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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말씀하실 때 둘을 들었다(2012.01.15,민영진 목사님)

하늘기차 | 2012.01.15 17:53 | 조회 2804


하나를 말씀하실 때 둘을 들었다

시 62:5-12; 욘 3:1-5,10; 고전 7:29-31; 막 1:14-20

1월 6일 금요일은 전 세계의 교회가 교회력에 따라서 주현절(主顯節)을 지켰습니다. 성탄(聖誕) 이후 12일 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주현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확연히 나타내신 그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주현절후 둘째 주일입니다.

주현절(主顯節) 이후 2월 말까지 이르는, 여덟 주간을 교회력에서는 주현절후(主顯節後)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주(主), 나타날 현(顯), 마디 절(節)의 “주현절(主顯節)”이란 영어의 “이피퍼니”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사실, “이피퍼니”(epiphany)도 본래 영어가 아니라 그리스어 “에피파네이아”(epiphaneia)의 번역입니다.“이피퍼니”는 달리 “테오파니”(theophany)라고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어 “테오파네이아”(theophaneia)는 “하나님의 현현(顯現)”("vision of God"),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곧 하나님이 이 세상 차원에서 탄생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하나님의 나타나심”(타 테오파니아”, 혹은 “빛의 날”, “큰 빛” 등으로도 부르기도 합니다. 빛이 우리에게 비치어 어둠 속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도 이 “에피파네이아”라는 말 안에 있습니다. “빛의 날”은 그래서 “큰 깨달음의 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현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길게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러한 “에피파네이아” 사건, 즉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온전하게 당신 자신을 다 나타내셨음을 발견하는 큰 깨우침이 있기를 바라서,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우리의 지각(知覺)의 밀착 관계를 먼저 주목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타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새롭게 체험하고, 새롭게 깨닫는 이 기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망상(妄想)이라고 생각하는 경고를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지성을 자처하는 한 작가는 󰡔하나님은 망상󰡕이라고 하는 책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서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망상(妄想)이지만 인간은 망상이 아닌 실재(實在)라고, 하나님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든 신이니까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고, 아니 본래부터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하는 이러한 신념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망상󰡕이라고 하는 번역서 책 표지에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라, 인간의 능력(能力)에 주목하라”는 격문(檄文) 적혀 있기도 합니다.

혈육(血肉)으로 구성된 인간이, 비록 죽고 말 존재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우리 스스로가 보기에는 실체(實體)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우리가 체험하는 경험적 차원에서 그를 묘사하다보니, 그런 하나님은 실체(實體 real/ substance), 혹은 실재(實在 actual being)라기 보다는 망상(妄想 delusion)인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62편 5-12절에서 우리의 시인은 정 반대로 현실을 묘사합니다. 사람을 “입김”과 “속임수”로 비유합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든,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사람은 “입김”이요 “속임수”라고 합니다. 이것에 반해 하나님은 “반석(磐石)”, “구원(救援)”, “요새(要塞)”, “피난처(避難處)”라고 합니다. 인간을 저울로 달면 우리가 한 번 뿜어내는 입김보다 가볍다고 합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시 62:9).
일찍이 이웃 종교에서는 형태를 지닌 만물은 모두 일시적인 모습일 뿐 그 실체는 없다고 하는 깨달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문화에서도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져 옵니다.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이는 것,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뜬 구름은 실체(實體)가 없는 것, 죽고 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29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世上)의 형체(形體)는 사라집니다. (고전 7:29-31)

