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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있습니까? (2010년12월25 ,성탄절)

하늘기차 | 2010.12.25 14:59 | 조회 2418


빈 방있습니까?

2010년12월25 (성탄절) 눅2:1-7

어제 중고등부가 공연한 ‘빈방있습니까?’ 공연을 잘 보았습니다. 학원이다. 자율학습이다 하여 공부에 꽁꽁 묵여 있는 아이들이 그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연습을 해서 올린 공연인데 참 잘했고, 우리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해서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 번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연극을 보면서 주인공 덕구가 무대와 현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것은 내 모습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가치와 거짓 가치,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 마땅한 것과 마땅하지 않은 것, 참 신앙과 거짓 신앙 등 말입니다. 마치 그것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미녀와 야수’, ‘피노키오’, ‘인어공주’등 자기 정체성으로 괴로워 하며 자기의 참 모습을 찿아가는 공연 작품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 주님이 내 마음 방에 계시다면 오늘 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속에서 참 길을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거절당하셨습니다. 7절 말씀에 보니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 방이 없을까요? 방들이 다 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어갈 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마음 방은 어떤가요? 마음의 방도 한 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을까요? 마음의 방이 무언가로 가득 체워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대체 무엇으로 가득하길래 예수님 모실 만한 한칸 마음 방하나 준비해 두지 못 했을까요?

