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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2011년 2월20, 주현절후일곱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2.20 13:30 | 조회 2162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

2011년 2월20(주현절후일곱번째주일) 롬8:27-30

몇 일 전에 우리나라 포크록의 효시인 한 대수님의 근황을 T.V를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알코홀 의존증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4살박이 딸을 혼자 돌보는 모습이, 이제 60을 넘어선 심장질환이 있는 한 대수씨에게는 무척 버거워 보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노모역시 심장발작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린 4살베기 딸 양호에게 “너(양호)랑 내가 이겨내야 한다”, “하루 하루가 전쟁이야”하며, “인생은 고해야 그래서 기쁘고 즐거워야해, 그렇지 못하면 허무한거지” 하며 웃음을 짓습니다. 자유, 평화, 저항을 노래하던 분인데, 그래도 그 어머님이 불편한 중에도 며느리 옥사나에게 빨리 퇴원하라며 전화로 용기를 북돋우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또 지금의 상황을 담당하게 받아들이는 한 대수씨의 의연한 모습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럽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개인적인 삶의 고통은 크던 작던 스스로 감당해야하지만, 문제는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더군다나 그 욕망이 조직화되어 고정화 되고, 그 규모가 우리 스스로 조율할 수 없을 정도로, 즉 세계화가 되어버리고, 그 여파가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구제역 가축 살처분 매몰과 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인간의 욕망의 결과가 전쟁을 넘어 전지구적인 기후, 바이러스, 식량 재앙으로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미 생태, 환경학자들이 경고하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롬8장이 피조물의 고통에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피조된 것들은 모두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이러한 한계를 동물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에요. 아니 받아들이고 그 한계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인지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지하는가 하면 자꾸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힘과 욕망으로 극복을 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자꾸 한계를 넘어서는데, 바로 창세기의 뱀 이야기, 그리고 창6의 네피림 이야기, 바벨탑, 그리고 가나안 땅의 거인족 처럼 말입니다. 오늘 날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그러니까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이 나와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히틀러가 나오고, 이명박 정권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인류는 자꾸 이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종교가 이 것이 잘 못되었다고 드러내고 그 쪽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여전히 힘과 큰 것을 지향하면서 종교로 위장하니 더 나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망했고, 러시아가 그렇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계의 유한함, 연약함, 부족함에 붙들리어 얽메이는 것이 아니라 이 한계를 서로 나누는 풍요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이 피조의 모습을 보며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6 번째 창조물인 인간에 대해서는 ‘심히 좋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누는데 어느 만큼이냐 하면 다른 피조물들을 보면 알지만 다 내어서 나눕니다.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단 말입니다. 아프지요 고통스럽지요.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아픔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함께하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이렇게 본래의 창조 질서에 부응하지 못한지 너무 오래입니다. 죄의 깊이가 깊어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질서의 체제 속에서는 이러한 삶은 아예 싹이 잘려집니다. 인류가 언제 그렇게 살아왔는가 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로지 1등입니다. 소비적이고, 막 개발입니다. 말이 개발이지 있는 것 다 소진해 버리는 이기적 탕진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의 한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데 이런 고통은 마땅한 고통이구요.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고통은 나눌 수 있어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감당할 수 있거든요. 소, 돼지, 닭 . . . 그리고 무수한 식물들 모두들 다 내어 놓지 않습니까? 그래서 위로하며 함께 손 잡고 갈 수 있는데, 근대사에 들어서서 태동한 자본이라는 괴물에 의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정말 지옥인 것입니다. 고통이 고통이어야 하는데, 고통이 지옥입니다. 제국적입니다. 고대의 전통 속에 깊이 숨겨져있는 힘과 크기를 앞세운 욕망으로부터 오는 제국적인 고통은 지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고통은 어떤 고통인가요? 롬8:22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고통은 고통인데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에 포도나무 사랑, 포도나무 기쁨에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기쁨에대해 15장에서 미쳐 못다한 말씀을 16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기쁨이라 했나요? 살림살이 나아지는 즐거움은 없지만 그러한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하면서 해산의 고통은 잠깐이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기쁨에 그 근심과 고통을 이겨낸다고 했습니다. 롬8:22에서도 역시 해산의 고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에서는 첫 열매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한다고 합니다.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또 18에서도 보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21에서는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전체적인 흐름이 마치 물처럼 어디로 흘러가는가 하면 24, 25절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소망이라고 합니다. 고통 속에 소망하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이 3 가지 이지요 첫째는 우리의 한계로부터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둘째는 그러나 아주 나쁜 고통, 제국적 고통이 있습니다. 지옥같은 욕망의 고통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 해 주는 세 번째 고통은 소망의 고통입니다. 해산의 고통으로부터 오는 기쁨의 고통인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이 고통, 이 기쁨을 맛 보며 살고, 알리고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웰빙이니, 행복이니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소망의 고통 속에서 25절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기다릴까요? 19절 말씀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누구일까요?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가 누구일까요?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
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바로 피조물이 간절히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특히 심히 좋은 인간에 이르러서는 절망적입니다. 인간이 좋지 않아 세계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왜 이지경 까지 이르렀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20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결과로 썩어짐, 종살이, 신음합니다.

