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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기다린 주(2010년12월12일, 대강절 세째주일)

하늘기차 | 2010.12.12 14:03 | 조회 2506


오랫동안 기다린 주

2010년12월12일(대강절 세째주일) 말3:1-4

이 전에 시37편을 통해 기다림에대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말씀에 계속 언급되는 것이 ‘땅을 차지하리라’였습니다. 누가 땅을 차지하는가 보았더니 겸손한 사람이라 합니다. 또 의로운 사람이라 합니다. 그리고 두 번 씩이나 9, 34절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땅이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도 말씀하셨지만 단순히 우리가 두 발로 딪고 서 있는 땅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이지요.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평화이지요. 시므온과 안나가 아기 예수 만나며 참 평화를 맛 보았듯이, 우리도 이 성탄절에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차지하기 바라겠습니다.

이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시37편 11절에 보면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라고 합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들의 소리와 같습니다. 그들이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구요? 겸손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겸손한 사람들이지요. 또한 여호와를 의지하는, 주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왜 여호와 만을 의지하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신실하니까요.

그래서 기쁨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입혀지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맡긴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일까요?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다릴까요?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겸손히 인내하며, 그러니까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평화입니다. 온유한자는, 겸손한자는 자기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 뜻, 명령을 따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 기다림은 얼마나 지고하냐 하면. . .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채 신랑하고 첫 날밤을 아직 앉아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 자락이 문 돌저귀에 걸렸읍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저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않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볼일이 생겨 이 신부집 옆을 지나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채 첫 날밤 모양으로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로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태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 앉아 버렸읍니다.
노천명 시인의 시 중에 ‘임 오시던 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버선 발 로 달려 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닫고 죽죽 울었읍니다

기다리다
지첬음이 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 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읍니다

모두 기다림의 시입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폭삭 내려 앉아 버렸다고 합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 앉아 버렸다고 합니다. 또 그저 자꾸 눈물이 나서 문 닫고 죽죽 울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기다림은 어떤가요? 기다림 속에 소망하는 것에대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 소망하는 것에대한 긴장감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은 겸손하며, 온유해 지며, 하나님의 의를 보게됩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비하며,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눅3장에서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하면서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라 하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 이라고 합니다. 준비하는 과정 속에, 기다림 속에 이루어지는 일 중에 가장 소중 한 것 중에 하나는 ‘본다’는 것입니다. 이 전에는 보지 못하였는데 기다리는 중에 본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여 삶에 열매가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볼 수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마치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 앉아 버’린 것 처럼, 아니면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얼마 안되어 마라라는 곳에 도착하여 물이 없어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토로하였던 것 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사실 샘이 열 두 곳이나 있고, 종료 나무 72그루가 있는 오아시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귀한 샘을 옆에두고 보지 못하니 사람들은 삶 자체를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기다리는 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잠잠하며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화입니다. 볼 수 있기에 평화입니다. 이렇게 참 평화, 참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인생 80년 만에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떴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이 라암셋과 비돔성을 짓는 현장에 강제로 동원되어 중 노동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때에, 공사 현장에서 동족 히브리인이 감독관인 이집트 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고, 그만 이집트인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는데, 그 다음 날 그 사실이 들통이 나 먼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모세는 미디안 족속의 땅에서 미디안 여인과 결혼하여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기간이 40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늘 다니던 호렙산 중턱에서 신비한 현상을 보게됩니다. 가시떨기 나무가 불타고 있는데 타지 않는 것입니다. 사막 광야의 가시떨기는 바짝 말라 있어서 약합니다. 힘주어 만지면 푸르르 하고 부서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떨기에 불이 확 하고 붙어버린 것입니다. 한 순간에 부서져 한 줌의 재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릴 가시떨기인데 그 가시떨기가 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에 놀라합니다. 가시떨기가 하나님의 신비에 싸여 사그러들지 않고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 가시떨기는 바로 모세였습니다.

