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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묵(2012년 8월12일, 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

하늘기차 | 2012.08.19 16:38 | 조회 2177


침 묵
2012년 8월12일(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 창22:1-8

아브라함이 딱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전에 엘리에셀을 통해 아니면 이스마엘로 그 후계자를 삼으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100세에, 정확히 100세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에 더디 일 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본다, 아니면 드린다 할 때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본다는 말이 사실 더 성서적인데, 요즈음 예배가 쑈와 이벤트가 되어 정말 눈을 즐겁게 하는 예배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영적으로 보는 예배가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여간 아브라함은 25년의 기다림의 세월 속에 신앙의 깊은 연륜을 쌓아갑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그 아들과 관련한 아들을 얻을 만한,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된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앞으로 25년 후에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하나님과 함께 약속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리고 기다림의 삶을 살아가겠지요? 어떻게 기다릴까요? 사라처럼 비웃는 자세로 기다릴까요? 아브라함은 한 부족의 족장으로서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 많은 가축과 부족원들 그리고 종들을 거느리고 생활을 하였는데, 외부의 침입이나, 질병, 가축에게 먹일 물과 풀, 가족의 불화, 맹수의 공격, , ,등 많은 문제들을 풀며 숨막히는 세월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긴박한 순간 순간들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약속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될’씨앗을 얻게 됩니다. 이제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부와 가족과 많은 수의 가축들 과 하인들, 간절하게 바라던 자식도 이제 생겼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하루 하루의 생활을 즐겁게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린 이삭의 재롱을 받으며 그는 하루 하루를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며 생활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한창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아들 이삭과 더불어 삶의 기쁨과 즐거움 속에 푹 빠져 감사하며 행복의 나날을 지냅니다. 그런데 이게 왠 뜻밖의 일인가요? 어느날 아브라함은 청천벽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
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교우 여러분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그 명령도 두렵고 떨릴 뿐 아니라, 하나님도 두렵고 떨립니다. 그리고 내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 할 때도 두렵고 떨립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웃들도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온통 두렵고 떨립니다.

오늘 말씀 3절에 보면 ‘지체 하지 않고’라고 합니다. ‘우물쭈물’하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홍해와 이집트 군대 사이에 놓여 있는 것 처럼이 아니라, 선과 죄 사이에서 ‘아하! 나는 곤고한 존재!’라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 일찍 일어나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삭이 제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아침 일찍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길을 떠납니다. 4절에 사흘 길을 걸으니 그 산이 보인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 이 사흘길이 어떻했을까요? 덴마아크의 기독교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사흘길의 침묵을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에서 아브라함의 두려움과 떨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요? 회한과 억울함, 속임수, , , 무수한 생각들이 떠올랐을 텐데, 아들 이삭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아브라함에게 이 3일은 하루가 천년 같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간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 시간은 침묵의 시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이스 신화에 ‘트로이 목마’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이스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배들이 항구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자, 그리이스의 연합군 사령관인 ‘아가멤논’이 자기의 딸을 신에게 바쳐야 배가 항해를 할 수 있고 그래야 집에 돌아 갈 수 있게 된다는 신의 명령을 듣고, 그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의 딸을 제물로 드리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아니 그는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그리이스인들의 안타까움과 경탄 속에 영웅적인 결단과 그에따른 행동을 보여주어, 그리이스를 위기 속에서 구출합니다. 그의 결단은 하늘도 움직이는 영웅적 행위였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다라는 사사는 암몬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에게 서원을 합니다. 승리하고 돌아갈 때 내 집에서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하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선하여 돌아가는 집에서 처음으로 나온 사람은 그의 딸이었습니다. 결국 입다는 딸을 서원대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렇게 자녀를 바치는 이야기는 어느 지역의 신화 속에서나 꼭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영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임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드리라는 말씀이 떨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홀로 그 말씀을 준행합니다.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신앙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중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바쳐야 할 제물은 틀림없이 이삭인데 아브라함은 이삭이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네가 바로 제물이다’라는 ‘두렵고 떨리는’ 이야기를 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충 이야기 하면 되지 무어 그걸 갖고 따지냐고 하겠지만 신앙은 대충이 아닙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처음 약속했던 ‘별과 같이, 모래알 같이’ 자손이 번창하리라는 것을 그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으면서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입니다. 소위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미리 제물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즉 이삭을 죽이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모리아 산에 가는 도중에 다시 내려 온다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즉결로 이삭의 목을 칼로 찌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그것은 명령에는 순종하였지만 약속을 어기는 격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동해야, 어느 상황 까지 가야할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어 장작더미에 올려 놓고 칼로 이삭을 찔렀습니다. 아니 이삭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흉악한 얼굴을 한 아브라함이 날이 시퍼렇게 든 칼로 자신의 목을 따려고 할 때에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
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 까지도 나
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
았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 양 한 마리가 눈에 띠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 명령에 대한 순종.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를 다 행했습니다. 칼을 들고 이삭을 찌르는 순간 까지 아브라함은 첫 언약인 자손의 축복을 믿었을 뿐 아니라, 왜냐하면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 라는 말에서 알 수가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칼을 드리데자 다급해진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고 말을 하는것을 볼 때에 또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도 준행하였습니다. 진정으로 이삭을 칼로 찌르는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두려움과 떨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까요? 만일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찌르기 전에 우연히 덤불에 걸려있는 양을 보고 그것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간 것이며, 그러한 일은 아무런 것도 아닌 우연적인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이 사흘 간의 여행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이 두려움과 떨림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만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고 마을로 돌아왔다면 어떠했을까요? 그의 부인과 부족들이 무어라 했을까요? 야만인, 식인종, 등등 아마도 그는 그 사회에서 매장되거나 추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명령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으로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여러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끝으로 다시 생각해 볼 것은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같이 떠났던 종들은 이 사흘 동안 아브라함에게서 일어났던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사라도 그리고 그의 이웃들도 아브라함의 내면 속에서 일어났던 사흘 동안의 ‘두려움과 떨림’의 믿음의 싸움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 이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사흘 후 아브라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브라함의 집과 이웃의 집들은 처음 아브라함이 집을 떠날 때와 똑같이 평온한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교우여러분! 이 일대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언가요? 그렇습니다. 아들을 드리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를 통해 신앙의 여러 일들을 합니다. 예배, 설교를 통한 은혜, 성경 공부, 헌금, 봉사, 사회 활동, 가정, 직장 생활, 성령의 감동, 모두 하나의 과정입니다. 도구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전 과정을 통해 나아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궁극에 내 아들, 자기를 ‘내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빼 놓고 모든 피조물은 그렇게 자기 생명 내며 살고 있습니다.

