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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들의 부활(2012년 4월15일, 부활절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2.04.15 16:21 | 조회 2225


믿는 사람들의 부활
2012년 4월15일(부활절두번째주일) 롬1:16-17

복음은 믿는자들의 복음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믿지 않고는 기쁜 소식일 수 없습니다.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에게 기쁨이 되어야지 왜 믿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일까 그러면 기쁜 소식이 아니자 않는가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이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작이 그렇고, 복음 자체가 원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이 첫 번 성탄일에 천사들을 통해 목자들에게 전하여 질 때도 그 소식을 들어 보면 눅2:14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합니다. 그냥 평화가 아닙니다. 성탄절에 연말연시와 맞물려서 흥청망청하는 그런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기뻐하신 사람들’이라 합니다. 자기가 기뻐서, 자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평화입니다. 우리 표준 새번역은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편파적이어서, 좀 김이 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서는 기쁜 소식에대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 사람들은 적은 소수의 사람들, 천대받던 목자들과 외국의 박사들과 가축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지기를 구한다는 어머니 마리아, 성령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 아버지 요셉 그리고 성전의 안나와 시므온 정도였습니다. 첫 번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도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한 몇 몇 여자들, 그러니까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 까지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부터 복음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하여 지금 여기 고기리 고기교회에 까지 복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참 신비로운 움직임입니다.

하여간 사도 바울은 가는 곳 마다 이 복음을 전하며 복음의 내용에 대해 명백히 증언하며 변증하며 선포하였는데, 오늘 말씀롬1:16,17 말씀을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
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16절에서 복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쉽게 그냥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 복음이 어떻게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일까요? 17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과 대화할 때 예수님에대해 ‘선하신 선생님’이요 하고 부르자 선한 분은 이 세상에 한 분 밖에 없다며 오직 하나님 만이 선하시다고 하셨습니다.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선하신 분은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롬1:16,17을 찬찬히 살펴 보니 사도 바울은 믿는 사람은 믿음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바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는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능력이요, 그 복음을 믿음으로 살아간다, 즉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복음, 복음 했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뭐 이리 간단해’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2:23,24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를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
혀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역시 온 유럽을 돌며 전한 복음의 내용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행17:32에 보면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도 부활에대해 전하는데, 사람들이 더러는 비웃고, 더러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듣겠다, 그러니까 관심없다는 정도로 반응을 보입니다.

바로 이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에대해 증언을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에대해 듣는데, 이것이 받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특히 철학의 본 고장 아테네에서 복음, 즉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했을 때, 평생을 그 방대한 철학의 개념과 씨름하던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은 너무 낯 설고, 너무 쉽고 단순하였습니다.황당하였습니다. 마치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모두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놋쇄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놓아라, 그리고 백성들에게 전하라, 구리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죽어가던 이스라엘이 놋으로 만든 뱀을 바라본 자는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음입니다. 아주 십지요. 그러나 보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 구조를 이해하려면 아주 복잡합니다. 아마 인간의 육과 혼과 영을 이론적으로 펼쳐보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다 규명을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DNA의 구조로 풀어내기도 하고, 심리학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풀어내며, 사회학, 철학, 문학과 예술,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풀어내지만,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용서의 은혜를 입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의 줄기를 따라가면 참 쉽습니다. 그런데 이 쉬운 길을 쫓지않고, 그러니까 구리뱀을 바라보아야 산다는 이 말씀에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쉬운 은혜가 어려워집니다. 지식과 이성의 논리로 보면 한 없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쉽고 편하고 평화입니다.

하나님에대해서도 철학과 예술과 과학으로 무수히 많은 정의를 내립니다. 또 시대 마다 변하는 사조와 철학의 개념으로 풀어내니 머리가 뽀개집니다. 제일원인이니, 절대정신이니, 초월자니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방패요, 산성이요, 구원의 뿔이라 합니다. 쉽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 자꾸 어렵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 마다 거짓 교사들이 들어가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순전한 복음을 왜곡시키고, 희석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만을 가지고는 무언가 좀 부족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할례도 받고, 금식도 하고, 율법도 좀 더 열심히 지키고, 더 나아가 천사도 믿는 둥 무언가 열심을 낼 수 있어 스스로 무언가를 자신에게 채울 수 있는 것을 강조하고, 믿게하려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대해 사도 바울은 단호히 거부하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십자가와 부활은 너무 단순하고 쉬어 무언가 더해야 하는 듯한 느낌을 쉽게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드러내신, 롬1:16의 말씀처럼 복음 속에 나타낸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5병2어의 기적 이후 찿아 온 유대인들에게 육의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 하니까, 유대인들이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일이 아니라 믿음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기적을 보여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서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또 일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논쟁이 붙은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일을 찿는 모습이 우리 인간, 인류 역사 이래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모두 일에대한 콤플렉스에 걸려있습니다. 유대인들, 성전 종사자들의 일이란 율법과 제사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도 역시 복음 아닌 것에 마음을 향하고 열심을 내고 있지않나 해서 염려가 됩니다. 무슨 긍정의 힘, 품성, 심리, 치유, , , 무수한 성경공부, 제자훈련, 선교, 치유, 회복 프로그램들, 경배와 찬양, , , 바로 유대인들이 주님께 묻는 종교적 일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일에대해 묻자 주님은 믿음에대해 이야기하는데, 유대인들은 다시 일을 해야한다고 바꿉니다. 그러자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에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뒤에 보면 이러한 논쟁을 듣던 제자들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사람들이 어렵게 만듭니다. 아니 쉬운게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쉬워서 받아들이기가 쉬운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이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믿음으로만이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도 이제 꽃들이 한창입니다. 제가 본 꽃들만 해도, 산괘불주머니, 바람꽃, 살구, 산수유, 생강, 봄맞이꽃, 올괘불나무, 암수가 한 나무에서 피는 개암나무, 현호색, 또 얼러지, 진달래, 개나리. . . 꽃다지, 냉이, 노란 수선화 피나물도 꽃 몽우리를 피워 올렸습니다. 정말 아름답게 자기 모습들을 속속들이 드러냅니다. 부활은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모습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 드러낸다는 것은 자기 자존감을 밝히는 것입니다. 진달래가 개나리를 피워내는 것이 아니라, 진달래가 진달래를 피워내는 것입니다. 개나리는 개나리 꽃, 냉이는 냉이 꽃, 빨강, 노랑, 하양, , , 형형 색색으로 피워 온 천지에 조화로움으로 가득합니다. 한 가지 모양, 한 가지 색, 한 가지 향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진달래가 전체 산들에 조화를 일구어내지 않아도 됩니다. 벚꽃이 다른 나무들을 이끌어 주변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그래서 다른 존재도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모습 드러내면 그냥 조화로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의 모습입니다.

