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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앞에 서 있기(2011년 2월27, 주현절후여덟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2.27 14:56 | 조회 2358


십자가 앞에 서 있기

2011년 2월27(주현절후여덟번째주일) 마26:31-35

마26:69-75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첫 번째는 어느 한 하녀가 의회 안뜰 바깥 쪽에서 베드로에게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네요”라고 하자 여러 사람 앞에서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베드로가 대문으로 나가는 중에 다른 하녀가 베드로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라고 하자 베드로가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거기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는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당신이 누군 지 분명히 드러나오”라고 하자 그 때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모든 제자들 다 떠나고 인간적인 연민에 찬 베드로가 홀로 가야바 법정으로 모르는척 하면서 예수님 쫓아 들어갔다가 뒷덜미를 잡히는 장면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얼마 전에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했었습니다. 그 말의 책임도 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누구 보는 사람 없을까 하며, 모르는체 하며 들어갔다가 자신의 속 마음이 다 드러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두려움입니다’그것도 가야바의 집에서 잔 일 뒤치다꺼리 하는 어린 계집 아이에게 자기 마음이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베드로는 방금 전에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않겠습니다”라고 했던 제자입니다. 뿐만아니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여 주님께 칭찬을 들은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되던 날, 베드로가 줄 곳 보아왔던 많은 이적과 기사, 그리고 주의 말씀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그동안에 쌓아두었던 인간적인 것들을 모두 벗어놓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닭이 3번 울자 가야바의 뜰 밖으로 나아가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있은 이 후에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그리고 그 사건이 예루살렘 전체에 퍼지면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게 됩니다. 결국 사도들은 구속이 되고 다음날 예수님을 심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인 가야바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무슨 권한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느냐고 하자 베드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를 3번 부인하던 베드로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가야바 앞에 서 있는 베드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에대하여 십자가에대하여 이야기했을 때에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면서,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 전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이 후 가야바 앞에서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당당히 증언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중심의 베드로, 또한 지혜로운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찿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여 반석이란 칭찬도 들었지만 오히려 주의 뜻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베드로의 모든 것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삶을 한 번 멈추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휴게소가 나옵니다. 급한 볼 일도 보고, 배고픈 사람 요기도 하고, 장 시간 운전에 피로를 느끼고, 졸음이 오는 운전자들이 잠시 쉬었다가 가기도 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우리의 신앙의 여행길에서 반드시 한 번 멈추어 서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급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나야 합니다. 십자가 휴게소에서 주님 십자가를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는 마26:33에서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했지만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 있는 여자 아이의 질문 한 마디에 그 신념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앞에서 였습니다. 이러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 없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오락가락 하는 신앙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글쎄다 모임에서 이상권님께서 추천한 박진규 라는 작가의 ‘핑퐁’이라는 소설을 함께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니 다 읽을 때 까지 적극적으로 책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용 자체가 우리에게 익숙한 스토리테일링이 아니고, 문장 구조도 기승전결의 틀을 벋어나 있고 해서, 여전히 고전적인 생각의 틀에 젖어있는 저로서는 핑퐁이라는 소설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매우 몽환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저 헬리 혜성을 기다리는 현실도피적인 사람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 소설에대해 선입견을 가지게 되어 소설의 내용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설에는 치수라는 아이에게머리에 못이 박히도록 맞아서 ‘못’이라고 이름 붙여진 아이 와 머리가 큰 그래서 어느 외계인같은, 아프리카의 어느 토호족의 그래서 발음적으로 ‘모아이’ 라는 이름의 아이가 등장하는데, 이 아이들은 정말 지지리도 못나 자기 앞가림을 못해 반에서 늘 왕 따 당하는, 특히 치수라는 짱에게 죽도록 얻어맞는 아이들입니다. 박진규는 이 이 아들을 세상이 깜빡한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눈 깜빡하면 없어질 그런 하찮은 존재이며, 작가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생존이 아니라 피치못해 잔존하는 인간이라고 작품 후기에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 중간 중간에 또 다른 어느 중동의 전쟁 터에서 죽어가는 아이들, 내전에 시달리는 어느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 등이 순간 순간 스쳐 지나갑니다. 바로 ‘못’ 과 ‘아이와’ 같은 사람들인데, 그런데 저는 그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짧은 이야기들 속에 이 슬프고 아련한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소수자의 아픔을 미쳐 잡아내지 못한 거지요. 그러다 보니 그저 현실도피적인, 역사는 끊임없이 핑퐁과 같이 반복된다는 전혀 이야기의 핵심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작가는 마지막 그의 프롤로그에서 ‘퍼렙스 러브’라는 달콤한 음악이 한쪽에서는 들려오지만 한 쪽에서는 어디선가 힘 없는 민족이 맞아죽고, 힘없는 민족이 폭격을 당하는 세상은 여전히 약육강식의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인류를 대표하는 탁구 대회가 열리는데, 누가 대표로 나오는가 하면 말콤 X와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라인 홀트 메스너’가 대표로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탁구에서 집니다. 누가 상대방인가 하면 새와 쥐입니다. 이 새와 쥐는 음식물로 반사작용 훈련을 받아 탁구를 하는데, 강한 스메싱은 못해도 나시 날아오는 어떤 공도 다 막아냅니다. 그러니 나중에 말콤 X와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라인 헐트 메스너가 새와 쥐에게 집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대표로‘못’과 ‘아이와’가 새와 쥐와 시합을 벌이는데, 극적으로 이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기는가 하면
반사작용에 훈련된 새와 쥐에게 도저히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랠리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3세트 중에 2세트를 지고 마지막 세트도 이제 질 수 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새와 쥐가 과로로 지쳐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황당하게 승리합니다. 그리고 승리한 두 아이에게 인류를 살릴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선택권이 주어지는데, 마치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컴퓨터에 만들어 논 것들을 지우고 다시 그리듯이 그 두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지구 인류를 ‘언인스톨’합니다. 인류를 클릭하여 한 방에 날려버립니다. 그렇게 소설은 아주 대중적인 소재를 거지고 대중적으로, 아니 대중적이다 못해 모두가 무관심한 다수에대한, 그렇게 반복하며 흘러가는 세상을 가볍게 지워버립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단지 몽환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이야기이겠거니 하며, 그래도 마지막에 일상으로 돌아가니 희망이 있네 하며 석연치 않게 바라보던 저의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은 이상권님께서
“이 소설은 마이너리티에대한 이야기입니다.”라는 말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이상권님의 그 말에 정신이 버쩍 난 것입니다. 마이너리티에대한 아픔, 고통을 소설가 박진규는 어떻게 하든지 끌어내려고 핑퐁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기가막히게 끌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책의 이해되지 않던 대부분의 은유들이 선명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조양 집사님이 이렇게 부조리한, 선과 악이라고 할까 기득권자와 소수자의, 억압과 지배의, 아니면 무신론적인 소설적 상황에대해 어떻게 신앙적인 접근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저도 사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못했는데, 그런데 소설은 거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못’과 ‘모아이’의 일상이 희망적일지, 아니면 절망적일지는 우리의 삶에 던져진 것입니다.

