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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넘어의, 끝 없는 . . .(2012년 5월13일, 어버이주일)

하늘기차 | 2012.05.13 15:45 | 조회 2244


저 넘어의, 끝 없는 . . .
2012년 5월13일(어버이주일) 엡3:14-19

아주 어릴 적의 기억입니다. 아마 하늘이 정도의 나이 때 인 것 같은데, 제가 살던 곳은 논과 밭 그리고 피라미 붕어 정도의 고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하천이 흐르고, 공장이 있고, 미군 부대도 있었던 기억이 나고, 큰 연못이 있어, 거기서 대나무 우산 살에 실을 묶어 지렁이를 꽤어 아마도 피라미를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강 뚝을 따라 뚝방 길이 끝 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한 눈에 볼 수 있지 않았겠나 십고, 또 학교 뒤에는 철길이 있어 기차가 다녔는데, 학교 끝나고 친구들 하고 못을 가지고 철길로 가서 철로 위에 못을 놓고 기차가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렸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그 기차바퀴에 납작하게 눌려져 튀어나간 못을 찿아 철길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또 4대문 안에 들어와 살 때는, 그러니까 그 시절의 서울은 4대문 안 이었으니까요? 저녁 밥을 먹은 후에 골목골목을 누비며 밤 늦게 까지 별이 반짝이고, 은하수가 보이는 하늘 아래에서 땀 뻘뻘 흘리며 도둑놈 잡기, 다방구 놀이를 하며 뛰어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한 번은 어느 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이 어렸을 때에 땀 뻘뻘흘리며 한 껏, 마음껏 뛰어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고 하면서 자기는 일의 원동력, 삶의 생명력이 그렇게 어릴적 한 없이 뛰어놀던 것에서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맞다, 그렇다고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저도 어릴적에 제가 살던 곳에서 그 넓은 끝없을 것 같은 공간에서 원 없이, 한 없이 놀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어릴적 체험이 아마도 어느 근원의 힘,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의식적으로 느끼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 무한한, 저 넘어의 끝없는 알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있는 것이 그렇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두려움, 어두움으로 다가옵니다. 이 어두움은 우리를 폭력, 이기심, 싸움으로 미움과 분노로 몰아갑니다. 거기에 사탄도 장난을 치지요. 그래서 끝 없이 망가지는 모습들을 봅니다. 자기비하, 끝없는 싸움, 자기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알콜이나, 도박, 컴퓨터 중독증상을 보면 스스로를 깊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인륜이 망가지는 모습들도 볼 수가 있습니다. 최근 스님들이 억대 도박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태연하게, 주변 눈치 살피지 않고 자행됩니다. 이러한 망가진 모습들을 대할 때, 저 넘어의 무한한, 알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 어두움과 두려움을 우리 안에 드러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죄성을 끌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그렇게 끝 없이 파괴하고 무너뜨리며 폭력을 행사하는 내 안에 그 와는 달리 저 끝 없는, 저 너머의 무한한, 우리의 경계를 넘어 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는, 또 다른 한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적 끝 없이 펼쳐진 강뚝길, 밤늦게 까지 땀 뻘뻘 흘리며 여한이 없이 놀던 그 시간들, 바닷가 모래알 같이 많은 별들, 무수히 쏟아지는 별동별, 은하수를 바라보며 그 한 없는, 끝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요즈음 아이들은 그 무한한 절대적 사랑, 한 없는 존재의 근원을 맛 볼 여지가 없는 폐쇄된 시간과 공간에 메여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활 조건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러한 깊은 자기 내면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즉흥적이고, 표피적이고, 영적이기 보다는 물적인, 그러니까 저 넘어의 무한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부터의, 이 것을 영적이라 할까요, 그렇게 영적이기 보다는 물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옛날 가난할 때에는 물질이 귀하여 정신과 영적임, 나눔과 배려가 면면히 흘렀는데, 지금은 물질이 풍요하다 보니 그러한 나눔과 배려의 모습도 사라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용서에대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만달란트 빚진자가 주인에게 찿아가 빚을 탕감해 달라고 애원을 하자,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지 얼마 안있어 그 종이 길에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자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하자 빚진 친구가 조금만 기다려 주면 자기가 곧 갚겠다고 선처를 구랍니다. 그러나 이 탕감받은 종은 자기의 동료를 고발하여 감옥에 가둡니다. 이 사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다른 종들이 주인에게 찿아가 사실을 다 이야기 합니다. 주인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탕감받은 종을 불러오게 하여 너는 그렇게 큰 빚을 탕감받았는데도, 그 작은 빚 하나 용서해 주지 못한다고 하면서 빚을 다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둡니다.

