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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십자가(솟대와 십자가, 2011년 3월27;사순절 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3.27 14:08 | 조회 2534


창조와 십자가(솟대와 십자가)

2011년 3월27(사순절 세번째주일) 요1:1-4,14

영성 수련 강좌를 잘 마쳤습니다. 여러분들 어떠했는지요? 마지막 날에는 다소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첫 째날 창조 묵상 시간 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묵상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머물러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요15장 포도 나무 비유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머물러 있을 것을 무려 11번이나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머물러 있는 것, 즉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비유의 결론 부분에 가서 예수님은 또 한 번 말씀하십니다. 16절에 보면 이제 가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바로 아버지께 구한 것을 무엇이든 다 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는 머물러 있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그 머뭄을 통해 11절 말씀을 보면 기쁨이 너희 안에, 그러니까 우리 안에 넘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 머물러 있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첫 날 창조 묵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 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다”는 지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귀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또 둘째 날인가요 천국, 영생, 구원이 다 같은 의미라고 말씀하시며 공간적인, 시간적인 의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로서 조금 아쉬웠던 것은 그 영생, 천국, 구원의 개념 속에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빠진 것이 아쉬웠습니다. 의미를 부여한다면 사건으로서 우리 삶의 현장 속에 살아있는 나라이지요, 세상 나라 속에 지금도 살아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바로 하나님 나라에대한 묵상이 아쉬웠습니다. 또한 둘째 날에는 십자가 묵상을 구체적으로 12가지 덕목을 말씀해 주면서 실제 묵상을 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 느낀 것은 창조와 십자가 사이에 항상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중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예를들어 십자가 구원으로만 가다보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아멘!’하고 마치 다 이루어진 것 같은 만족감에 젖는다면 이제 그 때부터 종교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교회면 교회, 이렇게 묵상이면 묵상, 삶의 현장을 무시하고 십자가 구원만 바라보니, 자신의 이기심이 종교적 만족으로 표출되고, 그것이 신앙인 것으로 굳혀집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내용은 없고 십자가 믿음만 강조하다 보니 그 믿음으로부터 오는, 그 은혜로부터 오는 예수 따르는 삶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수 많은 기도, 훈련, , , 모두 다 결국 종교심, 자기 만족, 자기 연민에, 그러니까 자기 이기심, 자기 욕구를 아주 고상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즐거움인 마음을 통해 맛 보는 것이지요. 혹자는 그래서 아편과 같다는 것입니다.

창조 신앙도 그렇습니다. 이 세계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며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맛 볼 수 있지만, 이 것이 지나치다 보면 범신론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번 구제역 예배를 준비하면서 우리 박경장님과 몇 몇 분들이 우리 전통의 솟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일 교회 앞 공방 하우스 옆에 십자가와 함께 솟대를 꽂아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아니 작년부터 밤토실 도우미 엄마를 통홰 몇 몇 분들이 요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요가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몸도 몸이지만 요가의 정신이 결국 마음 수련이거든요. 그럼 기독교인이 동네 마다 있는 태권도장에 자녀들을 보내는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태권을 배워 보았지만 마음 수련이 따르거든요. 그럼 그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하여간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 다시 말해 타락한 인간의 죄로 가득한 마음으로 명상을 하고, 무언가 변화를 주고 새로워진다는 가정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을 가지고 어떤 명상과 마음 공부를 해도 죄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고,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는 요가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다른 교회 교인들이 우리 교회를 보면서 이상하게 보기도 하지요. 그런데 요가 선생님이 참 고마운 것은, 이 선생님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신 것 같에요. 그래서 예배당 안에서, 십자가 아래에서 마을 분들과 함께 요가를, 그것도 무료로, 그러니까 나눔의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좋은 시간을 갖고 계십니다. 그 요가 선생님의 마음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얼마 전 봉은사에 들어가 탑 돌이 기도를 하는 자신들이 행하는 행동이 폭력인지 모르는 폭력에 익숙한 기독교 청년들, 조계사에 들어가 확성기를 대고 불신 지옥, 믿음 천당 이라 외친 폭력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 보다 말입니다.