인생 황혼에 접어든 모세가 사그러들 법도 한데 하나님의 신비를 보고, 하나님의 신비에 이끌리어 이제는 자기의 권능과 능력,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타지않는 불 붙은 가시떨기를 보기 전에는 엄두도 못 냈을 일을 합니다. 바로 바로의 왕궁으로 바로를 만나러 들어갑니다. 그 때 모세의 오른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의 표입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홍해를 가르고, 사막 한 가운데 바위를 내리쳐 샘을 나게 합니다. 미디안 족속과 싸워 승리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 즉 타지만 타지 않는 신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죽지만 죽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그 기간 동안 그 숫한 날들을 기다렸습니다. 서정주님의 기다림은 역시 40년 기다림이지만 ‘초록재와 다홍재로 폭삭 앉는’기다림입니다. 노천명님의 기다림도 ‘문 닫고 죽죽 우는’기다림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다림에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 긴장감은 닫혀있지 않코 열려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는 긴장감입니다. 기다림의 긴장감입니다. 겸손과 온유함, 전폭적인 신뢰를 통해 오는 긴장감입니다. 이 긴장감이 모세를 하루 하루를 의미있는 하루로 세워나가게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망명하여 자신의 처지를 견디어 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의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하루도 변함없이 그는 그 긴장감 속에 자기 자신을 흐트러 뜨리지 않고 지켜낸 것입니다.

성경에 이러한 긴장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린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아들에대한 약속을 하고 25년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계약을 파기하려고 하다 다시 갱신하는 긴장 속에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긴장의 끈을 놓치 않고, 줄을 땡기고 풀고 하면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에 까지 이르릅니다.

그런 기다림 속에서 모세는 자기 자신을 찿았습니다. 왕궁의 모세는 참 모세가 아닙니다. 홍해 앞에서 모세는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이미 모세는 가시 떨기 앞에서 하나님을 보니 자기 자신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정말 보잘 것 없는 촌로라는 것을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로 덧입으니 소멸치 않고 주님의 능력으로 설 수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는 그 타지 않는 불꽃을 보고 신비하여 가시떨기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까? “아! 모세로구나, 잘 왔다. 어서 와서 보아라” 했을까요? 아닙니다. 정 반대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모세는 불 붙는 가시덤불을 자신의 하나님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야 그렇게는 안된다. 신발을 벗어라, 너의 생각에 나를 넣으려 하지 말아라. 너의 것으로 이 가시떨기 불꽃을 보지 말아라”고 합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탄생, 즉 하나님의 신비를 자신의 생각, 자신의 지식과 경험, 삶의 틀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념이나 신앙적인 신념에 하나님을 집어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으면 맨발로 갈 때 어떨까요? 반듯하게 위풍당당하기 보다는 뒤뚱뒤뚱 불안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 비밀을 맞이하는 모습은 당당함 보다는 겸허한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방법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방법, 경륜과 섭리에 자신이 통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 하였습니다. 그 곳은 황량한, 고독한, 도적들이 드나들며, 승냥이가 들 끓는 버려진 사막이요. 버림받아 쫓겨난, 실패한 곳입니다. 이 곳은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는 곳을 거룩하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찿아 나서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찿기 위해서 거룩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찿아 오는 곳, 그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찿으십니다. 모세가 어디에 있든지, 그 곳이 죽음의 자리, 저주 받은 곳, 어두움의 자리라 할지라도 주님이 그 곳으로 찿아 오시면 그 곳은 빛입니다. 마굿간이 아무리 더럽고 냄새나도 그 곳은 거룩한 곳이요, 빛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영광이고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찿아오시는 하나님에게 가져야 할 마음은 신발을 벗는 겸손하고 온유한 기다리는 마음인 것입니다. 신발을 벗기 전의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많이 해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 하다가 동족들에게 버림받는 참담함에 이르릅니다. 이렇게 버림받은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족을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기 위해서는 기다림, 겸손과 온유함으로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그럴때 기쁨의 평화가 우리에게 넘칩니다. 지금 기다림의 기간입니다. 이 오랜 기다림 마치 포도주가 완전히 발효되어 참 맛, 향, 색깔을 내듯이 그런 기다림을 통해 성탄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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