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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2012년 2월 9일, 주현절후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2.02.05 14:41 | 조회 2180


염려하지 말라
2012년 2월29일(주현절후네번째주일) 마6:25-34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6번씩이나 강조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염려, 근심 속에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 죽는 날 까지 염려, 근심 속에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근심, 걱정이 내 삶의 기쁨, 감사, 평화를 뺏어간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이 좋은 것들을 몰아냅니다. 근심, 걱정은 삶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이기에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쳐 나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조금씩 밖으로 몰아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 근심과 걱정이 나의 주인 노릇을 합니다. 나의 좋은 것들은 이 근심과 걱정에게 종노릇 합니다. 어떻게 이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에게 배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새들이 씨를 뿌리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인트는 새들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참새들도 매우 부지런합니다. 어찌 보면 사람 보다 더 부지런 합니다. 교회 사택에 살 때, 아침에 새 소리에 잠이 깨곤 했습니다. 주님이 공중의 새를 보라 하시는 것은 그 새들이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염려를 하지 않을까요? 새들은 인간들 처럼 볼 수 없는 미래, 즉 내일을 보려고 긴장하거나, 그 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먹을 것을 쌓아두는 것으로 안정과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백합화에게서 배우라고 하는데, 이 들에 핀 백합은 중동에서는 진홍색 양귀비나 아네모네 꽃 종류로서, 이 들에 피는 백합들은 딱 하루만 피었다가는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 꽃의 아름다움은 왕이 입는 자색 옷과 같이 아름답고 위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게 핀 꽃이 하루 피고 시들면 단지 불쏘시게 외에는 사용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동지방에는 집집 마다 빵을 굽는 진흙으로된 화덕이 있는데, 그 화덕에 불을 피워 음식을 해 먹을 때, 특히 급하게 요리를 하기 위해 불을 쎄게 할 때 바로 마른 들 풀이나 꽃을 아궁이 속에 넣으면 순간적으로 불을 활활 피어오르게 하여 급히 음식을 조리해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핀, 왕의 옷, 솔로몬의 옷이 부럽지 않을,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그 아름다운 꽃이 하루만에 그것도 불쏘시게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아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들 풀도 그렇게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인간을 얼마나 잘 돌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걱정, 근심, 즉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걱정, 근심은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하십니다. 아! 근심과 걱정은 믿음에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데,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왜 걱정, 근심이 떠나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니까 눈에 띠는 단어가 ‘내일’이라는 단어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우리 걱정, 근심은 바로 내일에대한 것입니다. 새는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그 날 먹을 것, 그 날 먹으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늘 하루치 음식을 만나로 주셨습니다. 그 때는 그야말로 마치 새와 같습니다. 아침 이슬 내릴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만나를 거두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매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매일 내리시는 이유를 신8:3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
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맞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날마다 걱정, 근신과 씨름하며 세월을 낭비하십니까? 싸워 이겨야 하는데, 매일 깨져 몸이 엉망 진창이 됩니다. 마치 격투기에 나가 무참하게 깨져서 링으로 내려오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이방인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이방인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하셨습니다. 아! 근심, 걱정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루 하루를 살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33절에서 주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
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 그렇구나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 해야 하는 일과 안해도 괜찮은 일에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라고 못 박아 말씀하고 계십니다.

종종 말씀 드리지만 성경에 무엇을 하라 할 때 그 앞의 수식어 접두어가 중요하다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기뻐하라 하면서 ‘항상’이라고 합니다. 기도하라 하면서 ‘끊임없이’라고 합니다. 감사하라 하면서 ‘모든 일에’라고 합니다. 어떻게 ‘항상, 끊임없이, 모든 일’ 일 수 있을까요? 이 것은 신실하신,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이 노력하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접두어를 빼 버리면 사람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냥 기뻐하라, 그냥 기도하라, 그냥 감사하라. 사람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항상, 쉬지말고, 범사에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는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은혜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8:2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시험하실까요?

창22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든 우여곡절을 잘 넘기고 하나님이 주신 이삭과 함께하는 부족을 먹여 살릴 준비 다 해 놓고 걱정없이 살아가는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시에는 아마도 자기 생명 보다 아들 이삭의 생명이 더 소중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덜컥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게 뭔 일인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아침 일찍 두 종과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어 나귀에 실고 모리아 산으로 떠납니다.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하여 번제단을 만들고 아들 이삭을 묶어 번제단 위에 올립니다. 10절에 보니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화들짝 놀라(이것은 제 표현입니다)아브라함을 부르며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거듭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 백성을 시험할 때는 오직 ‘말씀의 시험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말씀의 시험을 받습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의 시험을 주실까요? 말씀 하나, 하나 씩에 따라 마치 대나무가 매듭을 짓듯이 믿음이 하나씩, 하나씩 마치 벼가 자라듯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결실, 추수 때에 추수의 기쁨 처럼 믿음의 결실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한 단계 씩 오르면서 마지막에 긍극에 가서는 나와 아버지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 나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모두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궁극에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자리에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믿음은 궁극의 결실이기 보다는 내가 하루 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살아내야할 삶의 모습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잃어버리고 걱정, 근심에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신8:3에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알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스라엘이 알게 하였나요? 3절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
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잘 본 것입니다.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말고 시험은 잘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한 참을 모리아산으로 향할 때였습니다. 아들 이삭은 참 이상했습니다. 여느 때같으면 당연히 번제물도 함께 데리고 가야할텐데, 이 날은 번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있는데, 왜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아브라함은 ‘허걱!’했을 것입니다. 속내가 드러나, 식은 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무어라 이야기 하겠습니까? 적당히 둘러댈 수도 없고, , ,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야기합니다. 22:8입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 다음 말이 기가막힙니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고 합니다. 평화입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뜻, 주님 은혜 아래 하나입니다.‘손수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의 뜻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받은 후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습니다.

음~~ 이 진리를 깨닫기 까지 100년이 걸렸습니다. 모든 인생의 풍광을 다 겪었지요.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번제물이 어디에 있나요 하고 물을 때의 그 순간, 찰나는 모든 것이 무너지든지, 그동안의 것을 바르게 세우든지 하는 기로의 순간이었습니다. 최초의 실존주의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한 때 순간이라는 잡지를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영원과 시간 사이, 무한과 유한,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교와 기독교 사이의 접점을 순간이라 하며 그 순간이 믿음의 자리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질문에 그 순간의 자리에 섰습니다. 믿음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에대한 전폭적인 신뢰, 그 동안의 하나님과 동행한 삶의 결정체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지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받을 때에 기뻐하라하면서 지혜를 구하라고 약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지혜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예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우리 가정을 위해, 나의 자녀를 위해, 나의 기업을 위해 준비하며, 인도하며, 보호하심을 진정 믿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 근심, 걱정의 샘을 팝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은 먼저 할 일, 하나님의 말씀의 샘을 팝니다.

저희 아파트 1층에 중년 부부가 사시는데, 1층 뜨락을 보면 늘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1층 주부가 한 8평 남짓한 공간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1층 공간이 비어있거나 쓰레기들이 떨어져 있기가 십상인데, 우리 아파트 220동 1층 공간은 봄부터 가을 까지 아기자기한 꽃으로 풍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도 꽃밭과 같습니다. 걱정, 근심, 미움, 원망의 꽃을 피우지 말고, 기쁨, 사랑, 평화의 마음 꽃,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꽃’을 가꾸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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