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생명의 성령의 법 Ⅱ(2010년11월28일, 대강절 첫째주일)

하늘기차 | 2010.11.28 13:37 | 조회 2055


생명의 성령의 법 Ⅱ

2010년11월28일(대강절 첫째주일) 롬8:9-17

지난 주에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싸우면 이겨도 져도 모두 피폐해 지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난 곳은 폐허가 되기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싸워 이기지 못합니다. 싸우다 지쳐서 삶의 윤택함, 기쁨, 의미, 희망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내가 나의 의지와 힘으로, 나의 능력으로 죄와 맞서 싸워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빠져나올 때 모세는 바로에게 무어라고 이야기 합니까? 절기를 지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400 년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애굽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심을 다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모습 지금 그대로 주께 나아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으로 나아가 예배드릴 때 까지 함께하시며 도우셨습니다. 여러 재앙과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얽 매어 있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움 받으려면 싸움이 아니라 이러한 간절한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마 애굽과 싸우려 들었으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그 강한 이집트 군대에 의해 멸절당했을 것입니다. 이 출애굽 이야기 속에 우리가 어떻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에대한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롬1:29 이하에, 그리고 딤전3:1 이하에 보면 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죄의 열심을 봅니다. 죄가 열심을 냅니다. 죄가 얼마나 열심히 땀흘리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이겨낼 장사가 없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대적하여 싸울까요? 열심을 내서 맞불을 놓을까요? 그러나 롬7:2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
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이 죄와 싸우는데, 그 죄의 법이 자기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죄를 어찌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놓아둡니다. 우리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령을 요청합니다.

나의 능력이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롬8: 14-16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
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
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그 때야 비로서 종, 노예가 아니라 자녀로 상속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한 바리새인 청년이 예수님께 찿아와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하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마22:37 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것이 모든 성경의 율법과 예언서의 본래의 뜻이라 자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에대해 말씀하실 때 39절에 무어라고 토를 다셨는가 하면 ‘둘째 계명도 이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우리는 이 사랑을 잘 모릅니다. 우리 안에 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어디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나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자녀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종이나 노예는 죽었다 깨어나도 맛 볼 수도 나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8:17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
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
다” 그렇습니다. 왜 종이 아니고 자녀여야 하는가 하면, 그 안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나 노예는 이 고난 감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속자는, 자녀는 아버지의 고난을 함께 지려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수 도 없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을 주님께서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거듭,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끌어 올려 이스마엘이나, 엘리에셀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시려고 거듭 언약을 갱신합니다. 결국 내 몸에서 난 이삭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속자는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고 그 소유를 이어갈 자입니다. 바로 그 자녀가 아니고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노예나 종은 그 사랑 상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롬8:17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종이 아니라 자녀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여준 그 사랑을 은혜로 받고, 그리고 그 받은 것을 나누려면 자녀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하고 이야기 하면서 자꾸 하나님 이야기, 하늘 이야기 하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라 한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고 그저 자기 종교 속에 머물러 있어 가지고는 그저 평생 자기 일 하다가 멈추고 말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구서는 아무런 감동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감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틀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것은 편하고 보기에도 좋습니다.

