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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척 하지 않기(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후여섯째주)

하늘기차 | 2012.07.08 16:58 | 조회 2451


죽은 척 하지 않기
2012년 7월 8일(성령강림후여섯째주) 골2:20-3:4

지난 주에 제자가 되는 길, 즉 십자가의 길은 갑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길 위를 묵묵히 그리고 함께 걸어가다 보면 저기 저 쪽에 십자가가 보인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과정이 없는 십자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마지막 말씀이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빌3:8에서
“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
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즉물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가치의 전환, 나의 관행, 관계의 전환,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신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사가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골1:13에 보면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목요일에 김태춘 집사님 댁에 갔었는데, 아직 젖을 때지 않은 고양이 새끼가 6 마리나 있드라구요. 근데 그 고양이는 본래 김영순 장로님 댁에서 키우던 고양이 인데 이사를 가면서 이사 가는 집에서는 키울 수 없어 김태춘 집사님 댁에 보낸 것입니다. 골1:13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이미 옮기었는데 아직도 마음은 여전히 세상의 나라에 묶이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고양이나 개를 가지고는 그 집에 이사 갈 수 없습니다. 물론 갈 수야 있지요. 그러나 그 집의 규모에 맞는 삶을 살기는 힘들 것입니다. 아쉬워도 이제 이 전의 살던 삶의 질서를 버리고 새로운 집에서의 질서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이거 참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번 말씀에서 성경은 그래서 ‘미워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리고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버려야 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밖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까지 합니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소망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에대한 소망이 이 죽음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요? 롬6:5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죽음을 죽으셨나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는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길을 가는 저 끝에 있는 십자가라 했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무어라 기도하였습니까? 눅22:42에 보면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
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응답하며 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죽음에대해 골3:3에서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말이 아리까리 합니다. 우리보고 이미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생명이라 합니다. 근데 그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꼼수인가? 이게 무슨 말일까요? 영적인 내용의 글입니다. 당시 영지 주의자들은 소수의 영적으로 깨달은 자 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생, 영원한 삶이 감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영원한 삶, 아니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는 어디서부터 오나요? 4절 말씀에 보면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이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명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지, 아니면 죽음의 삶을 살 수 있는지의 관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인가요, 바로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그래서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다시 말하면 그 영원한 생명의 지혜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4절 말씀을 보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감추어져 있던 생명의 지혜가, 생명이, 영원한 삶의 지혜가 감추어져 있는데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러니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감추어져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 비밀에대해 계속 말씀하고 있는데 골1:27에서도 역시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생명은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영원한 삶은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영원한 삶의 지혜도 역시 나에게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나입니다. 그러니 감추어져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가 살아있는 한 ‘생명’은 감추어져 있는데, 언제 나타나는가 하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생녕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도 드러나며 부끄럽지만 주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오른다는 것입니다. 또‘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지, 은혜요, 긍휼이요,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영역에서는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놓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요? 2:20에 무어라 말씀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 .’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은 사이입니다. 2:12에서 사도 바울은 거듭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것으로 끝이 아니라 골3:1에 보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받았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어떻다구요, ‘나’라구요, 아니지요, 이 영원한 삶이 ‘나’라구요 아니지요, 이 영원한 삶의 지혜가 ‘나’로부터 온다구요 아니지요. 사도바울은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나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4월23일 ‘핵없는세상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 연대’ 창립 포럼에서 감신대 신익상 교수가 ‘핵과학의 미래를 위한 신학적제언’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하였는데 그 글 중 생명에대한 내용이 너무 좋아 발췌하여 함께 보고자 합니다.
“생명은 불이적(不二的)이다. 불이적이란 살고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는 뜻이다.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말은 그저 같다는 말이 아니다. 서로 한
묶음이라는 뜻이다. 그저 한 묶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가치
있는 한 묶음이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여 영원한 생
명을 가리킨다. 생과 멸, 멸과 생이 함께 순환하여 운동할 때 참된 삶이
가능한 것이다. 잘 살아서 잘 죽고, 잘 죽어서 잘 살린다.”