여기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00데나리온이면 500만원 정도이니 그런데로 여유가 생기면 값을 수 있는 금액인데, 그러나 달란트는 건강한 청년이 20년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라 합니다. 연봉이 3천만원이라 한다면, 1달란트는 60억이지요, 그러니 1만달란트면 60조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값기에는 불가능한 빚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용서 빚 값음, 사랑은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말씀한 것입니다. 왜 사랑이 무한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의 욕망,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끝없는 욕망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욕망을 멈추게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 추구했던 이기적 욕망은 십자가를 통해 그 욕망의 허상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허상이 드러나면 그 욕망은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욕망과 허상은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넘어의, 무한한, 끝 없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서부터 두려움과 어두움이 아니라 무한한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이 불행한 것은 그런 끝 없는, 공간과 시간, 하늘의 별 등 자연을 통해 바라보는 무한함의 아련한 느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어디에서 맛 볼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5월17일이 권정생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5주기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몽실언니’가 100만부가 팔려서 그 기념으로 새로운 판을 냈다고 합니다. 이야기 줄거리를 다 잃어버려서 인터넷으로 그 줄거리를 추려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일본에서 돌아온 몽실의 아버지는 가난한 삶을 꾸려 나갑니다. 몽실의 어머니는 먹고살기 위해 몽실을 데리고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는데, 새 아버지는 동생이 태어나자 몽실을 모질게 대해 결국 몽실은 절름발이가 된 채로 홀로 친아버지에게 돌아와, 새어머니 북촌댁에게 어렵게 마음을 연 몽실은 배가 고파도 잠시 따뜻한 시간을 보내지만, 아버지가 전쟁터로 끌려간 뒤 새어머니는 동생 난남이를 낳고 죽는다. 전쟁으로 더욱 살기 어려운 시기에 몽실은 난남을 맡아 키우며 온갖 시련을 겪는다. 전쟁이 끝나고 몸이 상해 돌아온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위해 몽실은 구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친어머니도 새아버지와 사이에서 낳은 영득과 영순을 남기고 병으로 죽고, 친아버지 역시 앓기만 하다 생을 마칩니다. 이제 몽실의 피붙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다른 세 동생들 뿐입니다. 몽실이는 영득, 영순과도 헤어지고 난남이마저 부잣집 양딸로 들어가면서 홀로 남는데, 삼십 년이 지난 뒤, 몽실은 꼽추 남편과 결혼해 아이 둘과 살고 있습니다. 영득, 영순, 난남이와 함께 지나온 날들을 되짚어 보며 몽실은 계속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저 넘어의 아련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내는 몽실이입니다.

그런데 첫 출판한 몽실언니의 그림을 판화가 이철수님이 그렸는데, 이 번 새로운 판에도 이철수님이 새롭게 판화를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철수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전쟁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하지만 그 비인간의 전쟁터에서도 ‘인간’으로 견디고 살아남는 아름다운 영혼이 주는 감동은 또 얼마나 큰지, 잘 보여주는 동화책이라고 짧은 단상을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몽실언니' 100주년에대한 이철수 판화가의 짧은 글을 보면서, 장기려 박사님, 류영모 선생님, 김교신 선생님, 이영희선생님,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들이 바로 저 끝, 저 넘어, 저 별들 넘어의,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서 어두움과 두려움을 본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그 은혜, 사랑을 본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이 1989년 남북평화를 위해 어느 누구도 생각해 볼 수 없었던 북한 방문을 한 것도 바로 저 넘어, 저 끝 없는, 우리의 한계 넘어를 볼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남과북을 가로막는 그 모든 것을,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기 저 끝 없는. . . 아니면 저 하늘 끝 먼 우주 하면 추상적이다는 느낌이 드는데, 사실 추상은 아니지요, 너무 멀리 있고, 너무 커서 그렇지 그리고 끝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어서 그렇지 추상이 아니라 실제이거든요.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한계는 그 멀리, 아니면 너무 작은 것에대해 느낄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추상으로 밖에 표현 할 수 없는데 성경은 그 무한함, 그 커다람, 그 능력을 무엇으로 말해주는가 하면 사랑으로 드러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추상적이지만 그 큰, 그 거대한, 그 빠른, 그 무한함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실제인 것입니다. 단지 내가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하지만 우리 육신의 한계로 느끼지 못할 수 밖에 없는 이 실제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우리 밖 저 넘어에 있는 실제를 사랑이라 합니다.

