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12년 3월18일, 사순절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2.03.18 16:31 | 조회 245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12년 3월18일(사순절네번째주일) 마16:13-20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이적과 기사를 베푼 기간은 아주 짧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일을 하셨는데, 예수님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이 최고의 점을 찍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요, 엘리야요, 예레미야요,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잠시 후 주님이 또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다시 한 번 더 물으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천국 말씀 들으면서 좋기도 하였지만 때로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고개를 갸우뚱 할 때가 적지 않았는데, 이 번에도 역시 제자들은 난감해 하였습니다. 가만히 있어 봐, 예수님이 누구지 뭐하는 사람이지. 왜 우리가 그동안 예수님을 쫓았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하던 생각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대한 남 다른 해석에 이 분은 기존의 랍비들과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칠 때에는 의사분이신가 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죄를 용서하자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고,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는 모습에 ‘이 분이 누구이길래’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그 때 그 어색한 침묵을 깬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마 예수님은 내심 흡족해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17절에서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입으로 시인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당시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그러자 예수님이 요18:34에 기록된 말씀에 보면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
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하고 되 묻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무어라 대답하나요? 35절에 보면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하고 즉답을 피합니다. 말 장난하려다가, 아니 그저 의례적인 심문을 하려다가 덜미가 잡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솔하게 대화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할 때에도 말을 돌리려는 여인에게 핵심을 찔러 질문을 합니다. ‘내 남편을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려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려면 솔작한 대화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때 예수님에게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을 합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내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은 결국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 예언자로 보다가 ‘메시야가 아닌가?’하며 믿음의 자리로 한 발 내 딛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요, 예언자요 한다는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인류에게는 많은 선생과 스승, 지도자, 예언자, 탁월한 철인과 종교 창시자가 있습니다. 그들과 관계하려 할 때 구태여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시다’라고 할 때 그것은 믿음에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 분에게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면서 믿음으로 초청하였고, 그 여인은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주인은 로마의 권력체계 꼭대기에 있는 황제가 그의 주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하는 소요, 민란을 황제를 위하여 잠재워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치안을 잘 유지해야 그의 주인인 황제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즉답을 피하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
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자꾸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그러니까 자꾸 예수가 누구인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지를 거듭 거듭 확인해도 또 오류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교회를, 하나님을, 하나님의 나라를, 성도를,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이 세상의 것으로 폄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지혜없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고 해서 이 세상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품고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로마라는 권력체계에서 살아남아 비록 로마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땅 이지만 가나안의 총독으로 부임해 온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뼈있는 말을 거듭 강조합니다. 두 번이나 말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전쟁과 권모 술수와 폭력으로 다른 상대를 제압하여 차지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나라요, 사랑과 희망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듭 강조하는 말에 정신을 차린 빌라도가 이제 자기입으로 자기 생각을 예수님께 이야기 합니다. 37입니다.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앞에서 묻던 자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라고 묻습니다. 그 때야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
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보면 ‘진리에 속한’이라 합니다. 세상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속되어 있는 백성은 주님의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 말에 안중에도 없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합니다. 진리이신 주님 앞에서 진리에대해 묻는 빌라도의 모습은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인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고, 바로 재판 판결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면 빌라도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했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의 주인은 로마 황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뼛속부터 빌라도는 자신의 주인이 로마의 황제라고 여기며 가르침을 받아 왔을 것입니다. 한 부자 바리새인 청년도 예수님에게 찿아 와서 영생에대해 묻지만 결국 그의 주인인 재물에게 붙들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곧 체포당하기 직전 베다니에 머물 때 한 여인이 찿아와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그 값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더 좋을 것을 하면서 입방아를 찧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잠시 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일촉 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을 압니다. 늘 섬세하게 주인의 뜻을 헤아려 보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그 여인을 칭찬하였습니다.

