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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아닌 죄인(2012년 9월16일, 성령강림후열여섯번째주)

하늘기차 | 2012.09.16 15:35 | 조회 2022


죄인아닌 죄인
2012년 9월16일(성령강림후열여섯번째주) 눅5:1-11

지난 목요일 청지기 교회에서 녹색교회 모임이 있어 참여했는데, 그 날은 특히 교회 내 지역에서 키운 농산물을 소비하자는 '로컬푸드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지는 착한살림 가게 설립 감사예배도 드렸습니다. 오염된 먹거리들 속에서 건강한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교회 운동인 것입니다. 이 ‘착한산림 가게’를 시작한 목사님께서 이 운동을 왜 시작해야만 하는지에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었습니다. 다 좋았는데, 한 가지 의문이 간 것은 목사님이 발언하는 중에 이 것은 생명운동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길 수 없는 운동이라고 하면서 다른 데 빼앗기지 말자고 하더라구요, 그러나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빼앗길 것도 없고, 뺏을 것도 없지요. 생명운동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무언가 잘 못 된 것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가게는 이미 한살림, 생협 등에서 벌써 시작한 운동이구요, 그래서 그러한 사회의 운동과 이 착한살림 운동과의 차별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그 목사님이 로칼푸드 운동에대한 간절함, 절실함 때문에 그런 좀 과장된 표현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간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서 이러한 좋은 운동을 벌써 시작했고, 힘겹게 헌신적으로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우리 교우들 중에도 건강한 먹거리 운동을 하는데 잘 안되기도 하구요, 그렇습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도우며, 협조하고, 격려하며 함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교회라고 해서 더 낫고, 특별하고, 탁월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예, 그렇지만 그래도 다른게 있지 않을까요? 무엇이 다를까요?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부르고, 모세를 부르고, 사도 바울을 부르고, 지금 이렇게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한 탁월한 스승, 예언자, 엘리야나 모세에 버금가는 지도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 올라 말씀을 마치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한 번 던져 보자고 할 때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잔 뼈가 굵은 갈릴리 바닥에서의 고기잡이 경험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이렇게 한 번에 고기가 많이 잡힌적은 생에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갈릴리 바닷가 그 많은 배들과 어부들 중에 베드로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옆집의, 직장동려들 중에, 아파트 이웃의, 또 학우들 등,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교회로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을 때, 그 부름 앞에 고백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입니다. 어느 법정에서도 나를 죄인이라 하지 않는데,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을 합니다. 이 죄는 윤리적이거나, 실정법을 넘어서 하나님을 떠난 것에대한, 하나님에대해 무관심한체 모르쇄로 살아온 삶에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오는 죄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성경은 그 나이를 80이라 합니다. 물러나서 세상을 관조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는 때가 아닌가 싶은데, 그런데 어느 날 모세는 양을 치는 들판에서 바짝마른 한 가시떨기에 불이 확 붙었는데, 이상한 것은 타지 않고 그대로 불이 붙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상하여 그 타지 않는 불꽃으로 다가갑니다. 그렇습니다. 80의 나이에 모든 것에 무관할 나이에 이상하고 신기하다고 느낄 거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아닌 것 속에서 살았습니다.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 전혀 다른 경험을 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 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신비로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른 것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나 대면하지 못하던 모세가 80년 만에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 합니다. 그 동안의 80년 세월의 모든 것을 다 벗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호화로웠던 왕궁생활, 고독한 광야에서의 생활을 털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 징표로 지팡이를 쥐어줍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향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 성 어거스틴, 마틴 루터, 우리 나라의 월남 이상재 선생님. . .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그리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러했고, 모세는 80년이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물질 우상숭배의 삶에서 하나님 신앙의 삶으로 전환하여서도 오락 가락합니다. 어떻게 죄인이라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은혜입니다. 베드로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상상을 뛰어넘는 그물의 중량감에 놀라 예수님을 다시 바라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게 충격적인 일이 지금은 나타나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그러한 기적은 한 번이면 족하지 않나요? 이렇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이 매일 매 시간 일어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창조 질서, 합리성은 다 깨져 무질서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으면 자기가 죄인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항상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억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값으로 치를 수 없다 보니 너무 귀합니다. 다이아몬드 등 보석류가 비싼 것은 그것이 수가 적어서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귀한 것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과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공기, 물, 흙, 햇볕, 바람, 비, , 지금 이 세상은 그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세상이 되어, 그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오늘날의 많은 질병과, 기후재앙, 그리고 끝 없는 전쟁은 그 귀한, 참으로 귀한 것을, 그래서 사고 팔지 말아야 할 것들을 사고 팔아 존귀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것은 그냥 그대로 거저 값없이 누리며, 즐겨야 하는데 돈에 노예가 되어 전부 돈으로 가치를 메기게 되었고, 그 증상이 전 인류의 위기가 다가올 정도로 심각해 졌습니다.

