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2012년 2월26일, 사순절첫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2.02.28 09:42 | 조회 2134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
2012년 2월26일(사순절첫번째주일) 요17:20-26;행16:6-10

예수님께서 곧 체포 당하여, 핍박과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자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 속에 몸을 사리며 위축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가고 없을지라도 염려하지 말 것과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17장을 통해 마지막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과 제자, 그리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18장에서 체포를 당합니다. 복음서 중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기도가 자세하게 기록된 곳은 17장 한 군데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면 곧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할 사람의 기도로서는 너무나 당당하고, 오히려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0은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
을 위해서도 빕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란 제자들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였는데, 지금은 바로 제자들을 통해 세워진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을 위해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간절함은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이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 안에, 아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 안에 그리고 우리 역시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요즈음 수요일에 에베소서 말씀을 강해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가 그리스도에대한 신앙을 말씀하고 있다면, 에베소서는 교회에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아주 중요한 선언,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온 인류, 아니 우주, 역사 속에 창조와 섭리와 경륜 속에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을 엡1:10은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
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단순해집니다. 많은 종교, 철학이, 학문이, 예술이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도를 깨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모이고, 배우고 하는데, 그 모든 것들을 품는 단어는 하나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입니다. 통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요, 통일이란, 단지 획일적인 일렬로 서는 통일, 한 가지로의 하나됨이 아니라, 마치 교향악의 오케스트라 처럼 각기 다른 존재가 자기 존재의 영광을 드러내며 조화하는 하나됨이요, 통일인 것입니다. 온갖 식물, 소나무, 봄에 처음으로 피어오르는 복수초, 봄의 꽃 개나리부터, 온갖 동물들, 곤충들, 무생물에 이르기 까지 모든 우주적 존재가 자기 존재감을 갖고, 그러니까 자기의 존귀함,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스스로의 자존감을 뽐내며 다른 피조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합니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편파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일, 지난 주의 설교 처럼 예루살렘에서 이루신 일로 드러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해 보여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 역사, 피조물이 조화로운 통일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들어와 하는 식의 종교적 틀과 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가 모든 하나님의 권위, 능력을 버리고 보잘것 없는 시골 처녀의 몸에,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 공생애를 사시며 그 마지막에 보여주신 십자가의 죽음 앞에,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지 않을 피조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주도하던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일시키는 것이라 하는데, 엡1:23에 보면 교회가 바로 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물 안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단순히 눈에 보이는 고기 교회니, 목양교회니 하며 좁은 시야로 바라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 하나님의 계획, 뜻, 섭리와 경륜의 차고 넘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주의할 것은 그 충만함이 양적으로, 백과사전식으로의 충만함, 거대한 쇼핑몰의 그 당양한 충만함이 아니라, 무엇이라구요? 우리 수요 성경 강해 멤버들,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구원을 위한, 생명을 위한 충만함, 평화를 위한 충만함, 하나로 통일되는 조화로움의 충만함, 그게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또 그 충만함을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엡2:14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
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셨다고 합니다. 몸으로 하나되지 못하는 것을 허물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러한 발상은 불온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유대인의 의식 속에는, 아니 유대인의 유전자 속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로 그 벽을 허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러한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헐으신 주님의 십자가 신앙을 교회의 비죤으로 전 세계를 향해 열어 제낀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도 바울은 그래서 가는 곳 마다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감옥에 갖히고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하였지만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이야기하였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지금은 그 당시의 유일한 장벽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을 위한 교회의 지체는 누구일까요? 