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4(2011년7월31일, 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8.02 14:08 | 조회 2058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4

2011년7월31일(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왕상18:36-38;요15:7-11

여름성경 학교, 그리고 청소년부 수련회를 잘 마쳤습니다. 여름 행사를 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번 여름 성경학교는 스텝이 좀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늘 봉사를 할 때 마다 부족하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송구스럽다는 생각도 하는데, 엄밀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인데, 우리가 부족하고 넉넉지 못하고 적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의 생각, 가치, 즉 눈에 보이는 것에 좌지우지하는 삶의 기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십습니다. 물론 부족하면 힘이 듭니다. 사람이 적소적소에 잘 배치되어 아주 부드럽게 조직이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어떤 때는 좀 삐그덕 거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나 십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밀가루 한 줌, 기름 한 방울’로 인정해 주지 않으실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하게 필요한 만큼 하나님께서 여러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 일 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피스보트에 다녀온 선생님들, 청소년들이 피곤해 할까 봐 염려가 되었는데, 그래서 조심스럽게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중 둘 째 날 저녁 프로그램 중에 조별 발표회가 있는데 어떤 식으로 진행을 할 까 하던 중에 풍선 ART를 하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름 프로그램집에 있지만 처음에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준비 중에 불연듯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박영라 선생님에게 풍선 ART를 조별 미션으로 주면 어떻냐고 하였더니, 그 것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풍선은 있느냐고 하길래, 이제 사러가야 한다고 하니 박영라 선생님이 염려스럽게 저를 바라보더라구요.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고, 아! 좋은생각이 있다고 하면서 친구 중에 풍성ART하던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고 전화를 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들려오는 답은, 직접 오시겠다는 것, 그리고 쓰고 남은 풍선이 무진장하다는 것, 그리고 풍선을 부는 전기자동 풍선 부는 기계가 2대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날 저녁, 우리 모두는 풍선을 여한없이 불고 터뜨리고 붙이고 하며 놀았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풍선을 여한 없이 불고 터뜨리며 만들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래즉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가 싶었습니다. 정말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그리고 늘 하는 행사이지만 개울로 나가 고기잡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개울물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얼굴 표정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환한 모습. 세상 근심 모두 내려 놓은 모습. 아이들도 요즈음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많은 프로그램을 해 보지만 항상 고기잡으러 개울에 들어올 때의 아이들의 그 밝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러니까 가물어 물이 더러워 들어갈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매 년 고기잡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즐거움, 환희가 어디에서 올까? 아이들은 고기잡는 것도 잡는 것이지만 물장구 치고 몸을 물 속에 푹 담그며, 물 싸움하며 씨름도 하며 그렇게 즐거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것은 이 기쁨은 근원적인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물을 접하고 만지며, 물 속에 들어온 그 자체로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내면에서부터, 아니 내 몸이 그 개울 물을 맞이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몸의 구성이 수분이 70%라고 합니다. 지구 역시 70%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의 구조상 물과 뗄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성인 보다 수분 비율이 더 높아 80%라고 합니다. 물 만난 고기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을 만지며 노는 기쁨은 근원적인 기쁨인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기쁨이고 환희인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근원적인 영적 기쁨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원적인 인간 본연의 기쁨이 어디서부터 올까? 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물을 만나며 느끼는 근원적 기쁨이 자기 몸과의 동질감을 흐르는 개울물에서 느끼며 얻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적인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가 라는 것입니다.

