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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마음(2012년11월4일, 성령강림후스물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2.11.04 16:51 | 조회 2380


깨끗한 마음
2012년11월4일(성령강림후스물세번째주일) 마5:1-12

전인권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8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구룹 들국화의 보칼이었습니다. 근데 이 사람이 늘 대마초로 교도소를 들락날락하여 가수 생명이 다 끊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 특히 부인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 동안의 환각제 복용을 끊고 다시 제2의 가수 인생을 산다고 하며 T.V에 출연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정말 노래 하나는 잘 해요. 대담 프로였는데, 아쉬운 것은 종교에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중에 정말 신이 살아계시면 자기 앞에 똥을 한 얼마 간격으로 쌓으면 그러면 믿겠다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똥 밖에 없나 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 똥 생각을 떠 올렸습니다. 그래 강아지 똥 이야기이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니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마음이 깨끗한자가 행복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마음이 깨끗할까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있을까요? 하여간 이 말씀은 하나님을 보는 행복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도 ‘우리가 만일 죄가 없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장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다윗은 내가 태어날 때 이미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결국 뱀의 꼬임에 넘어가 범죄하고 죽을 수 밖에 없게 됨을 봅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죽음을 낳습니다. 죄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왜곡되어 있어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자연과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종종 밭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소홀히 해도 밭에는 잡초가 무성합니다. 우리 교회 텃 밭을 보아도 고랑 마다 명찰을 달고 관리를 하는데, 잡초를 이길 제간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사랑과 믿음, 그리고 소망의 씨, 평화와 자유의 씨를 뿌려 싹을 뿌렸는데, 그 마음 밭에 세상의 잡다한 정보와 지식이 들어와 그 좋은 것을 다 덮어 버린 형국이 아닌가 십습니다.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다 어디 갔는지 없고, 잡초만 무성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귀신을 쫓아내어 점치는 사람을 고용한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갖히게 되는데, 힘들어 좌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을 합니다. 그러는 중에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이 뒤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간수장은 죄수들이 모두 달아난 줄을 알고 칼을 빼어들어 자결하려 할 때, 바울이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하고 큰 소리로 외쳐 간수의 생명을 구해줍니다. 저는 이 번에 알게 된 것은 찬양을 하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 전에는 바울과 실라가 처한 옥문 만 열렸는 줄 알았어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본문 행16:25을 자세히 읽어 보니 찬양을 할 때 감옥의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모든 죄수의 수갑과 차꼬가 다 풀렸다는 것입니다. 옥문이 전부 열린 것은 물론이구요. 그래서 간수가 자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죄수들 중에 누구 하나도 탈출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뒤에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에 초청하고, 그리고 그 집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갖혀 있지만 그 마음은 자유합니다. 감옥이 바울을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가둘 수 있어도, 그 마음을 가둘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찬양을 통해 갖힌 곳에서 자유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양을 드릴 때 옥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 초기에 이스라엘은 늘 블레셋에게 시달렸습니다. 특히 골리앗 때문에 이스라엘은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문 걸어 잠그고 전전긍긍할 때 다윗은 골리앗에대해 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모독하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니 주님께서 저들을 모조리 우리에게 넘겨주실 것이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바라 보는 마음의 눈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언덕에서 5천명을 먹이실 때,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 마리에서 12광주리가 남는 풍요를 본 것입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바로의 궁으로 들어왔을 때에, 요셉은 형들을 원수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하나님이 심어놓은 마음의 씨앗을 잘 가꾼 사람들입니다. 이 선한 마음들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한 것이 아니라 롬4:16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왜 그러한 좋은 마음을 잃어버릴까요? 세상의 것에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 될 때, 사울은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뽑혔는데, 앞으로 나오지 않고 짐짝 뒤에 숨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이야기할 때도 이스라엘 지파 중에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다고 하던 사람인데, 그만 겸손의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림의 단초가 언제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과 대치하는 중에 그들의 숫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면서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고 웅덩이나 산 굴에 숨고, 진영을 떠나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사무엘과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가자는 약속을 지켜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드립니다. 그 제사의 변은 이렇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길갈로 내려와서 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할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실수는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말라 하였는데, 가축들을 남겨 놓습니다. 사무엘이 가축의 울음 소리를 듣고 묻자, 하나님께 드리고자 남겨 놓았다고 변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삼15:24에 보면 ‘군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하는데,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처음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러 나갈 때 12 지파를 부르기 위해 소를 잡아 각을 떠서 각 지파에게 보내면서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이와같이 될 것이라는 용기와 기백은 다 사라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자기 연민, 그리고 사람과 상황에대한 것이 사울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세상의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혼탁하게 합니다. 흔들어 놓습니다.