글을 용인시민신문에 올린 것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스님은 법정 스님의 글을 짧게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죽음과 영혼에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글이 새삼스러워 이렇게 인용해 봅니다. “죽음은 하나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육체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지요? 다른 종교는 잘 모르지만 저희 기독교는 분명합니다.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영혼이 아니라 영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맛도, 색도, 느낌도 없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영’이다, ‘영적’이다, 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좀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는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영적이다, 아니다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 관계하느냐 안하는냐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관계일까요? 다윗은 시42편을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찿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찿아 헐떡”인다고 합니다.
또 시130편에서는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 보다 더 간절하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은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호 관계에대해, 특히 간절히 사모하고, 그리워 하며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는 이 영에대해 히브리어 성서는 ‘루아흐’라고 하는데, 그 말뜻은 바람, 호흡입니다.
그러니까 영이 호흡하는 관계라고 한다면 육적으로도 숨을 들이 마시고 내 뱉지 않거나, 내 뱉고 들이 마시지 않으면 그 사람에대해 무어라 합니까? 죽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렇듯이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호흡과 같이 들이 마시고 내 뱉는 관계를 유지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도 모르고, 알더라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성경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그 처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부연하자면 이 관계는 사제지간일 수 있고, 친구나, 선후배간 일 수 있고, 고용자와 피고용자일 수 있고, 학부모 관계일 수도 있는데,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갈4:6에서
“여러분은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시고 우
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세상을 처음 창조할 때 하나님과 함께 했던 영,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로 인도하여 사탄의 시험을 받도록 하신 영 말입니다. 그 영이 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니 내가 태어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처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을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어서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자’, ‘지극히 높으신 분’, 요즈음은 뭐 ‘당신’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요, 근데 그것도 조심스러운 것은 당신이라는 말도 1자와 2자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3자를 높일 때 쓰는 말이지, 1자가 바로 높이고자 하는 사람, 즉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하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하여간 예수님 당시에 이르기 까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불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전환시키신 것입니다. 언제부터일까요? 예수님이 소년 시절에 첫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낙향하는 중에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도중에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 놀라 어찌 이러구 있느냐 하고 물으니 예수님이 무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니 요셉과 마리아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표현이 예수님의 발목을 잡았지요, 아니 그렇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신성모독죄로 걸려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본질은 기득권자들의 질투였고, 즉 자신들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이겠지요, 그리고 십자가 죽음의 근거는 신성모독, 즉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칭하는 신성모독이었고, 처형의 합법성은 왕이라 사칭하는 치안을 물란시킨 선동자를 로마 법에따라 처형한 것입니다.

이 귀한 관계를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읽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번째 말, 이것은 어찌 보면 옹아리입니다. 지난 신방 때 우리 종우이와 승민이가 옹아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빠빠. . .’아마 엄마, 아빠를 인식하는 첫 옹아리 ‘음~마, 아~ 빠’입니다. 주조양님의 둘째 성원이는 아직 옹아리도 못하는 꿈나라에 있구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하신 첫 마디가 무엇일까요? 다같이 한 번 해 보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막14:36에 기록되어있는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는 아버지를 부를 때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 아버지 합니다. 그런데 이건 그렇게 두 번 부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의 아빠는 아람어로서 당시 유대인들의, 그러니까 예수님의 언어로 아빠이고, 그 뒤의 아버지는 헬라어로 그 ‘아빠’를 풀어서 해석하여 쓴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 라는 말이 더 정겹고 친근하고 우리를 아버지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하는 말입니다. 시131의 말씀처럼 적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안긴 것 같은 평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아버지’ 하지 말고, ‘아빠’하고 부르는 것도 한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왜내하면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 유교적으로 가부장적이어서 하나님 부를 때 아버지 하면 근엄해 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라 부르는 것도 이건 말이 안되구요, 혹 ‘아빠’하며 퇴행할까 조심스러우면서도 ‘아빠’하고 불러보 것도 좋을 상 싶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 부를 때, 아빠 아버지 하며 부를 때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작을 하면 나의 영이 깨끗해지기 시작합니다. 영적 청정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고 부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물론 교회가 가르치는 기도의 순서가 있지요. 먼저 감사 그리고 회개, 간구, 그리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그보다 먼저 마음 가짐으로서 하나님 앞에 침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두서없는 삶의 계획들을 세우고, 책임 없는 말들을 많이 하며 살았는데, 남에게 거칠었던 것들, 그런데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되겠지요. 그래서 먼저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도 같이 일체 침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의 것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분 앞에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을 잘 못 걸어왔는지, 늘 하나님 보다 먼저, 그리고 하나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편한대로, 욕심대로 갔던 길이 어떠한지. 길을 가면서 이 길이 하나님이 열어준 길인지 아닌지 알아보지도 않고 힘써서 갖은 수고를 다 하여 땀흘리며 걸어 보지만 헛 수고 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남 좋은 일 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먼저 멈추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물질 문명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일까요? 환경을 파괴하며 물질 가치로 모든 지구상의 민족과 국가의 삶을 폭력적으로 몰고 가 전쟁을 끊임없이 유발시키는 이 물질문명을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그렇게 가고 있는 이 세상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세상을 창조하시며 살아계시며 주관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문명은 좀 멈추어 숨을 고르며 호흡을 해야할 것 같은데 비만증에 걸린체 쉼 없이 달리고 있으니 어디서 절단이 나도 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이 문명, 이러한 인간의 역사를 멈추게 하실 분은 바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족속과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하늘의 태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며 우리는 ‘어! 말두 안되!’ 라든지, 문자 그대로 정말 하늘의 태양을 멈추게 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것 참 난감합니다. 그 멈춤이 들려주는 하늘의 신비한 말씀을 들어야 하겠지요. 오늘 현대인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은 좋은데, 그러다 보니 생명의 신비, 그 내면 깊숙히 감추어진 환상과 꿈을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생명의 역사, 생명의 생명력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가는데, 그 멈춤이야말로 우리 인류를 살리는 멈춤이요, 우리를 돌이키는 세상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멈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이제 막 여리고 성을 공략하러 나아가는 길목에, 한 사람이 홀연히 칼을 뽑아들고 나타나 여호수아를 멈추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깜짝 놀라 “당신은 우리 편인가 아니면 적의 편인가”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사람은 자기는 여화와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여호수아가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때 그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이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하며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멈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멈춤에 응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동안의 온갖 것 다 내려놓고 멈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 기도, 이 번 사순절 기도 기간이 바로 그러한 기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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