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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 쓰나미(2011년 4월 3, 사순절 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4.05 11:25 | 조회 2241


욥과 쓰나미

2011년 4월 3(사순절 네번째주일) 욥42:1-6

이 번 일본이 겪은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 사고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말들 중에 하나가 ‘자연 현상과 하나님’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 자연의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욥기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욥기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하면 우리는 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시험은 글자 그대로 사탄에게서부터 발단이 됩니다. 어느 날 사탄이 하나님께 가서 욥의 신앙과 의로움은 욥이 가진 것에서부터 온다고 하면서 그에게 있는 것들을 다 없애면 아마도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도전장을 냅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그 도전을 받고, 욥은 가족, 재산, 그리고 건강 마져 잃어버리게 되는 시험을 당합니다. 욥은 그 때에 하나님의 지혜의 문을 열어 제꼈습니다. 욥은 욥1:21에서 바로 그렇게 하늘 지혜의 고백을 합니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
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또한 잿더미에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몸을 긁을 정도로 몸에 심한 악성 종기가 났지만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
소?”라고 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오히려 이제부터입니다. 욥이 재앙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러 3 친구가 찿아옵니다. 두 번의 시험을 너끈히 통과한 욥이 세 친구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엘리바스가 4:7-9에 보면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
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모두 하나님의 입
김에 쓸려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갈 것들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멸하
시고, 올바른 자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면서, 어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
하라고 합니다. 물론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욥은 지금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받을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자기의 결백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이해하려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는 자기가 ‘죄인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지금 받는 고통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라는 것이며, 이에대해 욥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호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계속 욥의 죄를 추긍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욥은 거듭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친구들과의 논쟁이 심화되면서 3친구는 더 이상 욥에게 충고하거나, 돌이켜 보지 않게 됩니다. 욥이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자기는 이 재앙을 이해 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하자 친구들을 화나게 합니다. 이제 친구들은 더 이상 욥의 위로자가 되지 못합니다. 친구들이 욥을 바라보는 말의 전형이 20:15-17입니다.
“악한 자는 꿀꺽 삼킨 재물을 다 토해 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재물을 그 악한 자의 입
에서 꺼내어서 빼앗긴 사람들에게 되돌려주신다. 악한 자가 삼킨 것은 독과도 같은 것,
독사에 물려 죽듯이 그 독으로 죽는다. 올리브 기름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그는 못 볼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것도 못 볼 것이다” 그러면서 28에 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그 집의 모든 재산이 홍수에 쓸려가듯 다 쓸려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마치 쓰나미와 원전사고로 초토화된 일본에대해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논리와 똑 같습니다. 일본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것인데, 지금 3친구들이 욥을 몰아붙이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이에대해 욥은 13:4에서 ‘너희는 돌팔이 의사’, ‘무식을 거짓으로 때우는 사람’이라 하며 친구들의 논리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물론 욥이 당한 재해와 일본이 이 시대에 겪은 재난과는 여러 가지 상황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재앙, 시험, 재난이든 그 재난에대해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도덕적 잣대로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며, 성서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눈먼장님을 보며 이 사람이 눈이 먼 것이 부모님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눈이 먼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장님의 현재의 모습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경륜 안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타부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즉 가치판단,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대해서도 사람들은 모두 돌을 들어 여인을 정죄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하면서 나는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죄 이전에 불쌍히 여기심, 긍휼을 베푸심, 자비와 사랑이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의 죄를 그대로 두셨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시며 죄 없다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번 조용기 목사나, 이전의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의 김홍도 목사의 발언은 참 부끄럽고, 천박하며, 한국교회의 폭력적인, 유아기적인 수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질타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바로 예언자적인 전통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어는 왕이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에, 그 죄의 당사자들에게 나아가 그 죄를 폭로하고, 정죄하며 심판을 외쳤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고난과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신약의 세례 요한도 바로 그러한 구약 전통의 마지막 예언자 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일본의 재앙을 바라보며 죄 운운하는 모습은 마치 눈먼 자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이고, 간음하다 현자에서 잡힌 여자를 돌로 치려하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기 중심적, 유아기적, 바리세적 관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형과 같습니다.

