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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후세째주)

하늘기차 | 2012.06.17 13:47 | 조회 2457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2012년 6월17일(성령강림후세째주) 출33:12-19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들이고 나서, 아버지 이삭이 기력이 쇄하여 의식이 또렷하지 않을 때 팔뚝에 짐승의 털을 감고 에서인양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유프라테스강 갈대아 우르로 도망을 갑니다. 정신없이 형의 칼을 피하여 광야로 나섭니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며 배고픔과 두려움, 그리고 피곤함에 그만 길 바닥에 돌을 베고 쓰러져 잠을 청하였습니다. 한 참 후에 꿈을 꾸었는데, 사다리가 땅에서 하늘 까지 닿아있는데,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여줍니다. 지금 있는 이 땅이 너와 너의 자손의 땅이 될 것이고, 자손들이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켜주며, 약속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 곳에 계시는데 미쳐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며 이 곳이 하나님의 집이며, 이 곳이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읊조립니다. 그리고는 베게로 삼았던 돌을 세워 그 위에 기름을 붓고는 그 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에대한 서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야곱이 왜 두려워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형 에서가 아버지 야곱에게 하소연하였듯이 야곱이 형에게 못할 짓을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팥죽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형에게서 빼앗고, 두 번째로는 사기를 쳐서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빼았는데, 이 모든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하나님이 지금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형에게서 도망 나왔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나온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 보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망의 역사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죄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글자 그대로 거룩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책의 내용을 면면히 살펴 보면 거룩하지 못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 모두 죄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죄의 자리에 하나님이 찿아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찿아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아벨에게, 에서에게 그리고 선한 사람의 이야기로 점철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에 머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도덕이나, 철학,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에게 찿아오시는 하나님에대한 기록입니다. 죄에 메여 죄에 끌려다니는 자유하지 못한, 평화하지 못한 우리에게 찿아와 함께하시는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죄에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의 내용과 달리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32:31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이스라엘이 큰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큰 죄가 무슨 죄인가 하면 ‘금으로 신상을 만’든 죄입니다. 이 말씀에서 느끼는 것은 이스라엘이 신이 아니라 신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종종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 안에 죄가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의 은혜를 입고 기쁨과 감사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책감에 사로잡히거나 붙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책감은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연민 만큼 큰 우상도 없습니다. 돈의 우상 만큼이나 큰 우상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신이 아니라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그 기나긴 여행에 지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눈으로 만족할 만한 것을 세워야만 했을 것입니다.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만족이지요. 그러니 신이 아니라 신상, 즉 허상을 만든 것입니다. 금으로 만든 상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형 아론을 앞세워 진영의 금부치를 모아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절하고 신으로 모십니다. 야웨 하나님이 아니라 이 금송아지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해냈다고 하며 먹고 마시며 축제를 벌입니다. 32:31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까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기도에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마음을 돌이켜 오늘 14절 말씀 처럼 친히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15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함께 가지 않으시면 우리를 떠나 보내지 말라고 간곡히 하나님께 구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느끼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고양되어 역사가 발전된다 할 지라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진보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최고의 문명을 창출해 내는 것 같지만 인류는 점점 더 영적 공허함 속에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왔을 때, 산 아래에서는 금으로 송아지 신을 만들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합니다. 그 상황을 위기로 느낀 것은 모세였습니다. 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로부터 받은 두 개의 돌판을 내 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지 모세가 화가나서 욱하는 심정으로 돌 판을 집어 던졌을까요? 하나님의 말씀, 받은 은혜, 기도, 봉사, 전도, 나눔 등. . . 모든 것이 우상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형 아론에게 출32:21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형님은 그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짓도록 그냥 놓아 두셨습니까?”하고 묻습니다. 모세는 이 우상 숭배를 ‘이렇게 큰 죄’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빠져 나온 이집트도 우상의 온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들어가야할 가나안 땅 역시 우상 천지였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달라 할 때 예배드리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 믿는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을 400년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시켜준 것인데, 이스라엘이 다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강하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그래서 물질과 문명에는 놀라울 만한 업적을 쌓았지만 영적으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문명의 역사가 어떻게 되나요? 이제 기껏 기원전 3000년경에서 4대 문명이 발생했는데 그 이후 이제 한 5,000년이 되었나요. 우주, 지구의 탄생의 역사를 보면 인류 문명은 아주 작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영적 진보는 아직 꿈도 꾸지 못하는 단계가 아닌가 십습니다. 아니 영적 진보라는 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인가 라는 회의도 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 영적 진보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까지 나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류가 이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결국 스스로 만든 물질 과학 문명으로 멸망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도 끊임없이 물질 문명을 구가하면서 영적으로 끊임없이 물질 문명의 금송아지 우상에 매여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듭니다.

모세는 그러한 영적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16절에서는 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해야 하는 지를 이야기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
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님
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함께하셔야 주님이 우리를 좋아하시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좋아하고 계시는 것을 느끼십니까? 또 왜 주님이 우리를 세상 사람들 속에서 구별하여 지금이 자리에 불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돌리게 하신 줄 알고 계시는지요? 출애굽기 19:6에 보면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착하였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대하여 정의를 내리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 소동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마지막장을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대장정의 길을 떠나는데 광야길을 가는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에게 어떻게 화답하였나요?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하였는데, 구름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가면 성막과 이스라엘의 모든 진을 거두어 출발하였는데, 그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 까지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불을 밝혀주었다고 합니다. 비록 광야 길이 험하고 고달팠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나안 땅을 향해 한 걸음 씩 나아갔던 것입니다.

