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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았느냐?(2011년9월 4일, 성령강림절후열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9.04 16:11 | 조회 2305


성령을 받았느냐?

2011년9월 4일(성령강림절후열두번째주일) 겔11:9-10;행19:1-7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 들르게 되는데, 그 때 몇 몇 제자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18:24에 보면 아볼로가 이미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 밖에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학문이 깊고, 성경도 많이 알고 있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었을 때, 성령이 있는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안수하였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멸시하고, 천대하던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알려지자 사도들은 놀람을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설왕설래합니다. 정말 그럴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복음이 전파되었나? 많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사실에 놀람을 금치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행18:16 그대로 이야기 하자면 아직 한 사람도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교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성령을 받았느냐?’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질문이 나의 마음을 칩니다. 2절 말씀 그대로 하자면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9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신이 누구인가에대해 물었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는 제자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않은 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칭찬할 정도의 멋진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와 제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에대해 이야기 할 때에 예수님을 몰아치고, 자신들의 욕구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 된 밥에 제 뿌리지 말라는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솥 밥을 먹으며 함께 자며 그렇게 가까이에서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제자들의 몰이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을 막던 일, 5병2어의 기적을 베풀 때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안이한 태도, 풍랑 속에서 두려워 떨던 모습, 변화산 아래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앞에 놓고 쩔쩔매던 모습,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이해 못했으며,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견한 마리아의 행위를 비웃던 유다, 예루살렘 직전에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던 모습, 예루살렘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모습,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메달리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임재 이전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던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따른 것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사탄도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사람들 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고백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고는 그것은 믿음의 고백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데, 정말 성령을 받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 받기 전의 예수님 제자들 처럼 성령 없이 자기가 좋아 따르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경우 성령을 받으면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찌릿 찌릿 전기가 오는 듯하고, 특히 방언은 보다 확실한 성령의 체험입니다. 사실 저 같은 경우는 기도 중에 또는 설교하는 중에 감동이 오면 실제로 전기가 와서 찌릿찌릿하는 경우 간 혹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 열정적으로 기도하던 중에 그런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것은 성령님을 무슨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 통제 안에 들어올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그 능력을 구하면 그대로 이루어주는 분으로, 그러니까 자기가 요청하면 언제나 응답해 주시는 것으로 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유하신 분입니다. 바람과 같으신 분입니다.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서 언제나 느끼는 것은 그 성령에 감화받은 모습이 인격적으로 온전한 분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부친도 성공회 신부님으로서 탁월한 신앙의 저술가셨는데, 그 분이 쓰신 책 중에 오늘 설교 제목과 같이‘너희가 LE을 때에 성령을 받아쓴가?’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그 책에서 성령이 바람과 같다는 비유를 아주 잘 해 주서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바람 부는 것이 멈추어진다면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토레이 신부님이 사시던 당시 미국에서 조사된 건강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건강한 도시가 오대호 부근에 위치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 도시들에대한 홍보, 보고에 근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대호에 근접한 도시들을 찿아왔는데, 실제로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된 것을 알 수 있었고 위생적으로도 전형적인 지저분한 미국의 여타 도시들과 다른 것에 모두 놀라워 했다고 합니다. 상쾌하고 깨끗한 위생적인 도시의 비밀에대해 궁굼해 하는 사람들에게 밝혀진 연구 결과는 호수에 불어오는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바람이 호수 근처에 도시 사람들에게 생명과 건강을 가져다 주엇다고 합니다. 토레이 신부님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이나 어떤 교회나 또는 어떤 사회, 국가 민족에게 불어오시는 것을 멈춘다면 죽음 밖에 남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이 각 개인이나 교회 등에 불어 온다면 그 곳은 생명력 넘처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의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성령의 인간적인 성품입니다. 그 분은 고전2:10을 인용하면서 마음에 진실을 이해시켜주시는 영향력이 있는 권세이며 스스로 진실을 알고 계시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 롬8:27에서는 성령의 생각이라 합니다. 롬15:30에는 성령님의 사랑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또 가까이 찿아와 주시는 분으로(요14:16). 느헤미야는 가르치시는 분으로, 특히 엡4:30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며 성령님께서 근심하신다고 합니다. 