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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2011년6월26일, 성령강림절후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6.26 15:44 | 조회 2416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

2011년6월26일(성령강림절후세번째주일) 롬5:1-5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워지고 , 그리고 아하스가 남쪽 유다 나라의 왕이었을 때 북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남쪽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계략은 성공하지 못한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또한 사7:8에 볼 것 같으면 “에브라임은 육십오 년 안에 망하고,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는 한 민족이 되지 못할 것이다.” 또 9절에 보면 “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지금 시리아군이 에브라임에 진을 치고 있으며 곧 에브라임과 더불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7:2에 볼 것 같으면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은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오직 한 사람 이사야는 그렇게 될 수도, 그럴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육십오 년이 지나면 에브라임은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사야는 이러한 말을, 당시의 상황과는 정 반대의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정황이 벌어지기 전 사6을 보면 당시의 시대를 유다 왕 웃시야가 죽던 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꽤 혼란스러운 때였습니다. 이사야가 그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은 날개가 여섯 달린 스랍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둘로는 훨훨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그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이사야는 그 순간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라고 부르짖습니다. 그 때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 가지고 날아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그 때 이사야가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미디안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 의 양떼를 칠 때였습니다. 권력, 재산, 친구를 모두 잃고 홀로 양을 칠 때 였습니다. 모세가 타지 않는 불꽃을 보고 다가 가려고 하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우리가 온전히 서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온전히 바로 선다고 할 때 그 말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롬5:2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나아오게 되었으며, 하
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모세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모세는 아마 여러 차례, 아니 늘 그 곳을 왔다 갔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늘 보고 지나 왔던 그 자리가 왜 지금은 거룩한 곳이 되었을까요? 음~~~ 때가 된 것이지요.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학교 갈 시간이 있고, 놀 시간이 있고, 모내기 할 때가 되었고, 추수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내기 할 때 추수하려 들고, 추수할 때 모내기 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 2절은 이 은혜의 자리에 지금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 하는 때란, 시간이란 은혜의 때, 은혜의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시간은 어느 시간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사는 삶을 은혜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란 바로 주님의 시간에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차선을 변경할 때 옆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 앞쪽으로 끼어들려면 무엇보다 다가오는 차의 속도에 맞추어야 차선변경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란한 빵빵 소리가 울립니다. 동력을 전달하는 것 중에 톱니 바퀴가 있습니다. 동력의 본체에서 다른 곳으로 힘이 옮기어 가려면 다른 톱니바퀴가 그 원 동력의 톱니바퀴와 반대쪽에서 잘 맞 물려야 그 동력이 옮기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방향으로 같이 돌아가면 동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것 없이 하나님의 톱니바퀴와 같은 방향으로 그냥 왔다 같다 굴러 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무런 감흥이나 동력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톱니바퀴에 내 톱니 바퀴를 돌아가는 타임에 잘 맞추어 끼운다면 하나님의 톱니바퀴로부터 놀라운 동력을 받아 낼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시간의 톱니바퀴에 함께 맞물리기 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모세가 그 은혜의 자리에 서기 까지 얼마나 걸렸는가 하면 80년 걸렸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그 자리에 서게 되기 까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은 받았는데, 그것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는 받았지만 스랍들이 그의 입술에 숯 불을 가져다가 델 때까지는 그냥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부름을 받았는지, 왜 내가 지금 성전 안에 와 있는지, 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허송세월을 보냈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왜 지금 내가 이 고기 교회 예배당에 나아와 주님 앞에 고기 교회 성도로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데로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나아”와야 바르게, 온전히 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왔던 곳, 또 오고, 그리고 갔다가 다음에 또 오고 하는 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왜 모세는, 이사야는, 그리고 베드로는 일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까요? 지금 왜 달라진 것일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함께하실까요?