언젠가 문정용님하고 이야기 하는 중에 신용복 교수님이 관용이란 말을 싫어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관용, 소위 똘레랑스라는 말을 좋아하였는데 왜 신교수님은 싫어할까 의아해 했습니다. 그 분이 처음에 감옥에 있을 때에는 교도소의 소매치기, 폭력범 등의 범법자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을 대상화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5년동안에 걸쳐 그들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기 시작하니 그들과 화합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화, 즉 화합은 창의성과 다양성, 관용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 관용은 가진자가 없는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요, 가진자들의 논리를 못가진자에게 주입하거나 설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용은 가진자들의 논리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는 그 관용에대한 신용복 교수의 논리를 어느 부분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용이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것이라 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인가 라는 것입니다. 관용, 즉 똘레랑스는 다른 것에대한 존중, 배려, 특히 약자와 소수에대한 존중을 의미하며 프랑스라는 나라가 역사를 통해 얻은 지혜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강자가 약자에대한 배려로 보기에는 관용이라는 말의 개념이 깊고,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에서 관용을 바라 보면, 그 근본에는 불쌍히 여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불쌍한가라는 점에 있어서는 강자니 약자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인류 모두가 다 약자라는 것입니다. 강하다는 것은 허상입니다. 왜 모두 약자일 까요? 왜 모두 관용을 받아야할까요? 시103:13-1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
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
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어, 그 있던 자리마저 알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에대해 티끌이며, 풀과 같다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잠깐 왔다가 가면서 혹자는 권력을, 또 재력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게 겉에 보이는 모습으로 강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생 모두가 가난하며, 약하여 불쌍히 여김, 긍휼이 여김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무엇에대하여 강하지 않고 약할 수 밖에 없을까요? 죄에대하여 우리는 불쌍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주님의 관용과 사랑, 함께하심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4절에 보니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관용입니다. 똘레랑스, 불쌍히여김입니다. 인류는 이 은혜로 지금 살고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똘레랑스, 관용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 이렇게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만나주실 때, ‘너의 죄 다 씻고 와!’하신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요3:16은 주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고 나쁜 것 판단해서 좋은 것을 보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을 듣던 중에 중동의 내전 상태의 나라에서 적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을 고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구나 인간의 악이 끝 없이 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르웨이 우퇴위아 섬 총기 난사 사건에서 범인은 자신의 행위에대해 전혀 죄책감 없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말씀 19절에서 주님은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에게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살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우리 인생 40년과 꼭 맞습니다. 우리 인생의 광야 길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 인류는 죄로인하여 살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하나님의 함께하시는 긍휼과 자비가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요? 두어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작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두부를 팔러 오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여든 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그날도 두부가 가득 담긴 상자를 뒤에 싣고 천천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호르르르르,호르르르" 두부 장수가 왔다는 신호인 호루라기를 힘껏 부는 할아버지의 자전거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만 '꽈당' 하고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두부 상자도 땅 위에 나뒹굴렀습니다. 그때 이광경을 보던 이웃집 아주머니 한분이 달려왔습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아주머니는 재빨리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
할아버지는 '오늘 장사는 망쳤구나' 하는 듯 그만 낙담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오늘도 할아버지의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두부를 사기 위해 달려 나왔는데 두부가 모두 흙투성이가 됐으니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가야 할처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미안해 하며 "오늘은 다른 데서 두부를 사야겠어요. 미안해요"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활짝 웃으며 무슨 소리냐는 듯이 "할아버지 두부 두모만 주세요. 늘 할아버지의 두부만 먹었는데 흙이 조금 묻었다고 해서 다른 두부를 먹을 순 없잖아요"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손을 내저었지만 아주머니는 "흙묻은 곳만 조금 떼어 내고 먹으면 괜찮아요 " 하며 막무가내로 두부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른 아주머니들까지 나와서 흙 묻은 두부를 사려고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관용이고, 배려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바벰바 부족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행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상당히 흥미로운 의식으로 죄를 저지른 사람을 계도한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저지르면 그 부족원을 마을 한가운데에 세우고 모든 부족원이 모여듭니다. 모여든 부족원들은 잘못한 그 부족원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가운데 세워진 부족원이 그동안 베풀었던 선행을 하나씩 말합니다. 그의 건설적인 능력과 선행, 친절한 행위 등이 빠짐없이 열거됩니다.
반면 그에 대한 불만이나 무책임하고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원 전체가 잘못을 저지른 그 부족원의 칭찬거리를 다 찾아내면 의식이 끝나게 되고 즐거운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은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존중이요, 배려요, 관용입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렇게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았을까요?

국립묘지 옆에서 묘지를 찾는 이들에게 꽃다발을 파는 꽃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길거리에서 꽃다발을 팔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거지 노인이었습니다. 꽃가게 아들이 보니 자기 가게에서 판 꽃다발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국립묘지를 돌면서 묘지 앞에 놓여 있는 꽃다발들을 모아 파는 것이었습니다. 자본금 없이 장사하는 분이었습니다. 아들은 분개하여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노인을 고발해요? 그럴 수가 있어요? 남의 산소에 꽃다발을 갖다 파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눈이 많이 온 날이었습니다. 산소를 찾는 이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수입이 없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산소로 가서 뿌려 놓고 왔습니다. 관요이요, 배려요, 존중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함께하십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의 인생의 여정 속에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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