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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012년 1월29일, 주현절후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2.01.29 14:54 | 조회 2398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2012년 1월29일(주현절후네번째주일) 눅4:21-32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창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이집트로 피난 갔다가, 나사렛으로 가셔서 자라셨고, 그리고 요단강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광야로 나아가 40일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그리고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면서 점차 고향쪽으로, 고향 나사렛에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눅4:1에 보면 ‘돌아오셨다’, 14절에도 ‘돌아오셨다’, 그리고 16절에는 ‘들어가셨다’고 하는데, 이렇게 말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야할 곳에 가시고 물러나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는데, 마치 물이 흐르듯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물이 흐르는 것 같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이 흐르듯 하는 주님의 모습은 바로 14절에 근거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 전에도 1절에서 보면 성령으로 가득하여 돌아오셨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또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고 합 니다. 그런 걸 보면 예수님의 삶의 행적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고 있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데, 이 법칙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굽이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며, 고였다가도, 떨어지기도 하고 갈라졌다가, 다시 합치며 다양한 모습으로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물은 흘러가면서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습니다. 그 흐르는 틀에 자신을 맞추며 모든 것들을 넉넉히 적시며 스며들며 흐릅니다. 우리 인생의 강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강물 처럼 흐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강물처럼 흐를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야 하는데, 자꾸 절벽 앞에서 올라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계속 그 곳에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절벽을 끼고 굽이쳐 돌아가야 그 멋이 나지 않을까요? 바로 그렇게 흘러야 썩지않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그리고 겨울에는 꽁꽁 얼기도 하며 흐르는 것 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우리 인생은 물줄기를 타고 흐르는 강물처럼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산에 갈 때 작은 산은 길이 잘 나 있습니다. 광교산 같은 경우, 참 편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이 크면 길 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말아야, 에베레스트 같은 큰 산을 갈 때는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뿐 만 아니라 셀퍼도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 역시 큰 산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길이 나있고, 지도가 있어도 그 길이 가야할 정상으로 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이드가 없으면 산 정상에 서기는 거의 불가합니다. 인생의 길도 다 나 있지만 내가 가야할 길이 그 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인생 역시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바로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가이드가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으르듯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릴적 자라난 고향 나사렛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으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22절에 보면 회당에 모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은혜로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은혜에 놀라고 감탄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따라가야 하는데, 말씀아닌 것에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 물흐르듯 하는 주님의 발길이 끊깁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는 21절 처럼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66권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때 이 본문 말씀 때문에 신학적인 논쟁이 붙은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 다른 명제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입니다. 이야기하자면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아닐까요? 말 장난을 하는 것 같지만, 그 말씀은 결국 ‘소 귀에 경 읽기’식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든, 받지 않든, 그것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나사렛 동네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61:1,2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신 것 같은데, 그 말씀에 감탄도 하고, 놀랄 정도로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왜 그 말씀이 고향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였을까요? 여기서는 한 마디 말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육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본질을 보는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육적으로 사람을 보는 것은 신앙에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첫째는 목수의 아들로, 그러니까 목수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노동자, 천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가족들 중에 동생들에대해 언급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동생들의 이름이 죽 열거되고 있습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 .

마을 사람들은 예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에대해 설왕설래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무얼 한다고!! 예수님은 그들의 속 내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네 사람들에게 “너희들은‘니 병이나 고쳐라’고 나에게 말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어디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에서도 베풀어 보지”라고 말하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엘리야 때의 이방인 사렙다 과부가 구원을 받은 것과 역시 엘리사 시대의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깨끗이 나은 것에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두고 한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벼랑으로 몰고가 떨어뜨려 죽이려 하기 까지 하였을 정도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동네 사람들에대해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대해 답답해 하면서 고향이니, 친척이니, 집안이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규정하고, 구속하는 것에대해 한탄을 하셨습니다. 아마 에수님이 우리 사회에 오신다면, 지금 같은 학벌과 지연, 족벌에대해서도 역시 탄식을 하셨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를 고쳐준 것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마6:5에 보면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지 않고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것에 붙들리고 집착하고 그 것에 안주하면 마치 달팽이가 자기 집 속에 숨어있듯이, 그렇게 자기 안에 박혀 자기 것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나사렛 사람들 같은 사람들에대해 ‘육신을 따른’, ‘육체대로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육신을 따르는’그들 가운데서 지혜있는 사람, 권력있는 사람,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육신의 기준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는 것인데, 그 당시 고린도교회는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고, 멸시받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고린도 사람들을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육신의 기준으로’ 본다면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다른 사람 보다 조금도 못 할 게 없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 같이 여긴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육신의 기준을 따라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있으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새로운 가능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1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육체대로, 세상의 가치를 기준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새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늘 어제 본 그 사람, 과거에 알고 있는 그 사람과 똑 같은 사람으로만 보고, 새로운 가능성에서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달력을 새 것으로 바꾸어도 새 날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하는 사람은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일 뿐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피곤한 상대, 힘든 상대, 답답한 상대로 보여집니다. 먼저 내가 새로워 지지 않으면 나의 고정 관념, 늘 같은 눈으로 보는 시각, 기준, 관점, 관행, 관습, 즉 ‘육신의 기준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새해에도 별로 기대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의 감독이 히딩크 외국인이었습니다. 외국인 감독을 중용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외국인이어서 우리나라의 선수들을 처음부터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발된 선수가 바로 박지성, 이영표, 최진식, 김남일 등 새로운 얼굴들이었습니다. 기존의 한국 감독이었으면 아마도 찿아낼 수 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새 해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그 사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조차도 새롭게 보는 사람입니다.

나의 가족, 가장 친한 친구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 부부 간에, 부자 간에, , , 매일 만나는 훤히 들여다 볼 것 같은 사람들에대해 이전에 갖고 있던 부정적 이미지와 그리고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환경, 조건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보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목수로, 그리고 마리아의 아들, 즉 자기들과 같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나사렛 동네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것을 가로 막은 것은 바로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한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이와같은 상황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우리 주변에서, 내 주변에서 가족과 직장과 이웃들 간에 이러한 갈등, 즉 예수를 떠밀어 벼랑 끝으로 내 모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요. 가정에서도 가족들 간에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한 일들이 사실은 무엇 보다도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성령의 감동에 따르지 않는 것에 그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내가 늘 상 머무는 곳에서 나사렛사람의 눈으로 사람들, 그리고 그 관계를 본다면 올 해에도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기적도 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즉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고백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목수이신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성령의 인도함을 요청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올 한 해, 혹시에서 역시로 끝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늘 상 가까이 하는 사람의 존귀함을 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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