밤에 길을 가다가, 아니면 혼자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아니면 일터에서 뒤를 돌아 보는데 아니면 바로 자기 옆에 만날 사람이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을 알 때가 있지요? 그 때 기분이 어떤가요? 소스라치게 놀라 두려움에 식은 땀을 흘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없는 줄 알았는데 가장 가까이에 그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몰래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는데, 자기 일에 빠져있어서 그 사람이 지금 왔다는 싸인을 보내도 눈짓을 못 체어 못 보는 것입니다. 자기 시간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하거나 아니면 함께 일하는 사람과 있으면 자기 시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공유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공간적이기 보다는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직장에 다닌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같은 일에 시간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직장에, 아니면 함께 하는 사람 사이에서 그 하는 일에 흥미가 없거나,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면 시간을, 때를 함께 나누어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가까워지고 싶으셔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별 관심도 없고 하니 하나님이 옆에 아주 가까이 계셔도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합하고자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려면 우리 편에서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그동안의 인간 관계도 다 떨어버릴 수도, 그러니까 손해를 볼 수 도 있을텐데, 우리는 늘 상 어린아이 처럼 이기적인, 개인적인 욕심을 체우려고 메달립니다. 그런데 모세는 타지 않는 가시떨기 불꽃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와 아주 가까이에 함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냥은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동안 축적한 자기의 삶의 가치, 경험, 판단, 종교적 틀. . . 그거 다 내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고서야 모세는 하나님을 80년 만에 하나님의 시간에 편승합니다. 이사야도 어느 순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합니다. 그 순간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낀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만남의 대표주자는 야곱입니다. 형을 속여 장자권을 획득하고 형에게 살해당할 까 보아, 죽을 힘을 다해 집에서 빠져 나와 들판으로 나가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돌베게를 베고 잠에 빠져들었는데, 뜻 밖에도, 예상치 못하게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창세기는 야곱이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창28:16,17에서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 역시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글쎄다 모임에서 퀸터 그라스의 ‘넙치’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근데 저는 이번에 거의 읽지 못했는데, 처음에 뭔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구요, ‘양철북’의 저자이기도 한데, 하여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박경장님이 문화에대해 이야기 하면서 어는 분의 말이라고 인용을 하는데, 어느 누군지는 기억이 안나고 그 사람 이야기가 인류의 문화가 두려움에서부터 온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미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스스로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고 에덴 동산 숲 속에 숨었다고 하는 장면에서 이미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화는 저는 엄밀한 의미에서 두려움 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부끄러워 자신을 가리는 옷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지요. 범죄 전에는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벌거벗고 지내는 것,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 부족함, 힘없음, 피조된 존재의 유한성과 한계를 의미하는데, 최초의 엔덴 동산에서는 그 벌거벗은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자신의 유한성을 부끄러워 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보다 못한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자기 자존감을 부끄럽게 하구요. 하여간 두려움은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폭력의 옷을 입게 하구요.

그런데 여기 거짓 두려움 말고, 참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는 두려움은 문화와 폭력의 옷을 입히는 거짓, 사실은 있지 않은 없는 두려움이구요, 그러니까 없는데 우리가 죄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인류가 지금 그 없는 두려움에 붙들려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의 두려움이지요. 이 두려움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고 하듯이 하나님과 나의 차별, 조물주와 피조물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거짓 문화와 폭력으로 넘어가게 한 허구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 자유, 참 평화, 참 사랑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당나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부가 당나귀 등에 돌부처를 실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돌부처를 보고 합장 배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는 자기를 우러러보고 경배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쭐대며 교만한 마음으로 마부가 가라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습니다. 이에 화가 난 마부는 채찍으로 내려칩니다. 갑자기 내려치는 채찍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당나귀의 등에 있던 돌부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당나귀는 다리를 다쳐 그만 쓸모없는 나귀가 되었고 결국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주인인지, 당나귀인지, 부처인지를 깨닫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것, 그 한계를 느끼는 것이 참 두려움이지요.