저는 주저하지않고 우리시대의 꿈쟁이 문익환 목사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님은 당시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북한은 우리 어린 시절에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를 할 때면 뿔달린 빨간 도깨비의 나라로 그려지던 갈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문 목사님이 몸으로 그 장벽을 허문 것입니다. 통념적이던 나쁜 상식을 북한 땅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심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이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그 하나됨, 통일을 엡2:14에서 평화라고 합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당시 엄연히 존재했던 흑백의 담을 버스타지 않기 운동 등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허물었습니다. 당시 흑백이 한 버스, 한 식당, 한 교회에서 같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발상이었는데,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I have a dream'하며 꿈을 꾼 것입니다. 이 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오바마 대통령을 통해 선명하게 가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마도 중동의 원유쟁탈전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중동전쟁에대한 종식도 누군가의 평화의 발걸음, 하나됨, 몸으로 담을 허무는 발걸음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전을 찿아보니 사티아는 진리, 정직 및 평등, 개방을 의미하며, 아힘사는 타인에 폭력을 쓰지 않으며, 타파시아는 자발적인 자기 희생을 뜻하는데, 이 세 의미가 합하여 비폭력 무저항의 사티아그라하운동이 전 인도에, 그리고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것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충만함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교회는 어떤 장벽, 어떤 억압, 틀 앞에 서 있는지 보아야합니다. 남과 북의 관계는 아직도 여전히 벽으로 남아있습니다. 또 가장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소위 보수와 진보의 갈등의 벽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입니다. 어떻게 하나됨의 조화로운 통일, 평화가 이루어질까 하고 생각에 잠길 때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이구나 라는 생각입니다. 그 벽을 어떻게 몸으로 허물까, 마치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주님께서, 사도 바울이 허물었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을 때 하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기 전 요15장 포도나무 이야기에서 자신은 포도나무이고, 아버지 하나님은 농부이고, 우리는 가지라며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가 줄기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거듭 무려 머물러 있으라는 이야기를 7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요? 요15:10입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
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비로서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머문다는 것, 은혜 안에 머문다는 것, 그것은 사랑으로 띠 띠우는 것입니다. 근데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그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십자가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에서부터 온 것 처럼, 우리가 사랑의 띠를 띠려면,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한다면, 바로 계명, 말씀을 지키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킴으로 사랑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이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인 동시에 또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가 요15:11에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앞에 엡2:23에서 충만함의 충만이 교회라 하였습니다. 이 기쁨, 그 사랑, 그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주님, 그리고 교우가 하나되어 서로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우주적이며, 초 시간적인 동시에 역사 안에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고, 자신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왔다고 하는 생각, 표현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도저희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를 문제시 하였습니다. 율법과 성전, 그리고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틀에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에대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정법으로, 즉 로마의 법으로는 민심을 소요케하는 죄이고,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릴 수 밖에 없었던 동기는 유대인들의 예수님에대한 질투심, 기득권을 흔드는 것에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면, 십자가형의 그 근거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눈먼 장님의 눈을 뜨게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에대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는 죄인이라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는가 라고 하며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눈을 뜬 당사자는 사람들에게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눈을 떴다는 것이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러자 그럼 그 사람이 너에게 어떻게 했길레 눈을 떴느냐고 묻자, 이 청년은 내가 거듭 이야기 했는데 또 물어 본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제자가 되려고 하느냐고 한 방 날립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율법, 성전, 제사, 그리고 그 모든 유대교를 뒷받침해 주는 모세의 기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하자 예수를 율법의 집행관, 성전을 관리하는 자로서 자신들의 모든 기득권을 다 빼앗아 버릴 자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에수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기적, 율법의 집행, 성전의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능력 행사, 기적, 어떤 신비로움으로 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의 희생,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되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다 비움으로, 결국 생명 까지 다 버림에서 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된 것 같이 우리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 되라고 합니다.

