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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012년 5월13일, 스승의 주일)

하늘기차 | 2012.05.20 14:27 | 조회 2355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2012년 5월13일(스승의 주일) 눅5:17-26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던 갈릴리 지역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낙후된 고장이었으며, 불결함과 무지함에서 오는 알 수 없는 병으로, 그리고 사막의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대한 소문이 멀리 퍼져나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에대해 좋은 소식 보다는 부정적인 소식도 많이 전해졌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금식에대해서 무관심하며, 특히 안식일 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며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더 나아가 악마와 손잡고 병을 고친다는 악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예수님에게 찿아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대한 핍박,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 달아야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들의 명칭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성전도, 예배도 드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지역 마다 작은 모임을 만들어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바벨론에서 돌아 온 후에도 이들은 성전과 달리 동네에 회당을 짓고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여 페르시아와 그리이스,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 까지의 혼란의 세월 동안에 이스라엘 정통의 레위 계통이 아닌 사람들이 제사장을 맡게 되었으며,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제사장계통을 인정하지 않고, 일반 평신도로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자신들의 세를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그리고 바벨론에서 돌아와 율법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며 행하도록 권하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연구와 가르침을 넘어 규례와 규칙을 만들어가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배우고, 지키는 법은 십계명인데, 이 십계명은 유대인들에게는 삶의 근원이요, 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하는지를 세부적으로 정하여 규례와 규칙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뜻과 정신은 사라지고 규칙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이르러서는 10계명에대한 규례와 규칙이 모두 603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일상 생활 속에서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그리고 규례를 앞에 놓고 조목조목 보거나 외우지 않고는 그 계명을 지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렘17:21에 보면
“너희가 생명을 잃지 않으려거든, 안식일에는 어떠한 짐도 옮기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짐이 어느 정도인지에대해 규정을 합니다.

무화과 열매를 말린 무게 정도의 음식물, 한 잔의 포도주, 한 모금의 우유, 머리에 부을 수 있는 아주 적은 량의 기름, 눈에 안약을 바를 수 있을 정도의 물, 세금명세서를 기록할 정도의 종이, 두 글자를 적을 정도의 이크, 펜에 사용되는 갈대 등등, 끝이 없는데, 안식일에 양복만드는 사람이 바늘이나 핀을 들면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안식일에 새에게 던지기에 충분한 무게의 돌을 드는 것도 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니 당시 법을 지키는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선함은 이러한 끝 없이 이어지는 규례와 규칙, 세부조항들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생명의 위협이 있을 때 치료가 가능한데, 그것도 환자가 더 악화되지 않을 정도이지 병의 상태를 개선시키는 것은 일이됩니다. 일반 붕대를 환부에 댈 수는 있어도 연고를 바를 수는 없습니다. 통증이 심한 귀에 일반 솜뭉치를 넣을 수는 있어도 치료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규례와 세부 규칙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데 갈릴리 및 온 유대의 모든 마을
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이 둘러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다소 긴장감이 흐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긴장감을 깨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들고 와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께 메고 가지 못하자,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환자를 메달아 예수님에게 매달아 내려뜨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다 보시고는 그 것을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20절에 믿음을 보시고는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다리고나 있었다는듯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다니,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
서할 수 있는가?”하며 이상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과 ‘일어나서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 쉬우냐고 말씀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치워 들고 네 집으로 가거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웠던 침상을 거두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죄와 질병의 고통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의 정서였습니다. 그래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죄에대해 병적일정도로 예민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죄용서가 없이는 이 사람이 결코 병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한 사람이 병에 걸렸다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고, 병이 나았다는 것은 죄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성 모독이라 주장하는 논리는 병 고침을 받은 사람 앞에 무색해 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억압 속에서 하루 하루 먹고살기에 벅찬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구전으로 내려오는 10계명에대한 규례와 세칙을 헤아리고 지킬 겨를이 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 율법 규칙으로 말미암아 원치않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성전에 나아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루살렘은 제사종교를 통해 사람들을 종교 아래 메이게 하고, 하루하루 살기에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죄 짐 까지 지워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종교지배체제를 폭로하고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신체적 고통에 힘들어했던 서민들의 죄의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죄는 바리새인들이 만든 계명의 규례와 규칙을 어긴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환자를 보았을 때, 그 병의 근원이 죄인 줄 알았습니다. 죄가 아주 깊어 몸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이 이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중풍으로 찿아왔습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습니다. 그래서 죄를 죽음의 힘이라고 합니다. 어두움의 힘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인격적인 힘으로 표현할 때 이 죄는 바로 사탄이요, 살인하는자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영적 진리를 이야기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상징과 비유로 풀어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이 바로 사탄입니다.

