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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죽음(2011년 4월17, 종려주일)

하늘기차 | 2011.04.17 13:31 | 조회 2076


거룩한 죽음

2011년 4월17(종려주일) 요17:15-19

예수님께서 체포당하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17:17에서 보면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는데, 앞 뒤 전후의 문맥을 보면 거룩의 이유가 15절에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자기처럼 데려 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자에게서 지켜달라는 것을보면 이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니 11절에서 보면 그래서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합니다. 무엇을 지키고, 보호해 주는가 하면 거룩함입니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은 거룩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하니 거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왜 거룩해야 하는가 하면 16절 말씀을 또 보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면 거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요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데, 16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제 머물러 있지만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머물러 있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저 자기의 취향이나, 자기 뜻이나, 자기의 종교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열매를 맺으려면 역설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머물러 있는 것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열매 맺기는 가지와 같습니다. 실제 예수님도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말씀으로 깨끗해 진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깨끗해 지는 것이지요. 우리 처음 본문 말씀하고 이어져 있습니다.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우희종이라는 수의과 교수 한 분이 있습니다. 미국 쇠고기로 한창시끄러울 때,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 왜 안되는지를 조목조목 집어가며 설명을 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종종 메일이 오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자신을 강남에 사는 사람이라 하면서 ‘근거없이 미국 쇠고기 수입을 비판하는 좌파 교수’를 바로 잡으려는 태도의 글을 보내 온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에 입각해서라기 보다는 왜 정부를 비판하느냐는 식의 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것은 벌써 참여정부 때였고, 그 당시에는 소위 조중동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 했었다고 한 모양입니다. 상대방이 답신을 보내왔는데, 그의 마지막 주장은 사회 불만에 찬 당신들에 비해 자신은 사회에 불만도 없고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그가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래도 나는 당신보다 행복하다는 것으로 변 아닌 변을 보내왔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런식의 자기 방어적인 답변은 특별하지도 않다고 하면서, 새삼스러웠던 것은 그가 정부비판적인 좌파들은 모두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한 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를 좌파라고 불렸지만 사실 자기는 좌파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좌파의 정의도 다양하지만 자기는 그런 공부도 하지 않았고 지식도 없는데, 일전에 어떤 이가 크게 읊는 시를 듣고 주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고 하면서, 낭송된 시의 내용이 여러 면에서 자신과 달랐지만, 그러나 그 시에 담긴 마음이 너무 와닿았기 때문에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 시는 백기완 선생님이 감옥에서 쓴 ‘묏 비나리’라는 살아있는 긴 시였다고 합니다.