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비록 요동치고, 혼란스러워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갈 때 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다가 오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겁에질려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적지않은 시간을 함께 했고, 수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갔다고 합니다.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붙잡아 건지시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풍랑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까지도 덮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감옥 속에서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보지만 베드로는 풍랑을 보는 순간 주님을 보지 못하고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관상 기도를 할 때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분심’이라고 합니다. 오직 가만히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인데, 자꾸 집 생각, 교회 생각, 아이들 생각, 등 오만 잡다한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아무 생각 없이 주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세상은 우리들을 가만히 있게 하지 않습니다. 요동치게 하고, 가정에 심각한 위기가 다가오기도 합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고 해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한 야곱이 가장 두려워하였던 형과의 화해를 말끔하게 처리하고, 이제 개선 장군처럼 가나안으로 들어가 세겜에 이르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사건이 터집니다. 하나 밖에 없는 딸 디나가 세겜 성에 들어갔다가 그 곳 청년에게 성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그 곳 성주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름도 세겜입니다. 야곱은 어찌할 줄을 몰라 전전긍긍합니다. 세겜성의 성주 하몰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야곱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야곱의 아들들이 속임수를 씁니다. 이 속임수에는 야곱이 참피온아닙니까? 그 속임수가 아들들에게서 마지막 까지 이렇게 살아 움직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셈의 성주 하몰과 가해자인 아들 세셈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청혼을 하려면 당신들 쪽의 남성 모두가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꾀를 냅니다. 그런데 세겜성 성주가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디나에게 홀딱 반한 모양입니다. 성주는 성에 들어가 성민들을 설득합니다. 이들이 우리 땅에 들어 와 살면 이들의 가축과 재산들이 다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의식인 할례입니다. 할례를 하면 부자인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정략 결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의 장정들 모두가 할례를 행합니다. 그런데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때에 디나의 둘째, 셋째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남정네들을 모조리 죽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청혼을 한 성주와 그 아들도 모두 처단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다른 아들들은 이 때다 싶어 성읍으로 들어가 그 성의 가축들을 마음껏 약탈을 하였습니다. 옛날 부족 시대의 삶입니다. 기가막히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야곱 부족은 아브라함 이래로 이제 겨우 정착하여 가나안 땅에 빌 붙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화친하며 살아야 할 판인데, 가나안의 주요 성읍인 세겜을 한 마디로 작살을 낸 것입니다. 이러자 야곱이 한 마디 합니다. 창34:30에 보면 이 곳 사람들이 이제 우리를 사귀지 못 할 추한 사람들이라고 하며, 합세하여 우리를 칠 텐데, 우리는 숫자도 적어 이제 몰살당할 수밖에 없구나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어느 곳에 머물러도 그 곳은 온통 적일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 때 야곱이 외칩니다. 35장입니다.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드리자!”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창35:2-3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
하였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려라. 몸을 깨끗
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이제 우리는 이 곳을 떠나서, 베델로 올
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내가 고생할 때에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
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신,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 곳은 형을 속이고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하나님을 만난 거룩한 장소입니다. 야곱 가족은 그동안 자기 집 안 구석에, 자기 몸에 걸치던 모든 우상을 다 가져다가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습니다. 그리고는 세겜을 조심스럽게 떠납니다. 5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사방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을 두려워 떨게 하셨으므로,
아무도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야곱 부족을 진멸하려 들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마음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내 마음을 주관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티벳 불교에는 만다라라는 축제가 있는데, 10일 동안 열리는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몇 백Km를 3보1배를 하면서 축제 장소 까지 가는데, 그러다 보면 골절하기 까지 한답니다. ‘만다라’는 세상을 창조하는 중심 에너지이자 우주의 눈을 의미한다. 이렇게 고행을 하는 것은 우주의 마음을 받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만다라 축제의 절정은 다양한 색의 모래를 뿌려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 내는데, 그 모양이 우주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는 마음을 훈련합니다. 마음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성경은 마음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으라 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아무 힘도, 어떤 고행과 도를 닦는 초인적인 힘이 없더라도, 성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의 마음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합니다.

요14:8-1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
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
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
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흩어지는 마음, 나누이는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길은 처음 만난 하나님, 처음 바라본 주님을 마음 속에 깊이 기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벧엘로 올라가자고 외치는 야곱의 마음입니다. 벧엘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자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한 자리에 주님이 오십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3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데 청교도적인 신앙의 완고한 성직자의 마음과 꾀가 많은 사기꾼의 마음, 그리고 야생동물처럼 제멋대로의 짐승의 모습인데, 이 세가지 모습이 마음 속에서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늘 괴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모르는 4 번째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마음입니다. 이 싸움의 종결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오셔서 마음에 평화가 깃들게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한 곳 깊은 곳에 주님이 역사하며 함께하는 자리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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