와중에 박경장님이 헤밍웨이의 ‘해는 다시 떠오른다’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해가 다시 떠오르는데, 이것이 희망적인지, 아니면 다시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는지에대한 논쟁을 학교다닐 때 했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 때 느끼는 것이, 아! 여기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구나’싶었습니다. 우리는 그 반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본래 삶이라는 것이 반복인데요. 반복 아닌 것이 있나요. 숨을 쉬고, 밥을 먹고, 학교와 직장에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 오고. . .핑퐁이지요. 반복이라는 실존의 현실에, 참담한 인류 역사의 그 폭력적인 반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새 길 교회의 교회지 기자가 우리 교회를 인터뷰 하러 왔었습니다. 새길교회는 교단에 속해있지 않고, 목회자도 없는, 그리고 예배도 어느 구청 강당을 빌어서 드리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의 모습을 인터뷰하면서 그 분이 자기가 어떻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전혀 신앙에대해 모르고 있던 사람인데, 어는 목사님의 글을 읽고 예수가 너무 좋아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신앙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2000년 전에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젊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바로 예수가 좋아서 따르던 그 따름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그리고 두렵기도 한 아무도 바라 보기도, 메고 가기도 싫어하던 그래서 모두 돌아서 버린 그 십자가 였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모든 생각과 욕심과 이기심, 철학, 종교. . .등 모든 것을 내려 놓게한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겸손히,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 인상에 남습니다. ‘못’입니다. 왜 못인가 하면 치수에게 죽도록 못이 박히게 맞아 ‘못’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이 거듭되면서, 설교를 준비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오버랩 대드라구요. 아! 나무에 치욕적으로 가장 약한, 가장 죄 없는 분이 못처럼 못 박혀 죽으셨구나 하는 생각에 핑퐁이라는 소설의 탁월함이 확 닥아오더라구요. ‘못’은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온 인류 역사, 우주의 마이너리티의 이미지입니다. 그 ‘못’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오늘 구제역으로 살처분 당한 수많은 돼지와 소들, 사대강. . 남과 북의 평화. . .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번지는 서민들의 혁명의 부르짖음. . . 모두 ‘못’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속에 우리의 죄, 죄의 용서, 하나님의 능력, 아버지의 뜻, 섭리, 경륜, 지혜가 다 드러납니다. 그 아버지의 뜻에대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십자가 넘어의 부활 하나님 어린양. . .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말씀을 준비하며 작년 팔당금식기도회 때 묵상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2010년 4월21일 안홍택
최근 수요일 예배에 계시록을 읽고 있습니다. 계5장에 하늘교회의 비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곳에 어린양 한 마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냥 어린양이 아니라 6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것 같다’라고 합니다. 하늘 보좌에 함께 있는 어린양에대한 비젼인데, 그냥 어린양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입니다. 왜 하늘 영광, 존귀, 찬양, 권세의 자리에 ‘죽임을 당하는’것 같은 비젼이 보일까요?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 하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떼고 그리고 그 내용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어린양인데 성경은 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그 두루마리를 떼고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죽임당한 것이 어떠한가요? 이 지구상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이르기 까지, 그렇게 억울한 죽음, 이해할 수 없는 죽음,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 고통, 아픔. . . 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팔당 강가에서 이 강이 개발에 의해서, 오염에 의해서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죽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의 비젼을 바라봅니다. 이 강의 죽음 아픔, 고통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강의 죽음과 아픔 뿐이겠습니까? 구제역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가축들, 아메리카의 인디언들, 예수님 탄생 시에 죽은 영아들. . . 모두 ‘죽임당한 어린 양’의 비젼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제 인류는 우리는 이 십자가 앞에 멈추어 십자가의 지혜, 섭리, 경륜을 배워야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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