그러면서 신익상 교수는 우라늄의 핵을 변형시켜 에너지를 얻고 있는 것이 핵에너지인데 우라늄이 변하면 플루토늄이 됩니다. 그런데 이 플루토늄의 반감기, 그러니까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기간이 2만4천년이라 합니다. 그리고 핵에너지에 사용된 우라늄이 다 플루토늄으로 변형되어 더 이상 사용이 될 수 없는 때가 되어도 온도가 높아, 30-40년을 수조 속에 넣어두어야 합니다. 이 프루토늄에서 나오는 방사선 물질은 극독이어서 239백만의 1만 흡입해도 치사량이 된다고 합니다. 보이지도, 맛을 볼 수도, 냄새도 없는 플루토늄입니다. 이 플루토늄을 완전히 없에는데는 24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인간이 플루토늄을 콘크리트에 가두어 두는 인간의 기술은 길어야 5,60년입니다. 그러니 플루토늄을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가두어 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자력발전소를 해체시키는 비용이 환경운동연합의 자료에 의하면 9860억, 거의 1조 가령 든다고 합니다.

이렇게 변형된 플루토늄은 잘 죽지 않습니다. 잘 죽어야 하는데 우라늄에서 변형된 정확히 플루토늄239는 거의 죽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들어내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인간이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익상 교수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며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하며 탄식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죽음의 일을 평화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이 죽지 않고 살려고 온갖 폭력을 자행하는 것에 안타까워 하신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죽으셔서 예루살렘이 모르는, 인류의 도시 물질 과학 문명이 모르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처음자리 생태교실에서 감자케기를 했습니다. 올 해 감자가 맛있어요. 근데 아이들이 감자를 열심히 케는데, 땅에서 무언가 움직여요. 보니까 벌레인데 아이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무슨 곤충인지 알겠더라구요. 근데 옆에서 어느 아이인가 큰소리로 외치드라구요 ‘땅깡아지다!’ 그래요, 땅깡아지였어요. 참 왜 그리 반가운지. 그런데 이놈이 아이들이 막 건드리니까, 어떻게 할까요? 죽은척하는 거예요. 흐, 흐, 흐 근데 왜 죽은 척 할까요? 살려구요. 그 순간을 모면하려구 꽤를 내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어라 하는가 하면 권면이라고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명령하고 있습니다. 무슨 명령을 하고 있나요.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땅강아지는 죽는 척 하면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줄 아나봐요.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 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 하고 사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자기 안에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면서 겉으로는 죽은척하며 산단 말입니다. 그런데 땅강아지가 죽은척하면 아이들이 죽은 척 하는 거 다 알거든요, 하나님도 우리가 죽은 척 하는 거 다 안단 말입니다. 세상도 교회와 성도가 죽지 않고 죽은 척 하면 그거 다 압니다. 죽은 척 하는 사람만 자기가 죽은 척 하면 하나님이 나를 죽은 것으로 알 것이라고 알게 모르게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요. 사도 바울은 이 번 골로새서를 공부할 때 보니까 이렇게 죽은척하는 것을 무어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골2:18에서 그리고 23에서 거짓 겸손, 거짓 경건이라 합니다. 물론 땅강아지가 죽은척 하지 않고 살아 도망가며 이리저리 돌면 아이들에게 붙잡혀 죽게될 수 있지요.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죽는 척 하면 삽니다. 죽어야 하는데 잘 살아갑니다. 죽지않는 것 좀비, 강시, 암세포, 플루토늄 등 안죽는 것은 해롭습니다. 포도주, 된장 야구르트 등은 참 잘 죽은 예입니다. 생명이란 죽음과 삶의 순환입니다. 이렇게 죽은 척 하며 짝퉁으로 살아가면 결국 들통이 납니다.

수요일 골로새 말씀 강해를 준비하면서 이 본문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나는 죽었나, 아니면 살았나? 아! 죽지않고는 하나님의 나라, 뜻에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시작이 되었고,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로 다가가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세운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어떻게 해야 죽는 것인지,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냥 자연적인 죽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잘 못 먹으면 체합니다. 지금 저의 심정이 음식을 먹었는데 목구멍에 걸린 심정입니다. ‘십자가에 못 밖혀 죽’었다는 말씀에 지금 걸려 넘어집니다. 죽지 않고 새파랗게 살아있습니다. 아무 것도 한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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