이 말이 먼 말인가 하면 저의 억지같은 표현인데, 사랑이 저 넘어의, 저 끝 없는, 무한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을 담아낸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 넘어에 있는 것이 사랑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어두움이 아니라 그로부터 오는 싸움, 욕망, 거짓, 미움,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 넘어의, 끝없음을 맛 보며 느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의 너비, 사랑의 길이, 높이, 깊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표현해도 여전히 추상적인데 성경은 그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했습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떤지 깨닫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대로 저 넘어를 우리에게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신명기서와 마태복음을 통해 사랑에대해 나누었습니다. 신6:4,5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
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또 마22:39에는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구약의 계명을, 또 예수님의 복은의 말씀을 오늘 읽은 에베소서 3장에서 처럼 이제는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3:17-19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
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
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 우울하게 하며, 길 잃게 하는 것들은 사실 한 순간에 사라질 허구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며, 미워하게 하고, 슬프고, 절망적이게 하는 것들은 사실, 사랑의 결핍입니다. 궁핍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내 안이 차고 넘치면 그러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사실은 허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와 마태복음이 말씀하고 있는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이 바로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인 것이 맞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어두움, 죽음, 미움, 싸움, 욕망, 이기심같은 폭력이 자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요일에 함께 빌립보서를 보고 있는데 빌2:5-11은 저 넘어의, 저 끝 없는, 무한한, 우리의 한계를 넘어 서 있는 곳에서 우리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분에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마도 저 넘어의 것에대해 알 수 없어 나 자신에대하여, 그리고 세상에대하여 두려움과 어두움으로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것도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오신 분을 통해 알 수 없는 것에대해 두려움과 어두움이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1:9-11에서도 사랑에대해 기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
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
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
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또 빌2:15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저 넘어, 끝 없는, 무한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그래서 아련함으로 남아있는 자리에 하나님은 우리를 별 처럼 빛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충만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cbs 기자가 제주도 강정 마을에 가서 마을 분들에게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물어보니까 분노 때문에 정서적으로 황폐해져버린 것, 그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왜 스스로 황폐해질 정도로 매일 매일 분노를 느꼈는가 하면 그동안 너무 많은 조롱과 너무 많은 무시, 너무 많은 모욕을 당해서라고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곳에 서 살고 있지만 주민들의 마음 속 방에는 시름과 분노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이 기도한대로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을 알고, 깨닫고, 맛보고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님에게 또 나를 바라보는 자녀들에게 부끄러운 자식이요, 또한 부모입니다. 그러니 저 넘어의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받아들여 선한 열매들이 내 삶 속에 주렁주렁 열려야 그러한 어두움과 두려움의 것들이 자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각자 앞으로의 미래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것 같습니까? 연금이나 생명, 건강 보험은 잘 들어 두었습니까? 아이들의 미래는 어떠한지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걱정이되는가요? 어두움과 두려움으로 다가오나요? 아니면 신뢰를 바탕으로하는 사랑으로 다가오나요? 아내가, 남편이 사랑으로 다가오는가요? 저 넘어, 저 끝 없는 것에대한 것은 커녕, 우리는 우리의 코 앞에 펼쳐진 당장의 몇 시간 앞의, 아니 몇 초 앞의 시간에 일어날 일을 모르는 우리입니다. 두려움과 어두움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사랑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또 꼭 필요한 것은 저 넘어의 것, 저 끝 넘어의 아련함을 모르는 요즈음 아이들에게 역으로 부모가 아이들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높이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 가정에서 두려움과 어두움의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엄마, 아빠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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