수스케라는 유선 T.V프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존 박이냐, 허각이냐 하며 흥미를 더 해갔고, 결국 허각이 대상의 영예를 차지하였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탈락을 했는데, 여러 가지 탈락의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참여자들과 비교해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탈락한 경우도 볼 수가 있었는데, 심사위원들에게 그 이유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잘 하는데 특유의 쪼가 있어 노래의 맛을 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전자에게 심사위원들은 안타깝지만 지금의 노래 습관을 고치면 참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치지 못하면 지금은 노래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을지는 몰라도 얼마 못가 한계에 부딪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버리지 못하면 새로운 것을 습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스케 중에 다소 실력은 좀 떨어져도, 어떤 쪼나, 취향에 노출되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의 소유자들,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새롭게 하려면 나의 옛 습관이나, 생각 등을 내 마음의 방에서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찿아 와 좌정하실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들로 방이 가득 체워져 있다면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에게 “주님 이렇게 방을 깨끗이 치웠으니 어서 오세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관 주인이 방이 없다고 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방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누구인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앞에 있는 분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애 타게 기다리던 메시야인 것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방이라도 마련했을 것입니다. 정 손님들로 방들이 가득 찾다 손치더라도, 아마 자기 방이라도 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에수님은 공생애 내내 당신의 정체성에대한 질문을 늘 받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랄지, 5병2어의 기적 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일, 바알세불의 추종자라고도 이야기 하고, 오죽하면 세례 요한도 에수님에대해 잘 이해가 되지 못하여 눅7:19에 보면 제자들을 보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묻게 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혈루증 앓는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시므온과 안나는아기 에수를 보는 순간에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사모하며, 간절한 사람들, 그리고 온유하며 겸손한 사람들에게, 순결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밝고 환하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지난 수요일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기록은 전통적인 다윗 왕권을 회복할 메시야를 환영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기술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좀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나사로의 부활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예수님은 부활한 나사로의 집에 묵고 부활의 기쁜 잔치를 열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소리치며 옷을 벗거나, 나무 가지를 꺽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 위에 깔아드립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는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입소문이 예루살렘에도 퍼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신다는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왕권 회복의 분위기를 가지고 입성을 하지만, 요12:13에 서는 나사로의 부활의 기적을 알게된 사람들이 성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오고, 밖에서는 예수님을 모시고 성으로 올라가는, 그래서 성 안과 밖이 한덩어리가 되어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모양 세인데, 또 요한 복음에서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환영했다고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환영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그리스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저항하여 그리이스를 몰아냈던 유다 마카베오가 개선하여 돌아올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 개선을 환영하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그럼으로 다른 복음에는 없는 종려나무가지 흔드는 모습은 정복과 승리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2:19에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한 마디로 말해서 모두가 예수를 따르니 이제 자기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넉두리를 하는 모습을 봅니다. 성 안과 밖이 모두 들고 일어나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정복과 승리에 취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 나귀 한 마리, 또는 새끼 나귀 한 마리를 구해서 그 나귀를 타고 올라가는데, 요한 복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과 밖으로 예수님을 승리자로 정복자로 환영을 하는데, 12:14에 보면 그 때에, 한 정점에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 타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원래 유럽이나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나귀는 비천한 동물로 여기는데 이스라엘에서 나귀는 고귀한 품격있는 동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구약의 사사들, 또는 왕족들이, 특히 사울 왕의 손자 무비보셋이 나귀를 타고 임금님과 함께 떠나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에 반역했던 다윗의 큰 아들 압살롬의 오른 팔이었던 아히도벨이 나귀를 타고 집에 돌아 왔다는 이야기도 봅니다. 그러니끼 나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고급스러운 짐승이며, 왕이 전쟁을 하러 나가거나 개선을 하고 돌아 올 때는 말을 타지만 일상의 평화로운 행보에는 고귀한 나귀를 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성 안과 밖으로 승리와 정복을 환영하는 과도한 흥분에 예수님이 밀려가는 꼴입니다. 이 분위기, 이 흐름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발견하시고서는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뒤뚱 거리며 해학적인 모습으로 올라가십니다. 이 나귀를 타는 행위는 지금 이렇게 정복과 승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퍼포먼스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히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기적과 맞물리어 그저 승리와 정복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미쳐 보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너무나 쉽게 알아 채릴 수 있는 예수님의 나귀타심이 평화의 발걸음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사람들과 제자들의 몰이해 속에 늘 계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학문과 가치에 정통하고, 인생의 경륜, 경제, 정치, 문화와 예술에 깊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나의 주인이, 이 세상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 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우리는 아마도 이 세상을 헛 살고 있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 방을 내 줄 수 없는 이유는 찿아온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방을 내어드릴 수 있으려면 낮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왕은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잠깐 별 빛을 놓치자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 평화의왕은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머리 둘 곳 없어 강보에 싸여 말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예수 탄생의 사건은 빌2:6-8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
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
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
습니다. ”처럼 낮아진 사건입니다. 낮은 것을 보시고, 낮은 곳에 관심을 가지시고,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한 남자가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길 가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몇 분 안 되어 여기 저기서 쓰러진 자기에게 찿아와 말을 걸고, 부축을 하고 무엇을 도와드릴 지에대해 묻기도 하고 도와주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연락도 하고 경찰에게 전화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번에는 남루한 옷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 모양새로 길에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처음의 말끔한 차림 때 와는 달리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자 뚱뚱한 흑인 여자가 자기에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다가와서는 자기에게 괜찮으냐고 묻고, 어디에 사느냐, 왜 쓰러졌느냐고 자상히 물어보고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함께 일으켜 세우려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여자는 핸드폰도 없는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핸드폰으로 경찰서에 연락을 해달라고 요청도 했다고 합니다. 실험을 하던 사람은 정말 속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찿아오지 않았는데, 남루한 흑인 여인이 자기를 극진히 돌보아주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이야기로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에게는 본인의 잘 못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이유에 의해서 저 사람이 지금 어려움에 처했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에게는 저렇게 못사니까 저렇게 쓰러진 것도 저 사람이 잘 못 했기 때문이라는 자기 변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와주지 않아도 아무런 도덕적인 자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어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아픔, 고통, 죽음을 이해 하시고, 그 모든 인간의 어두움을 이겨내시고 위로해 주시고, 회복시키실 분은 바로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이 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를 맞이 할 빈 방 하난 여러분 마음 속에 마련 할 수 이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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