그 시를 듣고 눈물을 흘렸던 때가 나이 50을 갓 넘긴 때였다고 합니다. 그 때 자기는 스스로 자신이 청년임을 알았다고 회고하면서 “힘든 역사 속에 몸소 치열하게 삶으로 투쟁해온 운동가와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개인의 입장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공통점은 서로 청년의 꿈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출발부터 동일 선상에 서지 못해, 소외되거나 억압받아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고, 더욱이 그러한 것이 체제에 의해 조장될 때 이를 과감히 시정해야 한다는 진보의 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희종 교수는 계속해서 내게 메일 준 분이 자신이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으로 행복하듯, 또한 사회비판적인 이들은 청년의 꿈을 지니고 주변의 힘든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행복하다고 하면서, 물론 사회정의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이 겪는 단절 속의 고통과 분노에 찬 요구만을 본다면 그의 지적도 옳을지 모르지만 종교적 신념에 의거해 4대강 사업 중지와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말하면서 소신공양한 문수 스님의 비폭력적 저항이 분노에 차고 불행한 것이었다면 어떻게 상대방을 타이르며 상생을 말하는 유언을 남길 수 있으며, 그리고 자신을 버리며 사회 약자를 생각하는 사회적·종교적 저항은 그 무엇보다도 깊고 치열하며, 또한 자유롭고 평안하기에 분노를 넘은 꾸짖음과 타이름이 있다고 담백하고도 결연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글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가 놓친 것이 있다면 나와 같이 종교적 맥락의 인간은 비폭력적이기는 하나 결코 지칠 줄 모르게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부류라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나 철학도 없이 집단이익과 표만을 생각하며 무늬만 진보, 보수인 정치꾼들과는 다르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타불이와 동체대비의 신념을 지닌 이들은 결코 힘든 이웃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이들 삶의 원천이자 동력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사라질 자신의 소유와 권리로 행복을 느끼는 그분에게 너와 내가 더불어 가는 과정만으로 얻게 되는 또 다른 행복과 즐거움에 대한 메일은 보내지 않았다. 이미 늙어버린 그의 알량한 행복마저 무너뜨리는 잔인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사를 뛰어넘는 진정한 생명존중을 바탕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힘든 이웃과 함께하는 이는 영원히 늙지 않는 삶을 약속받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사58장에 보면 참 금식에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싸우고 다투며, 주먹질이나 하면서,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배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 하겠으며, 주님께서 기뻐 반기시겠느냐며, 6절에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
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
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
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이란 바로 우희종 교수가 담담히 고백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그리 만만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17절에서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차이가 있습니다. 인류가 생겨난 이 후 이제까지의 모든 문명의 총화를 다 합하여도 하나님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니 인간이 거룩하다는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거룩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 거룩의 처음은 모세로 부터 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성전과 제사법과 제사장 의복을 구체적으로 만들 것을 말씀해 주셨고, 그런 예전과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공간, 제도, 복식을 통해 이스라엘과 만나주셨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거룩은 하나의 절차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한다고 거룩해 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그런 예전과 의식이 거룩인 것 처럼 말입니다. 단지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 그 틀을 통해 내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인 것입니다.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과 어떻게 함께하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가 인 것입니다. 슥 14:20에 보면, 공동번역으로 보면
“그 날이 오면, 말방울에까지 주님께 거룩하게 바친 것이라고 새겨
져 있을 것이며,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에 있는 그릇들과 같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말방울도, 그리고 솥단지도, 모세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도, 그리고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타고 간 나귀 새끼도 모두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쓰시게 때문입니다. 고전6:11에 보면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거룩하여졌으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거룩함은 바로 올바른 관계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거룩의 의미가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 거룩을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라고 합니다. 17절에서 진리로 거룩하게 한다고 하는데, 우리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일텐데, 그렇다면 그 진리는 바로 진리의 영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14:16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영원히 우리와함께 하실텐데 그가 곧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26에 보면 그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
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적 감동을 통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가르치시고, 깨우치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최소한의 성령의 내적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롬8:9는
“.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에게 ‘내가 누구야?’하고 물으면 ‘내가 누구긴 누구야 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인정하기 위해 누구의 남편이요, 누구의 아빠요, 어느 회사의 부장이요 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스스로를 드러낼 때 ‘나는 나다’한 것처럼, 나도 ‘나는 나요’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이 말씀이 다시 한 번 나옵니다.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기위해 내가 그들을 위해 나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은 주님 스스로를 어떻게 거룩하게 하셨나요? 요11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자 그 소식이 공의회에 들어가서 공의회가 소집이 됩니다.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
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
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
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이 말
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
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
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11장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죽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이 오늘 말씀 19절의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 이라는 말과 겹쳐집니다. 주님의 거룩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요10의 선한 목자의 비유 속에서도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5장 포도 나무 비유에서도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19절 말씀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거룩하다는 것을 몸을 아버지께 바친다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죽음, 자기 비움, 자기 힘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것이 안되니까, 하기 싫으니까 자꾸 종교적틀, 영성이다, 경배와 찬양이다, 무슨 알파코스다 하며 온갖 프로그램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나를 비울 수 없으면,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고백하면 되는데, 자꾸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거룩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종종 ‘평화주의자들은 죽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우리 나라의 장준하 선생님, 백범 김구 등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 진리, 그 평화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디, 마틴 루터 킹, 장준하 등 인류에 평화를 심고 가신 많은 위대한 분들의 죽음의 공통점은 왜, 누가, 그리고 그 배후 등 많은 의문점이 있고, 아직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그 과정과 그리고 주도한 실체의 모습이 그대로 다 노출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함께했던 모든 제자들도 등을 돌려버린 죽음이었습니다. 또한 예수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을 사람들이 한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을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난번 영성강좌에서 이주연 목사님께서 류영모 선생님께서는 자기 죽을 날을 정해놓았다고 합니다.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렌 니어링도 90이 넘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부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곡기를 끊고 자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또 헨리 나우엔 같은 분은 그의 죽음과 관련한 글에서 죽기 전에 모든 분과 특히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나 베드로 처럼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그러한 자기 의지에 넘치는 죽음이 아니라, 아니면 그냥 무기력한, 패배적인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섭리와 경륜에 자기 뜻 버리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죽음말입니다. 그 죽음에는 바로 부활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주님은 죽으신 것입니다. 이 죽음의 한 주간이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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