주인이라 하면 주종관계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왜 나의 주인이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야 하면서 믿긴 믿어도 그건 잘 모르겠어 하며 주종관계에대해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왕이시며, 아버지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주인이신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이라, 친구라 하십니다. 그러니 그냥 주종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교다닐 때 친구중에 신설동에서 제법 큰 한정식집을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외아들이었는데, 그 집에 가서 종종 설렁탕을 먹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가 보면 이 친구가 종업원들 처럼 카운터에서 계산도 하고, 음식 나르는 일도 합니다. 그런데 일반 종업원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다른 종업원은 고용된 직원이지만 이 친구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종업원이 아니라 장차 이 한정식집을 상속 받을 상속인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한정식집을 경영하는지 아들은 조심스럽게 헤아립니다.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늘 살핍니다. 그러나 자유합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성경은 거듭 끊임없이 우리가 상속자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아브라함 처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장님, 뽕나무의 삭개오, 문둥병 고친 사마리아인, 혈루증을 고친 여인. . .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님이라 하십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혹 그렇게 이야기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입으려 해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어 합니다. 그런데 글쓰는 먹과 벼루 곁에 있으면 결국 검은 것을 묻힐수 밖에 없듯이, 교회의 신앙 안에 머물러 있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새벽 이슬에 바지 가랑이 젖듯이, 봅 바람에 눈 녹듯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다면 은혜 안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달 가이드 포스트에 한 신앙인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최영아라는 분인데 ‘노숙인다시서기 진료소’원장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교회를 알게 된 것은 여섯 살 때 거리에서 교회 선생님에게 전도 받고서 부터인데 여름성경학교 내내 새벽기도회 때에도 어린 것이 그 새벽에 눈비비고 일어나 홀로 교회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연극, 찬양,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 좋았고 다니다 말다 하면서 결국 중3 때에 가서야 교회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3이 되었는데, 근데 그 때부터 영적인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정말 자기 어깨를 짓 누르는 고통을 느껴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넌 여기 오면 안돼’라는 내면의 어두운 영의 소리도 듣고 해서 방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성화를 보는 것 조차도 꺼려할 정도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도할 엄두도 나지 않고, 불안, 극심한 불면증, 안면마비, 온갖 약을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할 때 까지 거의 2년을 그렇게 우울증 까지 겹쳐 자살충동 까지 느끼며 살았다고 합니다.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하면서 심신의 황폐함은 더해갔다고 합니다. 단과 학원에 다니며 그나마 공부의 끈은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어렵게 하루 하루를 살아왔는데, 하루는 같은 학원의 소아마비에 걸린 한 학생이 가방을 힘겹게 들고 가느 것을 보고 자신도 그당시 너무 힘들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가방을 들어주었는데, 그 때 그 친구가 고마움에 성경암송카드를 몇 장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그 말씀이 와 닿지를 안터라는 것입니다.

대학입학시험 치는 날이 다가오는데,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불안함, 공황발작 상태 까지 가서 시험당일에는 두려워 숨쉬기 조차도 힘든 지경에 이르러 한 발자국도 못 디딜 정도였는데, 그 때 정말 살기위해 그 성경암송 카드를 집어들었다고 합니다. 그 구절이 사41:10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순간 자기 몸 속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놀라운 평화가 임했고, 그 후 그렇게 짓눌리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의대에 합격했고 그렇게 2년 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증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한 그는 의대 내 선교동아리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하였고, 청량리 밥퍼 사역에도 참여하였는데, 비라도 오면 진흙바닥에 앉아 흙탕 물이
밥에 튀는 것도 모르고 무료급식을 받아 먹던 이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 세상에는 경험의 범주를 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난과 학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구석진 자리에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의사라는 화려한 특권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고 합니다. 은혜입은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다일천사병원, 그리고 쪽방촌의 슈바이쳐라 불리우던 고 선우경식 원장을 도와 요셉의원을 지켰고, 2009년 부터는 서울역에서 ‘노숙인다시서기 진료소’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숙인들은 병원을 찿지 않는다고 합니다. 돈이 없기도 하지만 댕대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라고 합니다. 저마다 사연이 있는데, 엘리트 출신의 노숙인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근데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근본적 요인은 가정의 해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houseless가 아니라 homeless라는 것입니다. 