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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의 예수(2011년 5월8, 어버이주일)

하늘기차 | 2011.05.08 15:16 | 조회 2452


소년시절의 예수

2011년 5월8(어버이주일) 눅2:41-52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은 가족들과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2살이 되어 율법의 규례를 따라, 성인으로서 ‘율법의 아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처음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성장하던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유일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가 서른살이 되기 이 전에 무엇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요? 어떤 분들은 예수가 청년기에 인도에 가서 불교와 힌두교 공부를 하였다고 ‘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다 헛된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어떤 학문을 사사 받은 흔적을 찿아 보기 어렵습니다. 더우기 예수님의 말씀 속에 어떤 타 종교의 냄새가 없구요, 그것은 이야기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면 기독교를 해하려 하거나, 폄하 하려는 사람들의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런 예수의 행적을 추적하는 내용의 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천박하고, 진리에대한 진지함 보다는 연애인 가쉽 정도의 수준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3류 정도의 책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디 공부하고, 여행하고, 명상하고 할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말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장하면서 어디 특별한 교육을 잘 받지 못했습니다. 장남으로서 가정의 생계를 도 맡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는데, 예수 보다 훨씬 자유로웠고, 교육도 더 잘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율법 선생, 랍비에게 정식으로 교육도 받고, 좋은 학습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보다 자유로웠을 것이고, 또 요한은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 껏 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때가 되자 과감하게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부모와 함께 가족의 생계를 도우며 혼자 독학을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전 학자들과 대화를 한 경험은 예수님에게 특별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연, 가정, 일터가 그의 교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오는 비유를 보면 늘 가정, 일터, 자연에서부터 얻어진 지혜인 것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에게 학문을 배워 안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깨우친 것들입니다. 또 예수님의 교과서는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이사야서, 시편을 많이 애독하신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예수님의 입에서 시편의 구절이 흘러 나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시22:1), 회당에서 처음 말씀을 전할 때에는 사61:1,2절 말씀을 들어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훌륭한 스승 및에서 학문을 한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 부모와 함께 노동하며 귀족의 아들이 아니라 평민의 자녀로서 30세 까지의 세월을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유월절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예수가 없어진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친척들 중에 함께 끼어서 내려오는 줄 알았는데, 수소문 해 보니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룻 길을 간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랴 부랴 다시 예수를 찿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3일 만에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찿습니다. 모친 마리아가 어린 예수에게
“예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찿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찿으십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합니다.

유대인 남자는 12세가 되면 율법의 아들로 공인을 받습니다. 소위 성인식을 치릅니다. 즉 율법에 정해진 권리와 책임을 갖는 한 사람 몫의 남자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나이 때는 유대인 남자에게 종교적인 자각이 형성되는 때입니다. 예수가 12살 되던 유월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각이 그의 마음에 싹텃 던 것입니다. 처음 성전에 당도했을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토론하는 광경은 어린 예수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는 당대의 율법 학자들이 지금으로 치면 세미나를 열고 있는 것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율법을 놓고 열띤 토론을 하는 것에 마음이 끌려 양친과 헤어지게 된 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소년기의 모습을 보면 12세 때의 모습인데, 우리로 치면 이제 중학교에 다니는 나이 이며, 이제 막 소년기에 접어들어 자기에 대한 자각이 싹 틀 시기입니다. 예수님에대하여 허황되고, 과장된, 그리고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를들어 3살에 “율법을 다 깨쳤다느니”하는 것이 아니라, 12살의 나이에 다른 아이들 처럼 생에대한 자각이 싹 틀 즈음에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대한 자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보다 보면 예수의 신적 능력, 신비, 초월과 환상등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러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은 또한 참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똑 같이 먹고 자고 또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똑 같은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공교육이 그 본래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게 되어 부모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제도권 교육에서 못해주는 것을 자녀에게 해 주려고 애를 씁니다. 최근에 들어 익숙해 진 것 중에 하나가 체험학습입니다. 과학체험, 생태체험, 스포츠, 만들기,,, 얼마나 많은 체험 프로그램이 생겨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기증적인 것, 지식적인 것만 체우지 진정 귀한 삶의 가치를 놓치는 경우가 십상입니다.