돈에 인격이 있다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울리기도하고 웃기기도 하고 화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거든요. 심리학에서도 죄나 사탄 영적인 존재에대해 나름대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과학이지요. 합리성이지요. 심리학은 심리학의 가치가 있어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진화론도 마찬가지이지요. 과학이거든요. 그러나 진화론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창조를 풀어 낼 수 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진화론을 무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언어 구조 자체가 틀립니다. 진화론은 진화론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실에대해 검증된 사실에대해 받아들여야지요.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세기는 신앙의 글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이 그러한 죽음, 사탄, 창조에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고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말씀을 과학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 사탄, 어두움, , , 에대해 심리학이 아니라 말씀에대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 도울 수 있지만 뒤섞이면 안되겠지요.

눅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는데 새들이 쪼아 먹습니다. 예수님은 씨앗은 말씀인데, 이 말씀이 마음에 자리 잡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악마가 와서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악마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자리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7:19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해서는 안되는 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대해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나에게 또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맞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 롬7:23절 말씀을 잘 보아야 합니다.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으로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싸우기 시작하면 죄에 포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싸울 일이 생기면 싸우지 말기 바랍니다. 이건 저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 싸우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싸우면 황폐해 지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면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사탄이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싸우려하는 자기 자신에대해 비참하다고 합니다.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사탄의 꾀임에 말려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신에대해 죽음의 몸이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도사도 아니구, 귀신도 아니고, 몸을 입고 있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싸울 때는 싸워야지요. 그래야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화병 말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믿음의 조상들에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담과 카인의 이야기를 통털어서 믿음의 조상들에대한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이라 했나요? 창세기의 주제가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냥 평화인가요. 조상들의 삶의 됨됨이를 보면 제가 싸우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싸우는지 모두 싸움꾼입니다. 집안이 싸움으로 거덜이 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싸움으로 황폐해진 조상들 속에 화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평화가 찿아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에서와 야곱 사이에, 요셉과 10 형제들 사이에 칼부림나는 싸움이 있지만 평화가 찿아옵니다. 은혜입니다. 구원입니다.

마음이 앞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롬7:24은 누가 이 죽을 몸에서 나를 건져 주었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교우여러분! 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구원하여 주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롬7:25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탄식하는 마음에 사탄이 찿아옵니다. 아주 곱상하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마음에 심어놓은 평화, 사랑, 온유, 관용, 용서의 씨앗을 다 먹어치웁니다. 그래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입니다.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는 우리들을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빌4:7입니다. 6,7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
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평화를 지켜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에대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 했습니다. 바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싸움으로 인하여 깊은 죄에 붙들린 나를 죄에서 끌어 내 주십니다.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평화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럴때 평화입니다. 빌4:7에도 보면 하나님의 평화라고 합니다. 나의 평화가 아닙니다. PAX ROMANA, PAX AMERICANA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믿습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를 포함하여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환자의 친구들도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것은 알았지만 죄를 용서하는 것은 몰랐습니다. 교우여러분! 주님은 단지 병을 고치고, 말씀을 전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 24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죄짐, 율법의짐을 지고 살았는데, 그 죄 짐을 덜어주실 분이 오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늘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죄로부터 옵니다. 어떤 죄는 나의 내면 깊숙이 들어있어, 찿지도 끄집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에 매인 우리를 주님은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카인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죄로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찿아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것은 마치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죽은 나사로를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나의 영혼 깊 숙히 숨겨진 죄가 드러나야 합니다. 드러나지 않고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용서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일반 백성들이 율법의 규례와 세부 규칙들 때문에 모두 죄인이 되어 죄 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죄와 관련해서 좋지 않은 것 중의 화나가 죄책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종교는 바로 그 죄책감을 먹으며 기득권을 키운 것입니다. 오직하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종교지도자들을 보고 마귀의 자식들이라 했겠습니까? 죄책감은 자기 연민입니다. 교만, 열등함 이 모든 것이 자기 연민이지요.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의 마음의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재껴야 합니다.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인된 내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와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믿음을 보았다고 합니다. 환자가 아니라 환자들의 이웃입니다. 누군가 예수님에게 데리고 가자고 했겠지요, 그리고 어떻게 데리고 가지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와서 너무 사람이 많아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자고 했을 것입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포함해서 온통 먼지를 뒤집어 썼을 것입니다. 실례를 무릎쓰고 환자를 매달아 예수님에게 내려뜨린 것입니다.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불신의벽을 쌓았다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로막는 벽을 뚫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일반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이 율법이라 한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마치 법처럼 다가와 우리를 질식시키고 좌절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학원에 보내야 하고, 영어 유치원에도 보내고, 그러니 열심히 부부가 힘을 모아 돈을 벌어야 하고, 그래서 좋은 대학, 대기업, 좋은 차, 좋은 아파트, 멋진 결혼, 그리고 생명보험, 연금, 복지. . . 법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자본과 물질의 메카니즘입니다. 생명이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틀 속에서 우리는 죄로 인해 힘들어 하고, 죄의 권세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빠지지 말기 바랍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자기 연민에 붙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 봅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삭케오가 그랬고, 18년 하혈하던 여인이 그랬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주님께 찿아 왔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 취급을 당하면서 까지도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의 장님이 주님을 부르짖어 멀리 가버릴 주님을 돌이켜 세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우리를 가로 막는 벽을 뚫고 우리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내 놓아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총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의 자리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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