고전15:38~41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
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모든 살이 똑같은 살은 아닙니다. 사람의 살도 있고, 짐승의
살도 있고, 새의 살도 있고, 물고기의 살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이 다릅니다. 별마다 영광이 다릅
니다” 자기의 영광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 온 갖 피조물이 다르다는 것은 온 갖 모든 것이 전부 다 자기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은 이 탁월한 자존감, 빛의 영광의 자존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자존의 모습을 부활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인데, 하나님께서 그 영광에 까지 우리를 끌어 올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교우여러분! 부활은 본의아니게 자존감을 잃어버린 피조물들을 일 깨우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총인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의 자존감을 무엇이 빼았아갔습니까? 언제부터 나 아닌 모습으로 습관적으로 세상의 가치와 정보로 프로그래밍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길들여졌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이 우리들의 본래의 생명의 삶을 앗아가나요? 그 정체를 알아야하는데 사람들은 피상적입니다. 행2:23-24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
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습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힘은 죄, 바로 죽음의 힘인 것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 속에서 죽음의 일을 합니다. 폭력, 거짓, 살인, 하나되지 못하게 함, 돈 사랑, 욕망, , ,

지난 1월2일에 낙동강 합천보 기도회를 다녀왔습니다. 첫 느낌은 강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4월 초이면 갈수기인데, 물의 깊이가 평균 2m가 넘고 깊은 곳은 10m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강 하면 생각나는 것은 재 작년 회령포에 갔을 때 보았듯이 11월 차가운 강가였지만 신 발 벗고 물에 들어가니 물과 모래의 찰랑거리는 감촉이 참 좋았습니다. 그게 강이지요. 어릴적 한강 뚝섬 백사장에 가서 두꺼비집 짓고, 모래찜질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 낙동강, 아니 남한의 4대강 전체는 물웅덩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갈수기에는 아이들이 강가 모래사장으로 물놀이를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지금은 강가에 아이들을 보낼 수가 없습니다. 무섭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기리 낙생 저수지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는 것 과 같습니다. 폭력입니다. 4대강 사업이 거짓과 편법과 불법으로 폭력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는 역시 폭력입니다. 그 물웅덩이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산란기가 다가오는데 물고기들이 보통 물이 얕은 수초에 알을 낳는데 물이 얕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또 합천에는 제첩이 유명하였는데, 물이 깊어져 제첩이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이 죽었습니다. 이 죽음의 힘, 지난 고난주간에 폭력으로 고통받는 강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부활의 희망을 고백하였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죽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 주보에 올린 글이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꽃이 하도 예쁘게 피어나기에 그 꽃이 어떻게 피어오르나 그 과정을 보고 싶어,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없드라는 것입니다. 꽃이 내가 보는데 지쳐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 몰래 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은 그렇게 느린 속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빠른 것도 그렇고, 너무 큰 소리,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내가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내가 관여하지 않더라도 거듭 변화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역동적으로 생명력 넘치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듣는 것 만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섭리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를 향한 도우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하고도 분명하게 나의 삶에 관여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의 손 길을 느끼고, 맛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자신의 생각, 일, 불완전한 감각을 내려 놓고 이제는 믿음을 따라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간다면 마치 초고속 카메라가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의 신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처럼 우리 마음이 열려 능히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고, 만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죽음의 힘에 눌려 그 자존감을 상실하였지만, 부활을 믿음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이 세상에 인류 역사, 아니 우주가 창조된 이래 어느 피조물도 한 번도 동일한 적이 없는 유일하게 하나님 처럼 하나인 유일한 자기 모습을 온전히 드러냅시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하며 조화롭습니까? 이 십자가와 부활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믿음으로 고백하여 고전15:20의 말씀 처럼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을 쫓아, 부활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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