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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선적으로 영적 존재(2011년8월21일, 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8.21 13:57 | 조회 2566


인간은 우선적으로 영적 존재

2011년8월21일(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창1:27;고후3:17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고후 3:17은
“주님은 영시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요4:24도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
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십니다. 어디에 구애를 받으시지 않는 자유로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할 때, 그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철학, 미술, 문학, 음악 등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에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인간탐구는 표피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몇 일전에 한국 째즈 1세대 분들에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홍대앞 뒷골목에 ‘문글로우’(Moonglow)라는 째즈 카페가 있나봐요. 그 곳에서 원로 째즈뮤지션들이 활동을 하는데, 그 중에 클라리넷을 부는 이동기라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 직업이 돈이 모이는 직업이 아니야’ 하면서 자신의 째즈 인생을 돌아보면서 ‘언제 사람이 되나?’ 하고 물어보면 ‘내가 나팔쟁이인데 음악을 잘 하면 그럼 되는거지’ 라고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아직 멀었어 하시드라구요. 그런데 이 분 별명이 피노키오라고 합니다. 왜그러냐하면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이야기가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고싶어 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안되잖아 하면서 피노키오의 주제가인 ‘When you wish upon a star’를 클라리넷으로 부는데 정말 장난 아니드라구요. OST보다 듣기가 편안하고 좋더라구요. 그러나 언제 사람되나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 속에 회한, 허전함, 페이소스가 깊이 깔린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뮤지션이었지만 ‘언제 사람이 되지?’하는데, 다시말해 언제 인간다워질까 하는 말인데, 영적 회복 없이는 그 페이소스, 허전함, 회한을 체울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서는 사람을 영과 육으로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혹 영과 육과 혼으로 되었다고도 하는데, 혼은 본질적으로 육에 속한 것이지요. 영어로 말하면 영은 Spirit이고요, 육은 Body, 그리고 혼이 바로 Soul인데, 이 혼이라는 것이 바로 인간의 철학, 사상, 의지, 이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과 육은 통털어 육이라하여 영과 육이라 하는데, 이 인간의 혼이 인간을 한 없이 추락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적기 시대에 ‘메카케로스’라는 사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슴이 뿔이 엄청 크고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집 보다 큰 뿔이 결국 그 사슴의 멸종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맹수가 추격하면 도망을 가야하는데, 뿔의 무게 때문에 잘 뛰지 못하고, 또 숲으로 도망갈라치면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결국 잡힐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성, 혼은 바로 메카케로스의 뿔이 아닌가 십습니다. 과학과 철학, 예술, 과학, 물질 문명을 키우지만, 또 정치, 사회, 경제제도의 진보 발전은 역사를 통해 진보해 왔지만 결국 그 인류의 인간적인 업적들이 인간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되지 않나 십습니다. 인간의 이런 혼의 추구, 열망을 통해 인류가 진보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접근, 회복이 되지 않고는 인간은 영원히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점점 더 인간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식물의 상층부를 아무리 보기좋게 해도, 하부구조인 땅 속의 뿌리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리고 흙이 건강하지 못하면 식물이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성을 잃어버린다고 했는데, 그 인간성이란,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영적인 회복이 없이는 인간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선과 악의 협곡에 갇히어 고사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선과 악이라 하면 가치기준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윤리 판단, 수 많은 가치판단들에 머물러 그 속에 허덕이며 인생을 끝낼 수 밖에 없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과일을 먹은 이래 인류는 그 가치 판단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음악, 미술 등 예술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고 하지만 그 역시 가치 판단의 경계에 머물며 서성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자유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이 경계를 넘어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온전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감기에 걸리면 아스피린을 먹고, 심장이 나쁘다 든가, 폐결핵에 걸렸다든가, 몸에 이상이 있으면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고 수술을 하며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영이 병들어 있으면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영이 병들었다는 것은 어디가 아프다는 것인가요?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영이라는 것이 어디쯤 있을까요? 혼과 육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까요? 영의 어원은 히브리어로는 ‘르아흐’라 하여 호흡, 바람, 그리이스어로는 ‘프뉴마’라고 합니다. 생명의 본질, 근원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바람은 볼 수 없어도 그 현상은 볼 수있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립니다. 마찬가지로 영은 볼수 없어도 영적 현상, 영적 열매는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이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다시말해 영이 아프다 할 때, 어디가 아픈 것일까요? 마음이 아프다하면서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는데 만일 영이 아프다고 한다면 어떤 몸짓을 할까요? ‘영적이다’ 할 때, ‘영적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나에게 어느 한 공간, 지역, 몸의 어느 곳에 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신다는 것에대한 믿음이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나와함께 할 때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아프다, 병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다윗에대해 이야기할 때 다윗에게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하니까 사울의 손만 보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 길은 보이지가 않는 것이지요.왜 그렇다고 하였나요? 삼상27:1에 보면 ‘혼자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 혼에 머문 것입니다. 한 순간 하나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예수님은 요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영적 건강함에대해 말씀하십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15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인가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말입니다. 모두 몇 번이나 나오는가 하면 11번이나 나옵니다.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으면 무어라고 하나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열매에는 무엇이 따르지요, 15:11에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입니다.

집사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자 온 성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다윗은 시16:8, 9에서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
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찬다고 합니다. 3절에서도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라고 기쁨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다윗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주님이 요15:11에서 말씀하셨듯이 ‘기쁨’입니다. 우리 교회의 아이들, 성원이, 은수, 하여간 아이들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인가요? 먹을 것, 장난감, 아닙니다. 금방 실증을 냅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엄마가 엄마 노릇 못하고, 아빠가 아빠노릇 못 할 때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돈이나, 먹을 것, 아니면 장난감, 스마트폰, 아이 팻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인류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니 다른 것으로 그 허전함을 체우려하지만 체워질 수가 없습니다.