하여간 욥은 이 고통과 아픔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고 밝히려 합니다. 변론 중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며 자기 실존의 참담함을 부르짓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이 부당한 고통이 자기 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배고픈 사람들이 거리에서 이름없이 죽어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인과응보와 보상에 초점이 맞추어진 개인적 윤리에서 벗어나 이웃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자유로워집니다. 욥의 부르짖음은 시편이나, 예레미야 애가를훨씬 뛰어넘는 애통과 부르짖음과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하나님을 초청합니다. 친구들의 논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중재자가 되시고 증인이 되어주시고 재판관이 되어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너무 하나님과 비교할 때 초라하고, 힘없어서 비록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 분이 내 입을 시켜서 나를 정죄하고,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틀렸다고 하실터인데 하면서 사는 것이 싫다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16:18-22에서 보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욥의 질문은 아마도 이 시대를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욥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 평생에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원수가 고통받는 것도 기뻐하지 않았다며 마치 법정에서의 최후진술을 하는 것 같이 변증을 합니다. 그런데 엘리후라는 젊은 사람이 등장하여 욥의 친구 3사람에게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에게 답변을 해 주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악이나 의에 좌지우지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나 의와 불의에 휘둘리지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라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며, 온 천지 만물의 주권자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햇빛과 바람과 비를 내리시며 천지 자연, 온 우주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이 온 우주의 생명의 현상에 비하면 인간의 ‘자기 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가를 말해줍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욥과 하나님이 대면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3친구도, 엘리후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섭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대하여 말할 때 일관되게 계속 두려움을 가지고, 힘이 있으시고, 강하시다고 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찿으며 하나님에게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라고 하면서 거칠게 항변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욥에게 찿아온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찬찬히 말씀하십니다. 누가 땅의 기초를 놓았는지? 바다를 가두어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게 물결을 멈추게 한 것이 누구인가? 누가 아침 새벽 먼동이 트게 하는가? 이슬과 얼음, 눈, 하늘의 별을 운행하는가? 까마귀 떼가 먹이가 없어 헤멜 때에, 그 새끼들이 나에게 먹이를 달라고 조를 때에, 그 까마귀 떼에게 먹이를 마련하여 주는 이가 누구인가? 들나귀들을 자유롭게 하며? 들소의 힘, 타조의 빠른 발, 매가 높이 솟아오르고, 말의 발굽 등 온 세상 우주 만물을 운행하는가? 황폐한 황무지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아는가? 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의미는 이 세상 창조자, 주권자가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 메여있다 보니, 그 귀한 죄 사함의 구속의 신앙이 자꾸 종교적으로, 교리적으로 넘어가는데, 하나님은 욥의 죄를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욥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러한 고백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말입니다. 이 질문은 600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할 때에도 들려왔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과 저주 앞에 우리는 겸손히 우리가 피조물인 것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임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얼마나 미미하며 보잘것 없는 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이제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거대한 물질문명의 바벨탑이 얼마나 공허하며, 허망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번 일본의 재앙을 보고, 그리고 욥기를 다시 읽어 보니 우리의 마음이 욥의 마음, 욥의 3친구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욥과의 논쟁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 중심의 창조관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물론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지만 악을 멸하실 때에도 한 순간에 멸하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인간 역시 악일 때도 있고, 선일 때도 있어, 인간의 그러한 자유로움을 존중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이든, 타락한 사람이든 그 사람 자체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정의라고 하는 합리적, 논리적이라고 하는, 인과 응보, 권선징악의 울타리를 넘어 자유와 은혜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조건없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롬3:28 말씀처럼 믿음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승리자의 권리로도 아니고, 정의의 실천으로서도 아닙니다. 이 나라는 댓가 없는 선물, 은혜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 그 무조건 적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자유에대해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이제 정의의 편협한 개념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욥은 이제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에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결국 욥은 자기 의가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42:5에서 욥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이 ‘자기 의’만 주장하다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벌거벗었음을 보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홍도 목사나, 조용기 목사 처럼 정죄하고, 인과율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묵지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말라는 경고!! 지혜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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