그냥 가게는 가능한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그냥 나에게 있는 것 내어 누리며 즐기는 자리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사고 팔거나 그래서 이윤이 창출되거나, 주고 받거나, 나의 잉여물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것, 그래서 나에게 있는 것을 그냥 내어놓고 받는 것입니다. 은혜인 것입니다. 옷을 골라 가지고 갈 때 내는 돈은 최소한의 자존심 값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두도 최소한의 가게 유지를 위한 것입니다. 은혜의 공간입니다. 밤토실도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제 인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공공장소는 도서관일 것입니다. 남녀노소, 있거나 없거나, 배우거나 못배우거나, 건강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어느 누구도 그냥 와서 책을 통해 있는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처음자리 생태교실도 작지만 나름대로 잘 지켜내고 있는 처음자리 동산 그대로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는 교실입니다. 보아야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목공방도 사회생활의 생존경쟁에 지친 삶을 나무를 매게로 만들며 놀며 쉬는 공간인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매 달 격 주 토요일 마다 이섭 집사님께서 서양미술사에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줍니다. 너무 이야기가 길어 시간이 훌쩍 넘어가지만 집사님에게 있는 것을 그냥 내어놓는데 우리 같이 미술에 무뢰한 사람에게 넘 좋습니다. 은혜입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내고, 설거지를 합니다. 은혜입니다. 감사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그리고 대원들 자신에게 주신 것을 드러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듣는 사람들로 기쁘게 합니다. 은혜입니다. 그냥 내게 주신 것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으면 스스로 죄인임을 압니다. 은혜입은 사람이 스스로 마음에서 진정으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하나님 백성이지만 유대교의 제사와 율법과 성전이라는 거대한 인위적 종교성의 씨스템에 짓눌려 하나님을 뒤로하고 고기잡이에 자족하며 믿음 없이 살아오다가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셔 지금 자기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왜 중요한가 하면 창2:25에 보면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 자체가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한하고, 힘없고, 가난한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피조물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 방식이지요. 그것이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창3:10-11은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합니다. 2장에서는 벗은 것이 그냥 그대로의 모습인데, 하나님과 다른 존재 양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하나님은 이 유한하고, 힘없는 연약한 존재 양식을 좋다 하셨거든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 있고, 피조물, 특히 인간의 존재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각기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싫어진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하고,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하고, 영원해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좋은 줄로 알게 됩니다. 아니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하고 묻습니다. 3:12에 보면 핑계를 대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유한하고, 약하고, 힘없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무엇에대해 부끄러웠을까요? 누구에대하여? 하나님에게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비해 아담과 하와의 존재 양식은 너무나 초라했던 것입니다. 전에는 부끄러운 줄 몰랐는데 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뱀이 유혹을 하였습니다. 뭐라고 거짓말을 했는가 하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너희가 그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처럼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지 않아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잘 살 수 있는데, 하나님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부끄러워 스스로를 감춥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를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존적으로 보면, 즉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항상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하며, 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상대방 보다 더 잘 해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사탄의 모범에 익숙해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이러한 치열한 싸움이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함께 누려야할 가치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나누어야할 모든 것들을 나누고 살아야 할텐데 우리 스스로의 존재양식인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면서 문명과 문화의 옷으로 그 부끄러움을 감추며 함께 해야 할 은혜의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 여겨 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카인, 무두셀라 처럼 폭력적이 되어가기 시작하며 폭력을 키우는 지구촌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폭력 아닌 것이 없습니다. 폭력에 찌들고 찢기어 상처 투성이의 삶을 살아갑니다. 평화를 드러내야할 교회도 그 표현양식이 자신도 모르게 적지 않게 폭력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끝 없는 싸움의 삶에서 우리를 돌이킨 분, 벌거벗음의 아름다움과 존귀함, 그리고 선함의 가치를 일깨우신 분이 누구 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그 벌거벗음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죄 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 분입니다. 인류 역사에 단 일회적인 사건이며 깨우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벌거벗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자꾸 우리의 좋은 것을 포기하고 크고, 힘세고, 강한 것만이 좋은 줄 아는 사람들에게 벌거벗은 것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충만함, 아름다움, 온갖 다양한 것들의 향연, 이 모든 것들은 유한에서 오는 아름다움입니다. 하루만 사는 하루살이, 7년의 인고를 땅 속에서 살다가 땅 위로 나와 나무에 붙어 열심히 노래하는 매미. 온갖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의 각색의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사람들끼리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미 벌써부터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니라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으로 서로 인정해주고 나누고, 감싸는 그래서 빌2:15절 말씀처럼 하늘의 별과 같이 살라고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그 벌거벗음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세상 속에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는가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이지요. 은혜 안에서 죄인이면서 죄인 아닌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폭력에 몸 담고 살았지만 주님이 괜찮다고 품어주시며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어야 감사가 입에서 절로 나오고, 스스로 부끄럽게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평화를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유와 사랑, 의로움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동안 부끄러워 프로메테우스처럼 스스로 만들어 입어 잘 맞지 않는 옷은 벗어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은총의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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