여러분 기억이 납니까? 어릴적 처음 물가에 갔을 때 그 많은 물의 출렁임에 그 물가의 경계에 서서 한 참 조심스러워하지요, 그러다가 엄마나 아빠가 손을 잡거나 꼭 안아서 물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던 기억, 그리고 한 여름 그 물 속 시원함을 즐겼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그 경계, 그 한계를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경계는 계속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어집니다. 이웃, 가족, 학교, 직장, 나라, 인종, 피부, , , 등 모든 관계 속에서 이어져야 합니다. 그 한계를 인정해 주고, 그 한계를 존중해 주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은 그 한계를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인간, 자연의 모든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참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고, 이것이 참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로부터 오는 거짓, 없는 두려움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이 참 하나님 두려움으로부터 사랑과 평화와 희망의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죄를 고백한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고 배에 가득한 물고기에 놀라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했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주님에대해 설렁 설렁 했을 것입니다. 랍비이겠거니, 선생이나, 현자이겠거니 했는데, 예수님은 주님이셨습니다. 주권자시오, 창조주셨습니다. 마5:10에 보면 베드로 뿐만아니라 야고보와 요한도 모두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며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그저 설렁설렁 했는데 그 날, 그 주님의 때에 주님이 나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인데, 2절에 보면 괄호로 묶은 말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지금 서 있는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 하면 1절에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은혜인 것입니다.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 그래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 바로 이 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설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서면 더 이상 거짓 두려움, 없는 두려움에 메일 필요가 없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것을 몰랐는데, 하나님이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인 것을 몰랐는데,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그 순간이 내가 바로 서는 순간인 것입니다. 모세의 40년 동안의 바로의 왕궁 생활이나, 미디안 광야에서의 은둔 생활은 바로 서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의 자리가 아닙니다. 떨기 나무 불꽃에서 타지않는 불꽃을 보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서는 순간입니다. 이사야가 스랍들의 훤화하는 장면을 보고 입술에 숯불이 옮기워지는 순간이 바로 온전히 서는 순간인 것입니다.

이 은혜,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 의 때,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선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하며 산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어느 자리에서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을까요? 돈을 주고도, 권력으로도, 나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수도, 즐거워 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영광을 향한 소망을 자랑할 뿐만아니라, 환난 중에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메달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의 떼에 나의 시간을 맞추어 지금 은혜의 자리에 설 수 있다면 그 주신 은혜를 따라 그 환난, 시험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환난을 자랑할까요? 그 환난이 인내를 그리고 그 인내가 단련된 인격을 낳고 그 단련된 인격이 희망을 낳기 때문이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두 번, 아니 그 이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때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 환난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인내-단련된 인격(연단)-희망이라는 하나님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아픔, 고통, 절망감 등 힘든 것들을 묵묵히 견디어 낼 때 궁극에 오늘 1절의 말씀처럼 “영광을 향한 소망”의 자리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 고통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시며 능력, 지혜, 위로를 그리고 돕는 천사도 보내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바위에서 샘을 내고,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해 주신 것 처럼 말입니다.

모세는 이 과정을 40년, 아니 80년 걸렸습니다. 이 과정을 하나님의 스케줄(time table), 섭리와 계획에 맞추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그 삶의 짐에 치여 살다가 인생을 끝 마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이 그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하고 그냥 삶의 연민, 삶의 희로애락에 일희일비 하며 생을 마감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십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을 때에 허물을 벗지 못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허물을 벗는다고 합니다. 가제도, 촉수가 많은 곤충은 허물을 벗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어려워도 허물을 벗지 못하면 고사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경계에 늘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죽은 삶을 산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죽었으나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았으나 죽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주저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의 깊은 자리에 머무셔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 사랑, 감사, 기쁨을 맛 보는 삶을 살기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3:1-14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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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일반] 노아의 집짓기(2011년 5월22일, 부활절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791 2011.05.22 15:51
319 [일반] 생명의 잔치(힘 버리기,2011년 5월15 :스승의 날) 첨부파일 하늘기차 2479 2011.05.15 14:09
318 [일반] 소년시절의 예수(2011년 5월8, 어버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3 2011.05.08 15:16
317 [일반] 십자가의 부활(2011년 5월1, 부활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5 2011.05.01 13:58
316 [일반] 거룩한 죽음(2011년 4월17, 종려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7 2011.04.17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