죄에 붙들려 죄의 노예가 되면 그 아래에서는 늘 죄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처럼 바벨론과 페르시아의최고의 공직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 일이 모두 노예의 일 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주인의 일 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해야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의 능과 힘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라고 실토하며 롬8장에서 성령을 요청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요청한 사도 바울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롬 12장을 보면 그동안 롬1-11 장 까지 모든 교리적인 말씀을 설파한 다음에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라고 하면서 무어라고 말씀하는가 하면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
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
다”라고 합니다. 온전히 주께 모든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내 삶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것이 쉽지가 않지요. 그동안 죄에 붙들려 죄의 종으로 살다가 어떻게 자유자로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무엇으로 진정 하나님의 주권이 내 안에서 넘쳐 날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8:16에서 보면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라고 합니다. 나의 정체성, 나의 자유함, 나의 온전한 내 안의 아버지 주권 인정을 성령께서 증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반드시 거듭나 자녀가 되어야 아버지의 상속자 특히 십자가의 사랑의 나눔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포로의 생활은 비참한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종이요 노예인데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풍요로울 수록 더 그렇지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습니다. 오랜 포로생활을 지내면서 자신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환상 가운데 어느 골짜기로 데리고 갔는데, 그 곳에 가 보니 마른 뼈들이 가득히 있습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소망을 잃어버린지 오래입니다. 그것은 살고 있지만 사는게 아닙니다.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영적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골짜기에 수북히 쌓여있는 먼지 풀풀 나는 마른 뼈다귀들로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다귀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마른 뼈다귀에 힘줄이 이어지고,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지지만 그러나 숨쉬는 기척이 없습니다. 살지를 못합니다. 겉은 멀정한데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 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합니다. 그러자 생기가 그 뼈다귀들에게 들어가 곧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룹니다. 그렇습니다. 생기가 없으니 살지 못합니다. 영이 없으니 움직이지 못합니다. 살아있지만 산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없는 삶은 마른 뼈다귀와 같은 삶입니다. 롬8:9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사요, 장로요, 권사요, 성가대요, 교사요, 구역장이요, 권찰이요, 목사요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마른 뼈다귀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말씀처럼 아무리 그 뼈 마디 마디에 힘줄이 이어지고, 그 사이 사이에 살이 붙고, 그리고 그 겉을 살갗으로 잘 씌워도 그것은 그대로 뼈다귀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X-RAY로 투시하면 영은 없고 그대로 뼈다귀입니다. 그래서 한 호흡, 한 발걸음을 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불어오자, 그 뼈다귀는 살아납니다. 계시록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옵니다. 스스로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 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네가 부자라고 하지만 이제는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벌거 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또 안약을 사서 발러 눈을 뜨라 합니다. 그러면서 계3:20은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
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 주님의 영인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 신앙생활, 그것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모습이며, 에스겔 환상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와 같은 것입니다.

이 마른 뼈가 의미하는 가장 깊은 뜻은 소망이 없는 삶일 것입니다. 가나안을 바라는 아버지 향한 분명한 방향성을 잃고 사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것입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 어떤 사람은 총리대신으로, 아니면 계산이 빨라 경제적으로 풍요로울지라도, 아니면 그 반대로 이도 저도 아니어 궁핍하게 살던 어찌되었던 모두 마른 뼈다귀일 수 밖에 없는데, 이스라엘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며, 성전을 다시 재건할 것이라는 소망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죄의 사망의 법에 붙들린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니 영적 열매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 롬8:14,15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다
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
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종이 아니라, 자유자로 상속자로,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5/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09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83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44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31 2005.09.02 16:30
295 [일반] 오랫동안 기다린 주(2010년12월12일, 대강절 세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07 2010.12.12 14:03
294 [일반] 평화에대한 일을 알았다면(2010년12월 5일, 대강절 둘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38 2010.12.05 16:08
>> [일반] 생명의 성령의 법 Ⅱ(2010년11월28일, 대강절 첫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6 2010.11.28 13:37
292 [일반] 생명의 성령의 법(2010년11월21일, 성령강림절후스물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7 2010.11.21 14:44
291 [일반] 죄 가운데서 . . .(2010년11월14일, 성령강림절후스물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2 2010.11.15 09:47
290 [일반]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2010년11월 7일, 성령강림절후스물네번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6 2010.11.07 16:11
289 [일반] 감사는 영적이다(2010년10월31일, 추수감사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0 2010.10.31 13:38
288 [일반] 프로테스탄트 : 종교 개혁(2010년10월24일, 성령강림절후스물두번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9 2010.10.24 15:48
287 [일반] 나는 생명의 빵이다(2010년10월17일, 성령강림절후스물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28 2010.10.17 14:57
286 [일반] 빛으로 나아오자 Ⅳ(2010년10월3일, 성령강림절후열아홉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39 2010.10.03 14:48
285 [일반] 빛으로 나아오자 Ⅲ( 2010년9월26일, 성령강림절후열일곱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05 2010.09.26 15:42
284 [일반] 빛으로 나아오자 Ⅱ( 2010년9월19일, 성령강림절후열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1 2010.09.19 13:53
283 [일반] 빛으로 나아오자(2010년9월12일, 성령강림절후열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58 2010.09.12 14:19
282 [일반] 은혜란?(2010년9월 5일, 성령강림절후열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99 2010.09.05 15:28
281 [일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2010년8월29일, 성령강림절후열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612 2010.08.29 14:30
280 [일반] 시온산에서 벌이는 잔치(2010년8월22일, 성령강림절후열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42 2010.08.22 13:58
279 [일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2010년8월15일, 성령강림절후열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891 2010.08.15 15:12
278 [일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자(2010년8월 8일, 성령강림절후열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4 2010.08.08 15:14
277 [일반] 내게 시간을 주세요(2010년8월 1일, 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01 2010.08.01 15:05
276 [일반] 하하, 웃으시는 하나님(2010년7월25일, 성령강림절후아홉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516 2010.07.25 1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