그런데 고민거리가 한가지 생겼습니다. 요가 선생님이 요가에 깊이 들어가려면 마음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마음 수련의 단계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러면 그 마음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거 참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독인이 그 마음 수련 따라가기도 그렇고, 그럼 여기 까지만 하자고 하기도 그렇고, 나름대로 이리저리 생각하던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기독인은 기독인의마음 수련을 하면 되고, non christian은 나름대로 마음을 수련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작지만 본질적이지 않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렇게 유한하고 부족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경계도 있지만 다른 쪽 경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라는 것이 바로 그 경계인 것입니다. 그 경계를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서로의 경계를 잘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 끊임없이 이 경계를 접하며 살아갑니다. 이 경계가 벽으로 느껴질 수 있는가 하면, 마치 세포와 세포가 졸과 겔의 상태로 넘나들며 공존하듯이 그렇게 서로를 지켜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악과는 태고의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기 위해 단 한번 따 먹은 열매가 아니라, 지금도 실존 속에 언제나, 어디나, 지금 이 자리에도 존재하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따 먹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기업 오너와 작원, 시어머니와 며느리, , , 무수한 관계 속에서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가를 할 때 교회식구들은 창조 묵상, 십자가 묵상, 성령 묵상을 통해 그 요가, 하나님께서 인도의 요기들을 통해 인류에게 주신 풍요로운 유산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창조 신앙으로 넘어가면 그 끝쪽에 범신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난 자유로워 괞찮아 하면 그것이 안 괞찮은 것이지요. 인간은, 피조물은 늘 한계 유한, 부족, 연약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겸손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를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번 구제역 예배를 드리자고 향린 교회에서 제안을 해 왔을 때,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 구제역 예배 기획안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예배의 제목을 보고 좀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구제역으로 생매장 당한 가축들을 위한 살풀이 예배 굿’으로 되어 있드라구요. 속으로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참 고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제목을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보수적인 분들은 단 칼에 베어버리겠지요. 사탄 마귀 물러가라!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지난번 영성 강좌 마지막 예배 때에도 얼마나 멋진 대금 연주와 찬양을 통해 신앙을 고백했나요. 그러니까 박경장 집사님도 나와 조금은 다르지만 박경장 집사님의 하나님 사랑의 귀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배 기획안에 선악과 한 그루가 심겨져 있더라구요. ‘저걸 따 먹어 그리고 입을 씻어’ 하는 마음도 있고, 아냐 ‘하나님 만이 아시는 그 분의 삶과 신앙의 자리가 있지’ 하는 생각이 오락 가락 했습니다. 내가 안된다고 하면 그렇게 열성적으로 준비하여 나를 믿고 기획안을 내 놓았는데 그냥 일거에 거절해 버리면 그 다음에 그 골 깊은 상처를 통해 얼마나 서로 서먹 서먹하고 서운할까? 하여간 여러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좀 풀어나갔습니다. 아니 우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일단 죽음에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일단 죽음에대해서는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며, 그 모든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이미 죽은 피조물에대해 그 죽은 영혼을 더구나 사람도 아니고 가축인데 그 죽음을 위해 살풀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들어 그 죽음을 아퍼하고, 안타까워 하며, 그 죽음을 죽게한 지금 이 시대에 만연히 퍼져있는 물질숭배의 죄를 하나님께 내 놓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 영혼을 위로한다고 위로가 되나요. 이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는데, 생명이 고귀한 것은 한 번 생명이기 때문이지요. 죽고나서 어떤 다른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저 우리의 바램이고, 연민이지 하나님은 생명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육은 죽고 영은 살고 하는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지요. 죽음은 그냥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중세 때에 왜 종교가 결정적으로 타락을 했나요. 죽은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헌금하면 하나님이 그 헌금을 받고 죄 많이 짓고 죽은 가까운 사람의 영혼을 천국으로 돌려보낸다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사람들은 장난을 칩니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지요. 이 번 쓰나미 건도 그래요. 그렇게 날고 긴다는 점쟁이들이 그 쓰나미가 온다는 것을 왜 미리 알지 못했는 가라는 것입니다. 시간에대해, 죽음에 대해 인간은 겸손히 그 한계를 받아들여야지요. 그리고 그 한계, 그 연약, 그 벌거벗음이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지요. 그 좋은 것 지켜야지요. 만약에 무한하다면 말씀드렸지만 충만함, 나눔, 아름다움, 맛과 색과 향이 어디 있나요?