어느 T.V 연속극에서 ‘희망’이라는 드라마를 본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 때 어느 점쟁이에게 점을 치러 갔는데, 강아지를 키워보라고 하면서 강아지 값을 네라고 한 기억이 납니다. 거짓 희망입니다. 허무한 희망이지요. 허무에 굴복하는 모습인데, 부족하고, 연약하며, 유한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해합니다. 그래서 진정 피조물이 고대하며 기다리는 희망은 강아지 한 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뜻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29에 보면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우리의 한계, 즉 유한하고, 부족하며,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 나누는 것에서 오는 풍요를 구해야 하는데, 그 한계를 두려워 하여 욕망으로 우리 삶을 가득체우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들이 다른 생명을 받고, 자기를 내어놓는 삶을 살고 있는데, 물질이라는 괴물에 홀려 나만 살려는 좀비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좀비가 달리 좀비가 아닙니다. 폭력으로 다른 생명체를 죽이고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살았지만 죽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욕망을 체우며 이기적으로 산다면 그것은 사는게 아니지요 죽음의 삶, 즉 좀비같은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폭력을 휘두르며 사는 좀비처럼 살지 말고 이렇게 살라고 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하나님이 보기 좋다고 한 모습처럼 자기 생명 내어 주고 받는 삶 말입니다. 그런 삶을 인류가 잃어버렸는데 주님께서 그 본래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8절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 모습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라는 것이지요. 한계와 부족과 연약을 나눔의 풍요로움으로 바꾸는 첫 번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 쫓아가는 것을 온 세상의 피조물이 모두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황금률이라는 말씀 들어보셨나요? 무슨 말이지요? 눅6:31의 말씀이지요.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입니다. 세상률은 어떤가요? GIVE & TAKE입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GIVE & TAKE가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더’가진자와 ‘덜’가진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GIVE & TAKE은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너가 이만큼이니까 나는 이만큼 합니다. 이것이 결국 편을 가르게 합니다. 그러나 나눔은 은혜입니다. 내가 받았으니 받은 것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맏아들이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7번씩 70번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악의 뿌리가 깊고, 죄의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13:1에서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를 우리가 함께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필란드 헬싱키의 조그마한 카메모 식당에서 일본인 여주인 ‘사치에’가 찿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삶의 정겨움, 넘치지 않지만 풍요로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인생이 어차피 나그네길인데 이렇게 카모메 식당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삶을 정겹게 나눕니다. 식당 테이블도 별로 많지 않지만 고만큼의 나눔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가 후에 또 ‘안경’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역시 음식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팥빙수를 값도 받지않고 나누어주는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그대신 다른 것으로 팥빙수 값을 받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영화 배경은 어느 바다가인데 T.V도 없고, 핸드폰도 안터지고 그저 시간도 없는 것 같은 해가 뜨면 일어나고, 듣도 보지도 못하는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며, 해가 지면 잠자리에들고, 똑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서로 서로에게 서로인 모습으로 무미건조해 보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한 번은 안경의 여행객이 하도 무미 건조해 여관을 옮겨보려 하다가 다른 여관의 꽉찬 프로그램에 기겁을 하고 다시 그 무미건조해 보이는 여관으로 다시 돌아와 그 평온한 여가를 즐깁니다.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그렇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있는듯, 없는듯, 없는듯 있는듯, 있는 것 나누고, 없으면 말고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모습이 아닌가 십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을 온갖 피조물이 기다린다고 했는데,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습을 지향하는 과정을 31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정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
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정하셨다는 것은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살아갑니다. 유한함와 부족과 연약함을 느끼며 삽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두려움,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괞찬다는 것입니다. 죄 있는 모습 그대로, 허물있는 모습 그대로 미움과 욕심과 싸움에 익숙해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 인간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니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그 말씀 그대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얼마나 신 바람이 납니까? 우리의 한게만 인지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 요17 말씀을 보는데,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내용이거든요, 거기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요17:17에 보면 진리로 거룩하게 하여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거룩하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거룩하지 않아 세상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11:50,51에 보면 나사로가 살아나 예루살렘이 뒤숭숭해 졋을 때, 공회가 열렸는데, 그 때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런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룩입니다. 거룩은 죽음입니다. 요10:11에서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합니다. 포도 나무 비유를 통해서도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양들을 위해, 친구를 위해, 백성을 위해 라고 합니다. 거룩은 ‘~~을 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온 천지 만물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피조물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께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내어놓는 거룩한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에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는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거듭 하나님과 나와 우리, 즉 교회가 하나이며 아버지가 누리는 것을 우리 모두 함께 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렇게 고난도 영광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으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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