인류는 지금 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적 상실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것을 통해서도 참 내적 기쁨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표피적인 즐거움에 휘청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선악간에 둘러쌓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형국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건강한 영을 소유한 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다윗은 시42:1에서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인다고 합니다. 건강한 영은, 온전한 영은 하나님을 찿습니다. 그것도 사슴이 한 여름 목 말라서 시냇물 찿듯이 하나님을 찿습니다. 이상하지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습니까? 건강하면 스스로 누구에게 구하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스스로 존재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에서 인간의 맹점이 있습니다. 시103:13,14는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
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
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하나님께서 영을 불어넣으셔서 생명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체질이 그렇습니다. 연약하며, 부족하며, 힘있는 것 같지만 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야합니다. 다시말하면 나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마지막 때 까지 함께해야 합니다. 마28:20 마지막 절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의 삶과 영적으로 죽은 삶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선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갈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애절함을 스스로 인지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도 잘 모릅니다. 별 차이 없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묻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갑니다. 거기에 종교적 만족을 더하면 더할 나위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입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할 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냐고 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생을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친 유대의 지도자였지만 예수님이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에대해 모릅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리 새끼가 염소를 찿지 않는 것은 염소가 오리 새끼를 낳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염소를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들어가기는 커녕 볼 수도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와 헤어지고, 암(癌) 선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된 둘 째 아이는 특수자폐 판정을 받고, 그 충격에 본인은 실명(失明) 위기가 닥쳤는데,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은 스물다섯 꽃 같은 나이에 돌연사합니다. 혹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쓴 전 문화부장관이었던 한국 최고의 지성 이어령 씨의 딸 이민아님의 이야기입니다. 무신론자로서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던 그가 딸 때문에 그야말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돌아 선 것입니다. 이어령님은 그의 책에서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서원대로 지난 2007년에 세례를 받았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어령님은 그의 책에서“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과 시력을 잃어가던 너의 어둠이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바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 나라의 관점과 가치와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어령님은 어느 날 딸이 시력을 잃어간다는 말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이민아님은 아버지는 자상한 분이셨지만 학문과 글쓰기에 늘 바뻐서 자기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아버지 이어령 씨의 속 마음은 너무 간절하여“못 볼 바다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푸른가”고 애를 끓였다고 합니다. 후에 이어령씨의 이야기가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너의 어둠이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 아픔, 그 어두움의 때에 이민아님은 정말 고통스러운 슬픔의 어두운 세월을 지냈는데, 특히 장래가 촉망되던 25살의 버클리 법대에 입학을 앞둔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을 때, 하나님은 그 때 이민아님과도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민아님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 아이를 데려가셨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감기 걸린 것 같다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1년 동안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그 아들이 언제 죽었는가 하면 2007년 이어령님이 세례받은지 3주 만에, 스물다섯 살 된 큰아들 유린이 이유 없이 혼수상태에 빠져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을 하나님 나라에 보내고,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유진이 또래의 비행 청소년들, 마약, 알콜, 폭력으로 찌든 아이들이 우글거리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떠밀리 듯 그 아이들을 만났고,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아이들을 유진이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검사, 변호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 상담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가르는 벽이 내 마음에 있었는데, 유진이가 죽은 뒤 그 벽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진이를 데려가시고 새로운 자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애가 죽고 크리스마스까지 3개월은 24시간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고 계속 울었다고 합니다. 그때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만나 주시기 시작하셨어요. 제가 그 불 속에서 예수님을 봤어요. 다니엘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지만, 불 속에서 예수님이 들어오시지 않으면 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오셔서 천국이 어떤 곳인지, 영생이 얼마나 실제적인 것인지 잘 몰랐는데, 아들 유진이가 사실 16살 때 세례를 받았는데, 육신의 유진이는 구원받는 순간 그때 이미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세례받을 때도, 유진이가 세례받을 때도 의미를 몰랐는데 우리 아들이 가고 그 불 속에서 만나 주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을 때, 그 땅끝에서 소리를 질렀을 때, ‘유진이가 죽은 게 아니구나. 우리 아들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육신을 벗고 아버지 집으로 갔구나’ 하고 계시적으로 깨달은 건 아이가 죽은지 1년 후, 사역을 하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때 주님이 이민아님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 후 2009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 청소년 사역과 간증집회를 다니는데, 최근 낸 책이 꽤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책 이름이 ‘땅끝의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왜 ‘땅끝에 아니들’이냐 하면
“술, 마약,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잃은 아이들,
그 아이들을 살려낼 방법을 몰라 절망에 빠진 부모들의 이야기이며,
내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혼, 갑상선암, 아이의 자폐, 맏이의 죽음을 겪으면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자신도 역시 땅 끝의 아이였다고 하면서. 나를 포함한 그들이 참사랑,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정치, 그리고 외교, 남북 관계가 국민들을 많이 어렵게 합니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 불어닥치는 금융의 위기, 그리고 후쿠오카 원전 사고는 인류의 과학 물질 문명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교회의 신뢰의 추락은 매우 심각합니다. 이런 때에 이어령님의 가족을 하나님께서 육에서 영으로 인도하신 특별한 은혜는 오늘 이 시대에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아합왕 시대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낸 엘리야의 신앙 처럼, 오늘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제 교우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의 경계에서 더 이상 머뭇 거리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갈구하는 건강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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