행동과 말에 있어서 신실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거나 친절하지 못하고, 자기 위주이거나 비열하거나 인색하거나 진실치 못한 어떤 것이 있으면 이 거룩한 분께서는 그것으로 인해 심히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젊은 때에 세상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그 유혹에 굴복당하고 말았을 때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슬픈 표정을 지을 것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지 자신을 그러한 유혹에서 지켜낼 수 있는가 라는 생각에 괴로워 하는 쳥소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보다 더 민감하며 헌신적이며 더 사랑하시는 분이 계신데 바로 성령님이 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크리스챤이라 한다면 이 분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심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 언행으로 인하여 성령께서 탄식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오늘 말씀처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을까요?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기계적 도식이 생겨버립니다. 성령을 정형화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에대한 자기 인식을 할 수 있을까요? 역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잘 살표 보아야합니다. 행2:37,38에 보면 여기서 베드로는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나서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베드로가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
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29절은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
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혹자는 성령세례에대해 이야기 할 때에 치유집회에서 인도자가 병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안수하고 그래서 치료받고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은사집회라고 하여 각자에게 달란트를 따라 은사를 받도록 기도하기도 합니다. 저는 은사집회 치유집회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한 집회와 모임에 항상 진정성의 문제가 있어 안타까워 합니다. 그런데 서울에 부목사로 있을 때에 당시 성결교회의 총회장을 하시기도 하였던 이만신 목사님의 부흥집회 때에 꼭 시작하기 전 환자들에게 앞은 곳에 손을 언고 함께 기도하며 나았다고 선언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늘 느꼈던 것은 진정성이었습니다. 최근에도 그러한 신유의 집회가 열리기도 하는데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최초의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다고 하면서 불로 불로 하며 그 성령을 임하게 해 달라고 집회에서 정말로 뜨겁게 기도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성령의 임재는 일회적이었습니다. 이제 그 오순절의 성령의 임재를 통해 엘2:28-29의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오신 성령께서 온 세상 속에 29절 말씀처럼 먼 곳에 까지 역사하시며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식의 성령의 임재는 NO LONGER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말씀드렸지만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전적으로 영적 세례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령을 받은 신앙인지 아닌지는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고 죄 용서를 고백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합니다. 사회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남에게 그리 크게 피해주며 살지도 않았고 그래서 별로 죄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뭐? ’합니다. 또 교회에 다니면서 봉사도 하고, 성경 공부도 하고 친교하며 교회생활을 잘 합니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럭저럭 삶을 꾸려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열심히 사는데 늘 가정이 편안치 않습니다. 직장에서는 늘 짜증만 납니다. 문제가 늘 이 쪽 저 쪽에서 생깁니다.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인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이 지치고 힘이 듭니다. 의욕이 없어집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찿으면서 핑개거리를 됩니다. 아이들 때문에, 아내와 남편을 탓하고, 부모를 잘 못 만났다고 하기도 하고, 삶에 이유가 많습니다. 교우여러분 성령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힘들어집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저희 교회에 선교사님께서 저녁 예배에 설교하러 오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설교 마지막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며 결단을 촉구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도 모르게 왜 그랬는지도 어떤 내용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겠다는 그런 서약을 하고 안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특별한 느낌, 소위 뒤집어지는 그런 일은 없었던 갓 같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 씩 앞으로 나아가 그 선교사님의 기도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필요로하시는 일을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 역사하실 때에 하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다면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뒤에 교회의 터를 잡으신 김정심 전도사님의 묘가 있습니다. 그 묘비에 무슨 성구가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요일5:4 말씀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
구겠습니까? ” 한글 개역 성경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출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회개의 열매가 맺혀지고, 더 나아가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지면서 내 안에서부터 조금씩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삶이 풍요러워지기 시작합니다. 평화, 사랑, 관용, 기쁨, 나눔, , , 을 맛 보며 살기 시작합니다.

성도의 가정에 영적 열매가 없어 집 안이 늘 굶주려 있습니다. 육적으로도 배가 고프면 먹기위해 싸우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며, 폭력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양식이 없어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면 성도들이 무력해집니다. 사랑의 수고,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가 없습니다. 세상 일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의 일이 없다면 성도일 수 없습니다. 가정, 교회,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겔11:19-20을 보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그래서 그
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
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성령의 열매가 잘 맺힐려면 성령으로 마음이 거듭나 말씀을 잘 지켜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시1:2,3을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
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행사가 형통하리라”고 합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진정 하나님 말씀 읽기가 즐거워졌습니다. 그 읽은 말씀을 따라 성령의 감동으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포도나무 처럼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나누는 고기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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