. 그런데 성도들에게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교육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대해 짧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핵심에대해서는 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눅2:40에 보면
“아기는 자라며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찼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또 52절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지 몸이 튼튼해지고, 지식이나 지혜가 자랐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어떻게 자녀들을 키워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짧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좋은 음식, 영양제, 그리고 스포츠 클럽에 열심히 다니게 합니다. 아이들의 지식 습득을 위해 학원을 보냅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신앙 훈련을 위해서는 무관심으로 흐릅니다. 엄마 나 오늘 교회 쉴래 그러면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엄마 오늘 나 하루 학원 쉴래”하면 엄마가 거품을 뭅니다.

그렇다면 어린 예수에게 신앙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분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부모님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의 부친인 요셉에대해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칠게 대응하지 않고 조용히 혼인 관계를 끊으려 했던 그 모습에서 요셉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어머니 마리아도 아이를 잉태하리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 속에 믿음의 좋은 본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꼭 좋은 가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건강하고 온전한 가정 보다는 풍지 박산난 가정을 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자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갖고자 - 물론 사라도 인정하였지만 - 몸종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얻고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몸종 하갈이 아이를 낳자 교만해져서 사라를 깔보기 시작합니다. 심각한 가정 분란이 발생합니다. 나중에 이삭이 태어나자 결국 하갈과 사라는 아브라함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은 어떻구요, 형 에서의 장자권을 거짓말하여 아버지로부터 강탈하여 도망갑니다. 그 야곱이 삼촌에게 에서에게 사기친 그대로 당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들에 이르러 요셉을 편애하자 다른 형제들과 요셉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결국 요셉이 생명을 무사히 건져 이집트로 팔려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갑니다. 나중에 중동에 발생한 극심한 7년 가믐에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온 형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요셉은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미리 나를 보내셨다“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 만나고 형 에서를 만날 때 칼을 부여잡고 야곱을 죽이려 다가오던 형님을 보며 ’형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 얼굴을 뵙는 것 같다”고 고백을 하는 모습은 오늘 이 폭력과 부정한,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보여주는 신앙의 삶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가장 가정이 무너진 대표적인 가정은 다윗입니다. 압살롬이 이복형제인 암몬의 여동생 다말과 결혼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그르쳐지자 왕자의 난을 일으켜 많은 형제를 살해하고, 나중에는 왕에게 반역을 일으키기 까지 합니다. 바로 시편 3,4편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시 속에서 다윗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마도 블레셋과 전쟁하는 중에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기 위해 우리아를 최전선에 내 보내 죽게 한 그 인과응보가 아닌가 십습니다. 그러한 와중에도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 안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전에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가정을 세우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 때에 과연 누가 가정을 세울 수 있을까요? 누가 가장 중요한가요?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제공합니다. 다윗이 나라전체를 평정하고, 평화를 구가하면서 자신은 화려한 왕궁에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율법궤가 여전히 천막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율버궤를 모실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대상17:4,6은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어서는 안 된
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날로부터 오늘까지, 나는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아니하고,
이 장막에서 저 장막으로, 이 성막에서 저 성막으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내가 온 이스라
엘과 함께 옮겨 다닌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라엘의 어떤 사사
에게,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가 너의 집을 지어주겠다고 다윗과 언약을 합니다. 이 집은 영원히 변치않는 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왕조를 약속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릴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약속한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메시야 탄생의 집안으로, 가문으로, 가정으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을 회복하며, 지키시며, 인도해 주실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가정 안에 주님 외에 어떤 권위와 가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주님의 은총 안에 회복되고 세워지고, 인도되어 사랑, 참 소망, 위로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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