참으로 난해한 본문입니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생각이 이상해서입니다. 그러나 급히 확인할 것 한 가지는, 마지막 말, “이 세상(世上)의 형체(形體)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여기 “때”는 달력에서 확인하는 연대기적 때가 아닙니다. 한 세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는 종말적인 주관적 시간입니다.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ㅁ것입니다. 결단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곧 오실 종말의 때에, 이제부터는 삶의 가치를 어디 다 두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아내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해야 하고, 울며 사는 사람은 내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울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고, 시장에서 무엇을 산 사람은 안 산 것처럼,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랍니다. 주석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지만 소수 의견 중에서 귀담아 들어 볼 만한 것이 현대의 한 영어 번역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대강의 뜻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CEV 1 Corinthians 7:29-31 (대강의 뜻)
29 성도 여러분, 제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은 이겁니다. 이제 주님께서 곧 오십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30 삶이 고달팠느냐 다복했느냐, 사업이 번창했느냐 쪽박을 찼느냐, 이런 것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31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 못 벌었느냐 ,이런 것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형체는 이제 곧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편 시인의 생각을 보실까요? 시편 62편의 시인은 사람이야 말로 한낱 망상(妄想)이고, 하나님은 영원한 실재(實在)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인간 사회에서 권력(權力)을 이용한 착취(搾取), 늑탈(勒奪), 탐욕(貪慾)을 금하고 있습니다.

약자를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동시에 대상으로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약자를 억압하는 구조적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약자는 그 구조적 억압에 대항하려하기보다는, 정작 자기도 약자이면서 약자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강자 편에 빌붙어서 약자를 억압하는 그 구조적 힘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곧 억압하는 힘의 편에 서서, 자기처럼 영세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얻으려는 억압자의 희망을 함께 나누어 가집니다. 아마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어떤 미끼를 주면서 착취 구조 속에서 그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인은 그런 약자들에게 강자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자기도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하는 그 희망을 가지는 것을 경고합니다. 혹시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자기는 두 가지를 배웠다고 합니다. 하나는 ‘권세(權勢)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권세는 한시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하려면 바로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시 62:10-11 참고)

권력(權力)을 이용한 착취(搾取), 늑탈(勒奪), 탐욕(貪慾)은 창조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파멸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요나서 3장 10절은 “하나님께서 그들[니느위 도성 사람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災殃)을 내리지 않으셨다”(욘 3:10)는 것을 짧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요나서의 저자가 사용한 한 히브리어 낱말을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도성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that they turned from their evil way)을 보시고서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 내리시려 했던 것을 회개하셨다.”(and God repented of the evi)고 하는 진술입니다. 여기 “회개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히브리어 ‘니캄’은, 하나님께서 폭풍(暴風) 속에서 나타나셔서 욥을 꾸짖으실 때, 욥이 하나님을 뵙고 “[제가]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悔改)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사용된 바로 그 히브리어 그대로입니다. 물론 이럴 경우 많은 번역들은 같은 히브리어 동사라 해도 하나님이 주어일 경우에는 “뜻을 돌이키셨다.” “계획을 접으셨다.” 혹은 “유감으로 여기셨다” 좀 심하게는 “후회하셨다” 등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비록 뉴앙스를 달리 하여 번역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회개”하는 경우에 쓴 말과 하나님께서 계획을 수정하실 때 적용한 히브리어가 같은 낱말이라고 하는 것은 황송(惶悚)하기에 앞서 충격적(衝擊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여기에 나오는 두 동사 “(니느웨 사람들이) 돌이키다”와 “(하나님이) 회개하다”의 주어와 동사가 잘못 짝 지워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즉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니까 하나님께서 본래의 계획을 취소하셨다.’로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사본에 그렇게 적힌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제가 요나서 저자의 심정을 잘 이해한 것이라면, 인간의 뉘우침과 악행을 단절하는 실천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게 하는 강조법으로, “하나님이 회개하셨다”는 말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자기는 두 가지를 배웠다고 하는 시편의 시인. ‘권세(權勢)는 하나님의 것’이요, 12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에게서(시 62:11-12)의 고백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나라[통치(統治)]와 권세(權勢)와 영광(榮光)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배운 첫째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한결같다는 것, 이것이 그의 둘째 깨달음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오시고, 유대 율법에 복종하시고, 세상 정치와는 다른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시고, 그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처형당하신 우리 주님, 그분의 오심, 우리와 더불어 사셨던 그분의 삶,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 그분의 다시 사심,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시편 시인이 깨달은 이런 두 가지 각성 곧 권세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과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부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동행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바로 예수를 따랐습니다.(막 1:16-20에서). 예수께 부름을 받은 우리는 지금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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