나무, 풀, 곤충, 짐승, , , 어느 하나도 자기 내 놓고, 또 다른 것으로부터 받고 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호흡하며 기운을 받아 살아가는 것도 다른 피조물의 자기 생명 내 놓은 것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무탄트라는 책에서 호주의 원주민이 야생 동물을 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동물을 잡아 죽이려 할 때, 동물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선 고맙다는 것, 그리고 나도 죽을 때 너 처럼 다른 피조물에게 나를 내어 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동물을 잡아 요기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생명에대한 경외 존중이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출13:11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면 처음 태어난 것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는데, 왜 그렇게 해야하며, 또한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야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빠져나올 때, 처음 태어남 모든 것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의 기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나를 위해 대신 죽음과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17일이 장준하 선생님의 37주기 추도식이 있었는데, 아직도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나마 우리가 다른 아시아 국가 보다도 이만큼이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정말 많은 사람들의 민주화를 위한 싸움, 희생, 고통을 견디어낸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지 거저 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감사하게 누리고 지켜내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 내가 이렇게 이 자리, 이 시간에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내 혼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내어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그냥..가게에 붙어 있는 나눔에대한 설명서를 보면 ‘기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것, 나에게 있는 것, 아니면 여분의 것을 나눈다는 말인데 좋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인들은 한 번 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것, 나에게 여분의 것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일부를, 더 나아가 내 생명,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내는 것입니다.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 자기 생명을 내어 나눕니다. 교회가 나눈다는 말을 합니다. 무엇을 나누나요, 먹을 것, 옷, 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 그렇게 할 때 ‘낸다’는 말이 맞습니다. 기부가 아니라 내 몸을 내는 것입니다. 궁극에 내 생명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의 먹이 사슬 피라밋의 최 상위에 있다 보니 내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너무 오만해 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그러한 ‘내는 일’을 잘 소통케 해야 하는데,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상 기후도 역시 그러한 인간의 오만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제역,

위대한 침묵 이라는 다큐가 있는데(독일어: Die Große Stille). 필립 그로닝이라는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영화 줄거리는 프랑스 알프스(샤르트뢰즈 산맥) 정상에 있는 그랑 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에 사는 카르투시오회 수사들의 일상생활을 담고 있습니다. 1984년 필립 그로닝은 그랑드샤르트뢰즈 수도원 측에 수사들의 삶을 담은 영화를 찍고 싶다는 제의를 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수도원측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변하고는, 그로부터 16년 후, 필립 그로닝에게 그가 여전히 영화를 찍고 싶은지 여부를 물어본 다음 마침내 영화를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해줍니다. 그러자 그로닝은 오직 혼자서 촬영장비들을 가지고 그랑드샤르트뢰즈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그로닝이 들어와 지낸 2002년 3월 중순부터 시작해서 4개월하고도 보름동안 그랑드샤르트뢰즈 수도원은 외부인의 방문을 거의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로닝은 오직 혼자서만 촬영하고 녹음하였고, 인공조명도 일체 쓰지 않습니다. 그해 12월과 다음해 1월에 추가 촬영을 하였는데, 그로닝은 그랑드샤르트뢰즈 수도원에서 촬영하면서 총 6개월을 보냈으며 그 필름을 개봉하기 전에 편집하느라 다시 2년 5개월의 시간이 소모되었습니다. 영화는 특별히 내레이션이나 음향 효과를 넣지 않고, 단지 수도 생활의 영상과 소리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는 그 다큐를 찍어 세상에 내어놓는 긴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감독이 수도원의 침묵을 찍은 것인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침묵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의 말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끊임없이 벌레, 바람, 비, 교회 종소리, 찬양, 기도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고요히 침묵의 소리가 들립니다.

거기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은 침묵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향하는 사흘간 그 소리에 집중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님도 체포되어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침묵하십니다. 빌라도가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물으셨을 때에도 역시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의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적인 말씀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꼭 기억해야할 것은 세상은 몰라도 성도는,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에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침묵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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