집이 없는게 아니라 의지할 가정이 없어 고립과 고독, 불안감에서 오는 정신적인 황폐함과 자살 충동, 그리고 그에 따르는 신체적 질병에 고통받고 있는데 그나마 자기가 그런 노숙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 2년여를 그런 비슷한 상태에서 보내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자해하여 병우너에 데리고 와서 소독을 하고 봉합하면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자해를 해서 다시 꿰메기가 일 수 인데, 그렇게 죽지 못해 악을 쓰며 살아가지만 그 절망의 심연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헤체가 급속화 되는데,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여있는 삶과, 그 끈이 끈어진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매일 느끼며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디 하나님이 자격증이나, 어느 업적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겠는가 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 노숙인들 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의 고통을 넘어서면 비록 지금의 삶이 보기에 구추하지만 살아있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기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노숙인들을 먹이고 재우는 곳도 제법 있고, 돈을 매일 조금씩 주는 교회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노숙인들의 총체적으로 회복되기는 어렵고, 정말 어마어마한 수고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그들의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분노를 풀어낼 때, 절절한 모성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받아 줄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누군가 대가, 그것도 헤아릴 수 없는 헌신적인 대가의 지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 마을의 경제의 원천인 이천마리나 되는 돼지를 몰살시키며 까지 한 영혼을 구원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 손실을 감당키 힘들어 예수님에게 고향을 떠나 달라고 요청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총체적으로 무너진 한 영혼을 회복시키는 데에는 엄청난 대가 지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혼을 회복시키는 일은 무료급식, 무료진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보람이 있는 일인데 자신이 이 일에 부름을 받아 벼랑 끝에 서있는 노숙인들을 돌 볼 수 있는 것은 청소년시기에 겪었던 영적 실체와의 싸움, 고립, 정신적황폐함, 질병의 고통을 주의 은혜로 극복하였기 때문이라 하면서 그 빚을 갚는 것 이라고 합니다. 최영아 원장님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자신을 품으신 그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최영아님에게 에순임은 단지 선생, 인도자, , , 가 아니라 구원자요, 주인이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의 한 가운데에, 마음 한 가운데에 믿음으로 주인으로 모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1/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32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92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62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50 2005.09.02 16:30
375 [일반] 죽은 척 하지 않기(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후여섯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1 2012.07.08 16:58
374 [일반] 제자가 되는 길(2012년 7월 1일, 성령강림후다섯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3 2012.07.01 14:42
373 [일반] 은혜입은 자(2012년 6월24일, 성령강림후네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23 2012.06.24 15:18
372 [일반]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후세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7 2012.06.17 13:47
371 [일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2012년 6월1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17 2012.06.10 14:30
370 [일반] 가라! 핵 너머 생명의 세상으로(2012년 6월 3일, 환경 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03 2012.06.03 16:44
369 [일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012년 5월13일, 스승의 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55 2012.05.20 14:27
368 [일반] 저 넘어의, 끝 없는 . . .(2012년 5월13일, 어버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4 2012.05.13 15:45
367 [일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2012년 5월 6일, 어린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4037 2012.05.06 14:23
366 [일반] 우리를 품어주시는 평화의 부활(2012년 4월209일, 부활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5 2012.04.29 15:04
365 [일반] 그는 여기 계시지 않소(2012년 4월22일, 부활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80 2012.04.22 15:30
364 [일반] 믿는 사람들의 부활(2012년 4월15일, 부활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23 2012.04.15 16:21
363 [일반] 어린 양으로부터 시작이다(2012년 4월 1일, 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4 2012.04.01 16:49
362 [일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Ⅱ(2012년 3월25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45 2012.03.25 17:08
>> [일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12년 3월18일, 사순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6 2012.03.18 16:31
360 [일반] 핵 없는 세상을 위한 고기교회 예배순서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85 2012.03.11 16:46
359 [일반] 먹어서는 안되는 열매(2012년 3월 4일, 사순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616 2012.03.04 16:54
358 [일반]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2012년 2월26일, 사순절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34 2012.02.28 09:42
357 [일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2012년 2월19일, 산상변모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97 2012.02.19 16:20
356 [일반]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삶(2012년 2월12일, 주현절후여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02 2012.02.12 1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