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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이루라(2012년 9월23일, 성령강림후열일곱번째주)

하늘기차 | 2012.09.23 14:39 | 조회 2075


구원을 이루라
2012년 9월23일(성령강림후열일곱번째주) 빌2:12-18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찿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하면서 영생에대해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청년은 스스로 의로우며 영생을 얻었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서 율법적인 완벽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결핍이었습니다. 오히려 물질에대해 더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그것도 전부 다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율법을 아무리 온전히 지켜도, 그의 마음을 주장하고 이끄는 것이 물질인 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재산을 전부 없에서라도 이 청년을 구원시키려고 그렇게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심히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합니다. 아마 분위기가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저런 훌륭한 청년이 영생을 얻지 못하면, 우리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까?’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두 번이나 놀라는 모습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인데, 그래서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는데, 사도 바울은 오늘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의 뜻이나, 계획이나, 생각, 또는 노력이나, 협조가 털 끝 만큼이라도 들어간다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구원일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농부가 논에 모내기를 합니다. 모가 햇볕과 비와 바람을 받아 잘 자랍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니 벼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대로 꽂꽂이 서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벼가 영글지를 않아 쭉정이만 있는 것입니다. 속이 들어차지를 않은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농부가 그 해에 게을러 퇴비도, 가물 때 물도 대지 않고, 병충해가 왔는데 그대로 하늘이 다 알아서 한다고, 홍수가 나서 논에 물이 넘치는데 물꼬도 터 주지 않아 농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을 추수 때에 보니 벼는 벼인데 쭉정이만 올라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일하신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뜻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농사 지을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존재 양식과 인간의 존재 양식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할 일이 있고,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그것도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잘 헤아려서, 그러니까 말씀에 의지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합당하게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쭉정이가 아닌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막1:15에서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동안 닫혀있던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어 제낀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이다’, 아니면 ‘벌써 왔다’, 아니면 ‘앞으로 올 것이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나라에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 가지 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들 세대에 완성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역사는 이미 시작이 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주신 것이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펼쳐 나가십니다. 교회란 바로 종말론적인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말씀이 선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가 있고, 성례전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대 전제가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괄호로 묵고 그 앞에 세워질 수 있는 것은 종말론적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그러니까 이미 시작되었지만(작년 이 맘 때, 새하늘 새땅 중창단 공연 중에 참 감동이었던 노래는 역시 ‘이비 시작된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이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우리 고기 교회에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고기 교회’를 향하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13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기뻐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아이들일 수록 잘 웃습니다. 방긋방긋, 까르르르 웃습니다. 애기들과 눈을 맞추면 방긋하고 웃습니다. 애기들은 주변의 사물을 보고도 웃습니다. 기쁨입니다. 기쁨은 내가 무엇을 가지거나, 어떤 주변의 여건이 충족되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생명 자체로부터 올라오는 몸짓입니다. 그러니까 애기들이 잘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생명의 기쁨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날 마다 경이로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 마다 새롭고, 날 마다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가는 것 중에 하나는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보면 내 안에 생명이 꿈틀됩니다. 하나님을 보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능입니다. 기쁨입니다. 그런데 생명에 가장 충실한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보고 기뻐하나요. 습3:17에 보면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
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본다고 합니까? 너를 본다고, 즉 나를,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백성의 어떤 모습을 본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눅15장에서 세 가지 기쁨에대해 말씀하십니다. 잃은 양이 돌아오는 기쁨, 결혼 때 가지고 왔다 잃어버린 은전 한 잎을 다시 찿은 기쁨, 그리고 잃어버린 둘 째 아들이 돌아오는 기쁨에대해 말씀합니다. 이 기쁨 시리즈의 결론은 세 번째 기쁨으로 귀결됩니다. 잃은 아들의 돌라옴입니다. 회복입니다. 이것의 바탕은 구약의 희년의 기쁨입니다. 해방과 자유의 기쁨입니다. ‘희년’ 말 그대로 ‘기쁨의 해’입니다. 무엇이 기쁘다는 것인가요? 너무나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 희년에대해 레위기 27:24이 짧지만 희년을 잘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희년이 되면 그 밭은, 그것을 판 사람 곧 유산으로 받은 그 땅의
본래 소유자에게 돌아간다.”고 합니다.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는 기쁨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첫 말씀 다음에 곧 바로 회당에서 하신 말씀은 눅4:18,19 말씀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
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
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은혜의 해란 바로 희년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기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회복의 기쁨입니다. 교우여러분! 이 기쁨 잃어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엉뚱한 것 들고 와서 행복하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엄마가 집에서 좋은 재료로 맛있는 간식을 정성껏 만들었는데, 엄마한테 때를 써 용돈 받아다가 구멍가게에서 불량과자 사먹는 꼴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헛된 정보와 가치에 들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겠습니까?