요15:11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내 기쁨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
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말씀은 어떤 말일까요? 7-10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
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
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이 말씀은 머물러있는 기쁨, 그런데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기쁨,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로 연결되어 열매맺는 기쁨,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기쁨의 총체입니다. 결국 삶 속에서 하나님께 구하여, 그러니까 기도하여 맺혀지는 열매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모습을 예수님은 포도나무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15:2에 보면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옆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포도가 맺히지 않은 가지가 있습니다. 아마 포도나무 주인 입장에서는 그 가지를 처 주어야 양분이 열매로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가지 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삶 속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3절 말씀처럼 이미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 영혼의 가지치기를 해 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붙어있으면서도 열매가 없다는 것은 무언가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뿌리, 줄기, 가지, 아니면 농부의 손길 어딘가에 하나되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밤 나무에도 열매가 맺혔습니다. 역시 어떤 가지에는 열매가 맺혀있고, 어떤 가지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밤 나무를 가만히 보면 죽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열매가 맺힐 수 없을 것입니다. 붙어있지만 가지가 죽은체로 붙어있습니다. 그 가지를 보면 결국 말라서 떨어지더라구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진정 진지하게, 엄밀하게 하나님의 존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섬세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무뎌진 영혼을 날 선 검과 같이 날카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대해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5:3에서 말씀으로 깨끗해 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동맥경화로 혈관이 막히면 사람이 살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이 영혼이 불순물로 더럽혀지고 체워진다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 영혼에 동맥경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늘 말씀의 생약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만나를 먹었듯이 날 마다 말씀으로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근원적인 기쁨, 마치 아이들이 개울에서 기뻐 뛰듯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부터 오는 열매의 기쁨, 즉 10절에서 말씀하듯이 계명을 지켜서, 즉 말씀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부터 오는 열매맺는 기쁨말입니다.

지금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이 번달 계속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아합 왕 시대 못지않은 물질 숭배로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는데,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근원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는 것이 사는 것 아닙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합1:1-3에서 그 당시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
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하박국은 당시의 절망적인 시대상을 하나님께 다 아뢰고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폭력, 싸움, 부정, 불의, 차별, 타락, 인륜의 파괴. . . 최근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들, , ,오늘 이 시대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하박국 예언자는 어떻게 살 길을 찿을 수 있었을까요? 원망, 절망, 좌절, 고통하며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망대 위에 오릅니다. 이에대해 하나님은 합2:4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박국은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기쁨의 열매를 맺으며 살려면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열매가 없다면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그 믿음의 열매의 기쁨을 합3:17-19에서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
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 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
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
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맞보는 근원적인 기쁨의 모습입니다. 사슴 처럼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어린아이들이 흐르는 물 속에서 그 기쁨을 맞보며 즐거워하듯이 말입니다.

거듭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전부 다’의 신앙이라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당시의 사렙다 과부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게 기도에 응답하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엇에 응답해달라고 엘리야가 기도하였나요? 37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제단에 드린 제물 뿐만아니라 물과 나무단과 돌들과 흙을 모두 말려버렸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하니 응답해 주십니다.

지난 번에 기도의 응답을 5만번이나 받은 죠지 뮬러 목사에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참 귀한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 신앙인이 있습니다. 바로 장기려 박사님이십니다. 장박사님은 우리 나라 의료 보험을 창시한 분이시기도 하고 교회와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위한 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분의 에피소드가 적지않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평양에서든 부산에서든 자신의 집에 온 거지와 겸상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참 거지가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겨울에 입고 나갔던 외투를 거지에게 벗어주고 집에 돌아오기 일쑤였는데, 북한의 아내가 40년 만에 남편 사진을 받아들고 자식들에게 “두개 가지면 벌받는 줄 아시는지 번번이 거지에게 옷 벗어 주고 퍼렇게 얼어서 들어오셨어. 내가 부엌에서 굶는 것도 모르시곤 길 가는 거지들을 불러와서 겸상 차려 먹이신 양반”이었지 하드랍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돈이 없는 줄 알고 저만치 갔다가 가톨릭병원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안주머니에 넣어 둔 사실이 생각나서 되돌아와서 수표를 주기도 하였고. . .

책 훔쳐가는 도둑에게 “그 책 가져가 보아야 당신에게 아무 소용없으니, 그 갑쳐서 돈을 줄테니 그 책 도루 내려놓으라!”고 했답니다.