하여간 그래서 살풀이는 아니라고 했지요. 그래서 굿이 아니라 예배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픔, 고통을 품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참회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결론 없이 헤어졌지요. 그런데 박경장님이나 진보적인 신앙인들은 토속화 신앙을 따라 굿이 예배라고 하거든요. 존중해 주어야지요. 그래서 그 후 인터넷을 통해 기독교 사이트를 검색하여 부지런히 굿에대하여, 기독교는 굿에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 열심히 찿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구 나서 수요일 저녁 예배 때에 향린교회의 은하씨가 찿아왔습니다. 우리 교회와 마을 분들에게 사물을 잘 가르쳐 주었지요. 편지도 A4로 두 장이나 적어서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저는 이미 그 후에 박경장님이 가지고 온 기호기안을 다 받아들인 상태였어요. 사실 박경장님과 헤어지구나서, 내가 내 생각만 고집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전화로 박경장님에게 다 괜찮으니 그 구제역 참회예배를 드리자고 했는데, 은하씨와 함께 찿아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나나 향린 교회나 벌써 마음이 서로 통해있었던 것이지요. 나는‘살풀이’, ‘굿’이라는 용어를 쓰지말고 ‘예배’라고 하자 그리고 그 예배 속에 나오는 굿과 관련된 용어들 다 좋다, 어차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인데 그 용어 아무려면 어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박경장님도 지금 참회를 드리는 마당에 ‘네가 옳고 내가 옳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지요. 종교 역사가 그렇고 세상의 역사가 그렇게 서로 다르다고 분열하였다면서 이 번 참회 예배를 고기교회와 꼭 같이 드리고 싶다면서 풍물을 배우면서 자기가 우리의 좋은 전통 정신의 좋은 의미를 발견하고 너무 좋와 그 것을 여과없이 차용하였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함께 가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이렇게 참회의 예배를 함께 드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전 ‘굿 예배’,에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하면 그 예배 기획안을 교회 앞에 내어놓고 그저 이벤트, 일회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혹 익숙하지 않더라도 그러려니 하며 예배에 참여하자고 성도들에게 말씀드리려 했는데, 모든 것이 눈녹듯이 녹아버리고 개신교회에서 처음으로 참회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일본의 쓰나미 때문에 그 의미가 희석이 될지 모르지만, 그 수백만의 죽음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의 수치스러움을 드러낸 죽임이었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참회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제가 앞에서 솟대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구제역 참회 예배의 진행 과정을 이야기 하게 되었는데, 여러분은 솟대를 보며 어떤 느낌이 드나요? 어떤 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좋아하지 않는 쪽이지요. 그냥 솟대면 솟대, 십자가면 십자가지 솟대와 십자가를 같이 놓는 것 정서에 잘 안맞아요. 그래도 열심히 만드는 모습을 뭐라할 수 없고, 그리고 그렇게 신앙을 자연 스럽게 고백을 하니 우리 교회도 아니고 어쩌겠습니까? 또 만들어 놓고 함께 보니 그리 볼상스럽지도 않더라구요.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또 해 보았지요. 새해에 풍년을 기리며 볍씨를 넣은 주머니를 장대에 묶어 세워 놓기도 하고, 마을 입구에 세워 마을 수호신 역할도 하고, 과거에 급제하면 축하하기 위해 꼭대기에 푸른 색 용을 붙인 주홍색 장대를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솟대 위에는 오리나 기러기 등이 올려지는데, 옛날 솟대의 새들은 천상계의 신들과 마을의 주민을 연결해주는 일종의 전령조였다는 설이 있고, 아시아의 북방민족들은 기러기, 오리, 백조 등 물새들이 가을에 남쪽으로 떠났다가 봄에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매우 신성시했다고 하며, 시베리아의 오브강 동쪽에 네넷족은 기러기가 남쪽에서 돌아오는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기며, 기러기가 가을에 은하수를 따라 천상계로 날아갔다가 봄에 지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서시베리아의 카잔 타타르족도 봄에 남쪽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떼를 하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또한 시베리아의 퉁구스족은 부족 내에 새로운 샤만이 출현하면 선대의 죽은 샤만의 혼령인 아비새가 돌아온다고 여기며, 돌간족은 하늘을 향해 세워진 나무 위에 9층 하늘을 뜻하는 나무로 만든 아홉 마리의 기러기나 오리를 올려놓는데, 이 새들은 샤만이 천상계로 영적인 여행을 떠날 때 그를 인도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즉, 솟대위의 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솟대는 민간 신앙, 어떤 희망, 바램, 그리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거룩한 새, 그러니까 인간의 소원을 상징하는 새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러니까 십자가와 솟대가 보기에 잘 어울린다고 하는데 사실은 정 반대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늘을 향합니다. 