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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넘어서(2011년 4월10, 사순절 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4.10 16:10 | 조회 2204


시험을 넘어서

2011년 4월10(사순절 다섯번째주일) 벧전4:12-19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왜 광야로 가셨을까요? 눅4의 말씀을 보면 주님이 광야로 가신 것은 당신의 생각이기 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했을 때에도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간 것은 이스라엘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로 나아간 것입니다. 광야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광야에는 뜨거운 태양, 목마름, 그리고 해가 떨어진 뒤의 추위, 배고픔, 맹수, 벌레들, 질병, 적, 외로움 등, , , 우리의 일상에서 누렸던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태여 광야로 나아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어 몰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동안 지내게 하셨을까요? 혹 뜻하지 않는 광야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광야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덧 입혀지고, 파 묻혀있었던 본래의 자기 자신입니다. 광야에는 하나님과 나만이 있습니다. 모세가 거짓 엘 하나님 우상 속에서 참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것도 역시 빈 들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도 형 에서를 속이고 위기를 느껴 광야로 도망 갔을 때 였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분명이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정말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찿아야 하는데, 정작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작은 것 지키는 것이 소중합니다. 시간을 맞추어 교회의 예배, 성경읽고 나누기, 기도, 식사당번, 구역모임, 남녀선교회 , , , 등 이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에게 익숙해 지는 것입니다. 그럴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나아가 어찌해야 할지 묻고 답하며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딤전3:13에 보면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사람들은 좋은 지위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직분자들의 헌신을 축복해줍니다. 교회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일들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기도순서, 작은모임 등에 임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처음 나온 분들은 참 진지하게, 소중하게 교회의 일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한 5년 정도 지나면 이제 다른 일들이 생깁니다. 한 달 전에 주보에 미리 알려주는 역활분담에 대해서도 직장이나, 가족의 일 때문에 부득불 참여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미쳐 주보를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는 사회에 일이 없었나 봅니다. 집안에 일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5년 정도 지나면서 이상하게 집안에, 직장에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혹 작은 것에대한 소중함, 귀중함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크고 작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 앞에는 크고, 작은 것 모두 같은 하나님 일인 것입니다. 출33:11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진 바깥의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때 모세가 하나님과의 대면 후 진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그 회막에 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나아가 싸우라 할 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군사들을 데리고 적진읗ㄹ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대동하고 산 위에서 하나님께 두 팔을 들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 때 두 팔에 힘이 다 할 때 다시 팔을 들어 올린 사람은 아론과 훌이 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모세의 옆에서 아론과 훌과 더불어 끝까지 모세를 도왔고, 후에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맡은 일에 순종하여 겸손히 말없이 그저 자기일 하는 사람을 성경은 복되다고 합니다. 믿음의 확신, 그리고 명예를 더한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2지파 별로 가난안 땅에 정착하는데, 헤브론 지역을 차지할 지파는 유다지파였습니다.다른 지파는 대부분 땅을 다 차지하였는데 유다 지파만 아직 분할받은 그 땅을 얻지 못합니다. 그 때 유다지파의 한 사람인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나아가 자기를 헤브론으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헤브론은 산악지대여서 요쇄가 견고하고 지세가 험악하여 아직도 정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 늙은 갈렙이 선봉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내 나이가 85이지만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나를 살아남게 하셔서 여전히 건강하여 전쟁하러 나가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는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의 확신 믿음의 용기입니다. 교우여러분 믿음에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낼 수 있는데, 이러한 믿음의 확신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하면 작은 것, 아니 작은 것 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일 저녁 예배, 수요일 저녁 같이 ,또는 교회 공간 깨끗게 하는 일이나, 교회 식구들 중 소외되는 사람들에대한 관심 등, 이러 저러한 일들을 감사하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계시록 3:8에 보면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
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이는 빌라델비아 교회에대한 말씀인데 힘이 적지만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앞에 문을 하나 열어두었다는 것입니다. 소통하며,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 축복을 물리치지 마시기 바랍니다.작은 것 소중히 여길줄 알아야 합니다. 은헤를 은헤로 여길줄 알아야 복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작은 것들을 통해 익숙해 있을 때 나에게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어려움과 시험이 올 때 하나님께 묻고 의지할까요? 우선은 그 시험이 우리가 감당할 만하다면 시험이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 앞에 닥쳐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올 때 먼저 우리가 깨닫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유한하며, 부족하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은 바로 인간의 한계, 유한함, 연약함, 불쌍함, 힘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자신의 벌거벗음이 전혀 불편하거나 손해를 본다거나, 어색하지 않았지만 뱀의 유혹을 받고, 욕심이 생기면서 그 벌거벗음을 옷으로 위장합니다. 임시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우지만 금방 또 가리워야합니다. 바로 인류가 쌓아온 철학, 역사, 문명, 문학, 예술까지도, 그 풍요로움 인류의 업이 우리를 가리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하며, 연약하며,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서로 돕고, 나누며, 감싸고, 서로 인정하고, 용서하며, 관용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일본에 닥친 쓰나미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기 정체성을 찾게하기 위한 아픔이요, 시험이요, 고통입니다.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내려놓고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극한 어려움을 통해 우리는 나의 본래의 모습. 은혜 아닌 것에 매여 있던 삶을 버리고 은혜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이런 어려움과 극심한 고통이 찿아 올 때 사람들은 쉽게 운명이거니, 팔자이거니 합니다. 또는 왜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가 이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며 원망과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러나 기독인에게 있어서 환난과 시험은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고, 그 고난, 그 아픔, 시험에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우리의 역사를 고난과 눈물의 역사로 보면서 이 아픔, 고통을, 남북분단의 시련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보니 모든 한국사가 하나로 꿰어질 수가 있습니다. 바로 ‘뜻으로 본 한국역사’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의 아픔,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운명이나, 팔자, 또는 ‘왜 나만 이렇게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데?’ 가 아닙니다. 욥은 자신의 재앙 속에서 하나님을 찿았고, 그 하나님을 통해 참 신앙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고난과 재앙이 죄의 결과 만이 아니라는 것을 봅니다. 의로운 자에대한 고난에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의 지평이 열리고 있으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에 꿈쟁이 요셉에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장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요셉인데, 그의 인생은 고난과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환난은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꿈이 있고, 비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요셉의 가족과 중동 지역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벧전4:12,13을 보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
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
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
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불 같은 시험 모든 것을 다 태울 것 만 같은 어려움이 올 때 이사야의 말씀 처럼 고난의 풀무에서 견디어 내려면, 그 시험, 환난이 팔자려니, 숙명이려니, 또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려니 하는 인간적인 자기연민의 인과응보의, 또는 권선징악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경륜, 계획이 어디 있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만화영화 이집트 왕자2에서 요셉이 감옥에 갖혔을 때 부르는 노래중에 ‘왜라는 이유도 내려 놓았습니다’노래가 있습니다. 이 것은 ‘자기 의로움’도 내려 놓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의’ 내려놓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나에게 주시는 아픔, 고난, 눈물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인데, 여기서 ‘나의 의’를 세운다면, 물론 이 의로움이 합당하고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욥처럼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 없이 그대로 내 것이라는 것 모두를 가만히 내려놓고 주님 앞에 머무는 것이지요.