오늘 행16은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지로 서부 아시아와 흑해 연안지역을 정하여, 그 곳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동부 쪽 지중해에 위치해 있는 드로아 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바로 트로이입니다. 트로이에서 사도 바울은 유럽의 마게도니아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를 손짓하며 부르며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게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아시아로 향하던 불타오르는 열정을 끄고 마케도니아로 행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처음에는 유럽에대해 좀 더 여유있게, 천천히 가고자 햇을지도 모릅니다. 유럽은 언어도 다르고, 풍습, 인종 다 다른 곳인데 좀 더 준비해서 가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소아시아 흑해 연안 지역은 늘 마음 속으로 생각해 왔고, 선뜻 부담없이 하시라도 갈 수 있는 곳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에수의 여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사로 감동시킨 것입니다. 사로잡은 것입니다. 아마도 마케도니아의 상황이 살기에 꽤 열악한 그 당시의 상황이 죽을 일들로 가득한 곳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이 아미고서는 살 수 없을 급박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툴툴 털어버리고 생소하고, 낯 선, 그리고 보다 열악한 곳으로 성령의 감동에 따라 발길을 옮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바로 이 자유로움이 잇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될 때 우리는 자유이며 평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 수록 자유롭기 보다는 편협해지고, 얽매입니다. 종교적 틀에 갖혀버립니다. 유대인들이 이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는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안식일 규례와 성전의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유대인의 뜰과 성소로 하나님을 겹겹이 둘러 싸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모세의 기적을 잣대 삼아 신앙을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십자가를 드러내었습니다.

오늘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신앙도 새로워 져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제사, 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종교에 묶여있을 때, 예루살렘의 초대 교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종교행위가 이미 끝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아니 온 인류와 우주, 온갖 피조물을 향한 사랑이 율법과 성전, 양잡아서 피뿌리는 제사, 안식일 지킴과 같은 종교행위에서, 그 기득권, 그러한 종교적 권위를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오순절 다락방에 120명의 소수가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 그러한 유대교에서 돌아 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께서 몸소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주적이며 초 시간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그 뜻을 따라 바로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온 세상의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 바로 평화요, 기쁨의 충만함에서 충만함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교회의 종교적 편협함, 틀을 벗어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리스도 머리되신 충만의 충만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1/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35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93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63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52 2005.09.02 16:30
375 [일반] 죽은 척 하지 않기(2012년 7월 8일, 성령강림후여섯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2 2012.07.08 16:58
374 [일반] 제자가 되는 길(2012년 7월 1일, 성령강림후다섯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3 2012.07.01 14:42
373 [일반] 은혜입은 자(2012년 6월24일, 성령강림후네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23 2012.06.24 15:18
372 [일반]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2012년 6월17일, 성령강림후세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8 2012.06.17 13:47
371 [일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2012년 6월1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18 2012.06.10 14:30
370 [일반] 가라! 핵 너머 생명의 세상으로(2012년 6월 3일, 환경 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04 2012.06.03 16:44
369 [일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012년 5월13일, 스승의 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56 2012.05.20 14:27
368 [일반] 저 넘어의, 끝 없는 . . .(2012년 5월13일, 어버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4 2012.05.13 15:45
367 [일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2012년 5월 6일, 어린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4038 2012.05.06 14:23
366 [일반] 우리를 품어주시는 평화의 부활(2012년 4월209일, 부활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5 2012.04.29 15:04
365 [일반] 그는 여기 계시지 않소(2012년 4월22일, 부활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80 2012.04.22 15:30
364 [일반] 믿는 사람들의 부활(2012년 4월15일, 부활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23 2012.04.15 16:21
363 [일반] 어린 양으로부터 시작이다(2012년 4월 1일, 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4 2012.04.01 16:49
362 [일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Ⅱ(2012년 3월25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47 2012.03.25 17:08
361 [일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12년 3월18일, 사순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6 2012.03.18 16:31
360 [일반] 핵 없는 세상을 위한 고기교회 예배순서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85 2012.03.11 16:46
359 [일반] 먹어서는 안되는 열매(2012년 3월 4일, 사순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617 2012.03.04 16:54
>> [일반] 조화로운 하나됨의 통일(2012년 2월26일, 사순절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35 2012.02.28 09:42
357 [일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2012년 2월19일, 산상변모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97 2012.02.19 16:20
356 [일반]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삶(2012년 2월12일, 주현절후여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03 2012.02.12 1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