긍극적으로 초월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하늘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땅을 향한 것입니다. 종교마다 상징이 있다면 교회의 십자가는 다르지요. 아래로 내려온, 위로 향하며 신적인 것을 향하는 신과 같이 되고싶어하는 모든 종교와 달리, 거꾸로 모든 신적인 것을 버리고 내려온 분의 상징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9시에 박경장님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어제 여주에서 드린 구제역 참회 예배에 고기교회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 참 행복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솟대만큼 영성이 자랐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솟대에 영성이 있나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요. 그러나 십자가가 보여주는 영성은 없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제 여주군 흥천면 상백리 97번지 남한강 지류의 모래밭에 십자가와 함께 같이 꽂아놓은 솟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리고 어쩜 그렇게 십자가와 잘 어우러지는지요. 그러나 아닌 건 또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아니‘ 아닌 것은 아니다’가 아니고 . . . 그러니까 옳고 그르고 가 아니라 이것은 이 것, 저것은 저것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교회 식구들 외에 ‘수원의 일하는여성회’가 왔구요, 또 얼핏 프란체스코 회라 들었는데, 그 회에 속한 ‘두두림’이라는 풍물패가 왔습니다. 한 5, 6 분이 오셨는데, 박경장님이 이 분들을 소개하면서 ‘서울이 모두 이 분들의 마당입니다’라는 말에 , 금방, 아! 노숙인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강남 향린의 ‘은하’씨가 성공회 노숙인 학교에 사물을 가르치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그 분들 이야기를 얼핏 하던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제 그 참회의 자리에 노숙인들도 함께한 것입니다. 저는 그분들과 함께하는 박경장님, 그리고 정동진님, 또 은하님의 그 노숙인들을 향한 마음이 너무 귀하고, 순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분들도 그렇게 따라 할 수 없는 소위 영성을 지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심없는 삶을 사는 분과 함께 친구로 산다는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솟대 만큼 영성이 자랐다’고 했는데, 아마도 지난 영성 강좌 마지막날 오셔서 대금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도 해서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을 쓴 것 같은데, 박경장님이 노숙인들에게 보여준 사랑이야말로 십자가 사랑 아니겠습니까?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것 말입니다. 교회가 십자가만 앞에 세우지, 삶으로는 여전히 종교와 자기 연민에 빠져 그저 위로만 향하고 있다면, 박경장님 과 같은 분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사랑이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분이 영성이 솟대 만큼 자랐다고 하는데, 거기에 시비 걸면 종교 재판, 종교 전쟁을 또 일으키는 것이지요. 이제 그런 싸움 고만 하면 좋을 것 같고. 그래서 그 분들의 고백을 존중해 주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구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이 세상에 십자가로 사랑을 보여주셨나 라는 자기 낮춤의 겸손함을 이야기 해 줄 필요가 또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십자가 영성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판단하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러한 다양함을 십자가 안에 품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 다양함이 서로 주고 받고 해야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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