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 회복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부부 간에,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화해하고 회복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회자되는 장준하 선생님 사인 규명, 인혁당 사건으로 통곡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일, , , 22명의 젊음의 죽음을 불러 온 쌍룡 자동차의 일들 등 맺힌 것 풀어 자유하게 하는 일, 귀신들린 아이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해 주는 일, 음란한 영, 폭력과 거짓의 영, 술취함의 영, 살인하는 영, 거짓의 영, 중독과 우울함의 어두운 영에 묶여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 바로 기쁨의 일인 것입니다.

그 희년, 하나님 나라, 그 자유함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될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회개하라’하십니다. 지 지난 주 수요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베드로가 외친 첫 마디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여러 가지 것에서 찿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성도들의 자기 정체성은 ‘나는 죄인 입니다’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출발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은혜를 입으면 내면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주님 만난 베드로의 내면에서 자유롭게 생명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아담과 하와과 추방당할 때, 하나님께서 막아버린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서 있던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이 다시 열려 생명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자기 구원을 어떻게 이루라 하는가요? 12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
시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우리가 성경 어디에선가 보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응하여 정말로 이삭을 제단에 묶고 이삭의 목을 따려할 때, 다급해진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말라’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란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스러워하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인 것입니다. 마누라 눈치 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나, 부족의 도움이 되는지 않되는지를 따지지 않고, 자식들의 눈치 보지 않고, 세상의 풍조나, 힘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마음인 것입니다.

교회 논의 벼가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논의 메뚜기가 사람이 오니까 화들짝 놀라며 튑니다. 그런데 튈 때 보니까 다른 잎에 앉자마자 잎 뒤로 슬며시 숨습니다. 두려워 숨는 곳입니다. 살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느낀 것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아! 지혜란 생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마귀는 사람이 와도 숨지 않습니다. 자기가 곤충계에서는 왕이거든요. 그런데 참새라도 오면 사마귀는 밥입니다. 어리석습니다. 두려워 할 줄을 몰라, 사람이 와도 머리 꽂꽂이 세우고 잘 숨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의 잠언, 전도서, 시편 모두를 지혜서라 하는데, 이 내용들이 바로 사느냐, 죽느냐에대한 것입니다. 생명에 관한 글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며, 거두기도 하시는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난님에대한 경외심이야 말로 지혜의 근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생명의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두렵고 떨리지 않으면 열매처럼 보이지만 쭉정이만 달릴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정하지만 농부는 그것이 쭉정이인지 아닌지 알 듯이 하나님도 신앙인지 아닌지 압니다. 그것이 신앙인지 아닌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나요? 예 오늘 말씀에 ‘더욱 더 순종하여서’라고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순종함으로부터 옵니다. 주님의 마음입니다. 스스로 벌거벗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벌거벗어 약하고 연약하며 한계가 있으며, 부족한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스스로의 모습으로 보여주시고 게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순종의 모습입니다. 빌2:8은 그 주님의 모습을 죽기 까지 순종하였다고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두 눈 부릅 뜨고, 스스로 자기가 받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이루는 행위입니다. 부자 청년이 그 재물을 포기 해야, 내가 관계하는 것이 제일로 중요하다는 것 포기해야, 내 가족 만이 제일로 중요하다는 것 포기 해야, 권력과 명예를 포기 해야,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생각을 포기 해야, 쥐 꼬리 만한 의로움, 발톱의
때 만도 못한 자존심, 아무도움 되지 않는 아전인수격인 경험과 식견,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칼을 들이대어 제사를 드려야 구원을 이룹니다. 오늘 말씀17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원래 제사를 드릴 때 구약시대에는 포도주를 부었는데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기쁨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그렇게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것으로 치환하여 자기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바울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15절 말씀에 그리하면 흠이 없고 순결해 진다고 합니다. ‘흠이 없고 순결한’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요? 그렇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치는 양이나 소는 흠이 없고 순결해야 합니다. 결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그런데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멸망할 때 하나님께 드리는 양과 소를 보면 병들고, 이미 폐기처분 될 돈 안되는 늙은 가축을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그렇게 드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구약의 제물과 같은 흠없고 순결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흠이 없고, 순결해 져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부러지고 뒤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즉 순종으로부터 오는 하나님 경외심으로 그 마음이 흠없고 순결해 질 때 15절 끝에서처럼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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