어려운 이야기 같은데, 아우슈피츠 가스실 앞에서 ‘왜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보고 계십니까?’라고 묻기 전에, 왜냐하면 이유나 원인을 묻는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그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를 찿는 것인데, 그러니까 논리적인 어떤 실마리를 찿아 본다는 것인데, 아우슈피츠에서 일어난 600만명의 학살 사건은 이미 그 합리성이 깨진 상황인데, 그 합리성을 누가 깼는데, 그 현장에서 ‘왜?’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의 내전 속에 노출된 18살 도닌 소년의 그 눈 빛, 수 많은 인명을 처참하게 살해한 그 소년의 눈 빛은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또 16살된 소녀 아이가 반군의 사령관에게서 난 아이를 등에 업고, 손에는 정부군 사령관의 아이를 손에 잡고 서 있는 현실 앞에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미 ‘왜?’라는 질문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합리성과 질서가 인간의 욕망과 폭력으로 깨어지고 무너지는가를 우리의 눈으로 봅니다. 인간의 합리성, 논리, 이성만 가지고는 해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번의 일본의 자연 재해 앞에서는 더 더구나 말입니다. GIVE & TAKE만 가지고는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너도 이만큼 주어야 해 라는 합리성말입니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 말입니다. 이 것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고 받는 것은, 합리성, 논리는 은혜와는 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그러니까 생은 선물로 받은 것 이기 때문에

주고받는 논리와 합리성은 은혜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거저 받은 생명의 은혜로 나아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생(生)은, 산다는 것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선물로 조건없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받았으니 나누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상대적이지 안습니다. 절대적입니다. 이렇게 오늘 헤체되는 세상 속에 헤체되지 않는, 헤체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생(生),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고 받는 것은 삶이 아닙니다. 주고받는 것으로 가득찬 삶은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런 나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은 불같은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히2:18은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
다”라고 합니다. 또 계3:10을 보면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
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주님
께서 도우시고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도와주십니다. 나의 것이라는 것을 다 내려 놓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찿아오십니다. 그리고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창41:38,39에서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하고 나서 바로가 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이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셨는데, 너처럼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
느냐?” 또 창26:28,29에 보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팠을 때, 이삭을 그렇게 괴롭혔던 아비멜렉이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언약을 맺읍
시다. 우리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고, 당신을 잘 대하여, 당신을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어찌보면 개인의 신앙은 가까운 교우나, 교회 보다는 하나님을 믿지않는 사람을 통해서 고백되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인이나 교회는 격려차원에서 개인의 신앙을 칭찬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안믿는 사람이 ‘저 사람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아!’라고 한다면 그 사람 신앙은 온전하다 할 수 있지 않나 사려됩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지 않기로 작정한 직후에대해 단1:8,9은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환관장에게서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주셨다”라고 합니다. 고난과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이 받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움과 인도하심입니다.

네 번째로 시험과 환난에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의 고난이 400년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70년이었습니다. 모세의 피난 생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도 40년이었습니다. 요셉은 창41:46을 보면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가 30세 였다고 합니다. 창37:2에 요셉의 나이를 17살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욥의 시험이 13년 만에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시험이 있다면 그 끝이 있습니다. 끝을 잘 마무리 해야합니다. 시작은 각기 다를 수 있어도, 끝은 같은 은혜 받고 지내 왔어도 은혜를 은혜로 받은 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렇게 끝을 잘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끝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도 그렇게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지금 나에게 다가온 시련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정금 같이 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며, 그 시련을 이기고 나서는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귀한 존재로 세우시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과 어려움, 고난과 아픔을 통해 하나님을 구하고 찿으며, 그 기다림 속에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기쁨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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