복음병원 원장이었을 때 병원비가 없어 찿아온 환자에게 밤에 몰래 도망가라고 말하면서 들키면 원장님이 시켜서 하는 것 이라고 말하라고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병원 규모가 커지고, 개인적인 도움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당시 북 유럽에서 시행되던 의료 보험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부산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을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 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믿음의 사람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 보면 열매를 많이 맺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맺혀지는 열매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니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성도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는 자기 내적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가 늘 마음 중심에 있어야합니다. 교회 신앙, 기독교 신앙의 신비입니다. 성도에게 이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역사와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임의로 떨어질 수 없다는 그런 하나님과의 내적 신비의 동일감, 그러나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그 일체감의 신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렙다 과부가 그랬고,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그렇게 문등병을 고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가 다 끊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전과 제사와 율법으로 가득찬 이스라엘에 왜 이 은혜가 없었을까요?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의 신앙이, 그러니까 ‘전부 다’의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겉 모습만 그렇지 속은 불신과 우상으로 가득찼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하나가 믿음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내 믿음 되로 될지어다’,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겨자씨 만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여 쩔쩔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하고 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하자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일갈하셨습니다. 불교에서도 선승에서 꾸짖을 때 ‘할’한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앞에 놓고 어쩔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처럼 성정이 같은 우리도 응답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응답의 열매의 기쁨이 있어야,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의 열매가 없다면,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그냥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부터 오는 열매로 말미암는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은 성도의 특권인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함이 없다’는 이 믿음의 고백은 명실공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그 연원을 찿아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부족의 족장 후계자를 세우지 못하여 불안해 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자기에게 있는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을 종으로 세우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너에게서 난 자식이 상속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의로움’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다 또 얼마 안가 이 번에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후계자를 세웁니다.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이 번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사람을 보내어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합니다. 사라가 등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만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어이가 없는 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웃음을 손님들이 듣고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찌 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하느냐?”하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창18:14절 첫 마디입니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에의해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역시 예수님께서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도 그렇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창 21:6에 보면 사라는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
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합니다. 이 웃음입니다. 속에서 저 내면 깊숙이에서부터 오는 하나님과 하나됨으로부터 오는 그 웃음, 그 기쁨말입니다.

눅1:37에 성령께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선언을 하였을 때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마리아는 찬찬히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그 귀신들림의 병을 고침받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던 말씀을 마리아에게 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교우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아니면 말씀을 통해, 아니면 일상의 소리들 통해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면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복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러나 능치 못함이 없다는 이 귀한 은혜를 수퍼 마켓에서 물건을 꺼내 카터에 넣는 식으로 천박하면 안되겠지만, 그러나 또한 이 근원적인 고백이 없다면 우리는 크리스쳔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웃음,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3/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16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87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48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35 2005.09.02 16:30
335 [일반] 염려하지 말라(2011년9월11일, 성령강림절후열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2 2011.09.11 16:03
334 [일반] 성령을 받았느냐?(2011년9월 4일, 성령강림절후열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5 2011.09.04 16:11
333 [일반] 지성에서 영성으로 그리고 공동체로(2011년8월28일, 성령강림절후열한번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9 2011.08.28 15:03
332 [일반] 인간은 우선적으로 영적 존재(2011년8월21일, 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567 2011.08.21 13:57
331 [일반] 사울의 손만 보는 다윗(2011년8월14일, 성령강림절후아홉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4 2011.08.14 15:06
330 [일반] 저를 보내 달라하니, 보살펴 주심(2011년8월 7일, 성령강림절후여덟번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1 2011.08.07 13:40
>>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4(2011년7월31일, 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9 2011.08.02 14:08
328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3(2011년7월24일, 성령강림절후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53 2011.07.27 10:19
327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2 (2011년7월17일, 성령강림절후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7 2011.07.17 14:43
326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1(2011년7월10일, 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95 2011.07.11 11:03
325 [일반]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2011년7월 3일, 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676 2011.07.03 15:11
324 [일반]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2011년6월26일, 성령강림절후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5 2011.06.26 15:44
32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2011년6월19일, 성령강림절후첫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33 2011.06.26 15:01
322 [일반] 신음하는 피조물에게 자유와 평화를(2011년6월12일, 환경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62 2011.06.12 15:59
321 [일반]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2011년 6월 5일, 부활절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3 2011.06.05 16:35
320 [일반] 노아의 집짓기(2011년 5월22일, 부활절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791 2011.05.22 15:51
319 [일반] 생명의 잔치(힘 버리기,2011년 5월15 :스승의 날) 첨부파일 하늘기차 2478 2011.05.15 14:09
318 [일반] 소년시절의 예수(2011년 5월8, 어버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3 2011.05.08 15:16
317 [일반] 십자가의 부활(2011년 5월1, 부활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4 2011.05.01 13:58
316 [일반] 거룩한 죽음(2011년 4월17, 종려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7 2011.04.17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