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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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며 들떠 있거나, 좋은 것을 택하거나(주현절후일곱번째주, 2019년 3월 3일)

하늘기차 | 2019.03.03 13:51 | 조회 839


                  염려하며 들떠 있거나, 좋은 것을 택하거나

201933(주현절후일곱번째주)                                            10:38-42;요2:7-11

 오늘 누가복음 본문 마지막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니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염려하거나 들떠있는 이유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들에 마음이 나뉘이니 어느 하나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일은 항상 많습니다. 일의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덜 중요한 것과 더 중요한 것. 꼭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지금 당장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할 일. 이 일이 마땅하고 합당한 일인지.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과 우리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대한 구별과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일이 많으면 염려하고 들뜹니다. 그러나 하나이면 하나입니다. 일들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되어지는 모든 일을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나입니다. 그러니 마음입니다. 삶에는 무엇이 중요한지에대한 가치 체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히 믿음의 가치입니다. 문제는 2, 3 세대 전 만해도 신앙인들에게는 일상이 오직 믿음 하나였습니다. 교회였고, 말씀이었고, 기도였고, 교회 안에서의 친교였고, 봉사와 헌신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나뉘어 하나에대한 사모함이나 갈급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하루가 바쁘고, 피로한데, 거기에 또 교회에서 무엇을 더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듭니다. 아마도 교회와 관련된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일과 차별성은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우리 모두를 피로하게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만큼이면 된다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더 이상 요구하면 짜증이 납니다. 과연 그런가? 그래야 하는가? 그렇게 신앙인가? 믿음은 그만큼인가요?

 갈릴리 바닷가 언덕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시장할 즈음에 52어의 표적을 보이셨는데, 그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다 건너 까지 찿아옵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 까지 오셨습니까?’ 예수님에대한 배려인 것 같지만, 사실은 왜 당신 맘 대로 혼자 가셨습니까? 같이 가야지요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은 우리가 힘써 뜻을 모아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으로 모시려 하는데, 왜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대해 배불렀기 때문이라 합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자,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 합니다. 믿음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늘 일에대해 말하는데, 주님은 일로 가득 찬 세상에 오셔서 믿음을 찿으셨습니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널 구원하였다. 겨자씨 만한 믿음 등. . . 너에게 믿음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찿아 온 이들은 어떤 믿음인가요?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보고 배불러 찿아온 사람들에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이라 합니다.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로 변한 물, 좋은 포도주 사건을 첫 번째 기적이 아니라, 표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11에서 이 표적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이 좋은 것 한 가지 만 택하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요, 은혜요, 말씀이 아닌가 싶은데, 기적은 믿음을 낼 수 없지만 표적은 믿음을 냅니다.

 지난 수요일 요한복음 강해 중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표징을 보여, 시들어가는 결혼잔치의 흥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대로 하세요하자, 예수님이 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합니다. 일꾼들은 시키니까 마지 못해서 물을 항아리에 채운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호응하여 가득 채웁니다. 주님께서 잔치를 맡은 사람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변화된, 아니, 일꾼들은 그 물이 언제 포도주가 되었는지 몰랐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항아리에 물을 부을 때 변화했는지, 가지고 가는 중에 변화했는지, 연회장이 마시는 중에 변화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회장은 좋은 포도주라고 합니다. 만일 일꾼들이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무슨 물을 채워 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음이 나늬면 믿음이 안됩니다. 포도주가 안되는 것입니다. 또렷하고도 명명백백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단순하고도 순전하게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요, 포도주를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묘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요한은 잔치를 맡은 사람이 물을 맛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이 변한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주로 변한 물을 맛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을 맛 보았는데, 맛은 포도주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요? 물일까요? 포도주일까요? 물인지, 포도주인지 우리 인식의 체계에서는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구원의 은혜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삶 속에 있어야 살 맛이 납니다. 사실 삶 자체가 신비인데, 세상은 그 생명의 신비를 못 보게 합니다. 늘 일이 넘친다고 여기게 합니다. 그러니 염려하며 들떠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흥미로운 기록을 하나 남깁니다. 포도주로 변한 물, 더 좋은 포도주가 어디에서 났는지 잔치를 맡은 이는 알지 못하였지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인가요?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사람들에대해 종이나, 또는 하인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이라 하였습니다. 안니 조베르라는 카톨릭 신학자는 이 일꾼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가 디아코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눅22:27에서 예수님이 곧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 제자들이 누가 더 높은지에대해 서로 경쟁하던 즈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바로 디아코니아’, ‘섬기는 자로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디아코니아로 계십니다. 요한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디아코니아’, 섬기는 자라고 합니다. 요한은 이 말을 통해 유대교에서 새롭게 변화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 즉 변화의 신비를 아는 사람에대해 디아코노이라고 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대하여 음식을 극진히 대접하고자 분주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모습이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한 마디 하는 순간 이 균형은 바로 깨집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예수님에게 아무렇지도 않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근데 마르다는 아무렇습니다. 마리아가 바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에 샘이 나서 동생을 끌어내려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분심이 생긴 것입니다. 마음이 나뉜 것입니다. 마음이 나뉘니 처음에는 하나였는데, 그 순간 일이 많아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할 때 만 해도 얼마나 좋은지. 아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예수님을 대접해야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게 끝 까지 갔으면 아마도 마리아는 마리아 대로, 마르다는 마르다 대로 각자 좋은 것 하나를 택하여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보는 순간 내가 혼자 일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느냐고 하며, 이것은 예수님을 핀잔한 것입니다. 어서 마리아에게 언니를 거들어 주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뉘니 손님접대가 감동이 아니라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한 상 가득한 식사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앞장 22절에서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흗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예고를 하였고, 앞으로의 상황이 그렇게 먹고 마시고 할 여유가 있기 보다는 조금씩 십자가를 향하여 다가가는 정황이었습니다. 그런중에 마르다의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잔잔히 보다 깊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마르다에게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근데 마르다의 마음이 나뉘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접대가 한 순간에 들 떠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마리아의 일도 하나요, 마르다의 일도 하나였는데, 마리아는 하나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마르다는 그 하나를 잃어버리고 일이 되어, 마음이 염려하며 들떠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인가요? 마르다인가요, 마리아인가요? 그런데 마르다 쪽일 경우가 더 많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 때 부터입니다. 참 열심을 다해, 최선을 다해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비방입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고 부엌 어두운 구석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의 자괴감에 빠져, 아마도 세상으로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의 수치감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엌 어두움이야말로 마르다에게는 새로운 은혜, 진정 하나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 어두움이 없다면 우리는 거듭 그렇게 자기 좋은 것, 자기 열심,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정말 좋은 것을 놓치고 평생을 나ㅟ인 마음으로 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나의 결혼잔치에서 표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일꾼들, 니아코노이의 주님 향한 마음 하나에서 일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마음은 하나입니다. 둘도, 셋도 아닙니다. 그런데 누군가 우리에게 들어 와서 마음을 여럿으로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조화로운 한 마음,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교회, 한 은혜, 하나의 믿음 안에 머물기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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