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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나』 인가 ?(주현절 후 네째주, 2019년 2월 3일)

하늘기차 | 2019.02.03 13:15 | 조회 908


                      왜 나는 나인가 ?

201923(주현절 후 네째주)                                                            3:10-15

   연세대연신원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정재현교수는 한 사람 안에 여러 종교가 뒤섞여 있어서 100% 기독교인이라는 자의식은 정확히 허위의식이라고 합니다. 불교가 17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름은 불교이지만 그 껍질을 벗기면 바로 무속신앙인 것을 우리는 어느 절을 가 보아도 금방 알 수가 있는데, 기독교가 불교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름만 기독교인 붕어빵 기독교를 계속 유지하고, 그 기억을 재생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그 때 마다 안정감을 얻으며,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도록 길들여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아 도취를 독실한 신앙으로, 충만한 은혜로 생각하여서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아예 외면해 버린 것은 아닌가 라고 문제제기를 합니다. 종교의 이름에 머물지 말고 더 파고들어 껍데기를 벗겨 참신앙으로, 어찌 보면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철저히 동의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의미가 깊습니다. 니고데모하고 대화를 하는 중에도 니고데모는 당신의 기적을 보니 당신은 하늘에서 왔다고 한껏 부축이지만, 예수님은 그 말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도 모르면서 자꾸 하늘 이야기만 한다고 질책을 하는데, 니고데모는 결국 자기 종교성에 빠져 참 인간되라고 부르는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미국 브라이트 신학대학원의 강남순 교수는 최근 글에서 한국 교회는 여전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프로파 간다, 즉 지극히 정치적 선동의 성격을 띤 구호로 죽음에대한 두려움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사람들을 기독교에, 교회에, 꼭 자기 교회에 소속해야 죽음이 아니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정형화된 구원을 제시하여 교회의 종교적 부속품으로 전락시켰다고 합니다. ‘종교적 부속품이라는 말이 모욕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언어들, 레토릭을 교리적 매뉴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에대해 전혀 성찰함이 없이 습관적인 종교적 프로그램에 함몰되어 살아갑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레토릭, 언어는 제자훈련, 리더, 경배와 찬양, 자매, 형제, 평신도 훈련, 단기선교, 성경통독, , , , 이 무수히 많은 이름들에 교회가, 성도가 함몰되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잘 믿으면 복받는다는 프로파간다를 이제는 바꾸어 봅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피조물과 역사 앞에 십자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자.” 한 때 교회가 막 부흥하며 제자훈련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이끌 리더를 열심히 훈련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리더가 중요하지만 평신도로서의 교인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평신도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 너무 웃기는 것입니다. 평신도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야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되라고 스스로 인자라고 하며 사람이 되었는데, 여전히 종교적 언어 안에, 이름 안에 갖히어 안심하며 살아갑니다.

    강남순 교수는 저 위에서 초월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에 빠져서 이 땅에서의 생생한 삶을 외면하는 기독교는 복음적이지 못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신앙의 온전함은 '하늘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이 구체적인 육체를 지닌 이 땅위의 '인간이 된 존재로서의 예수'라는 혁명적 이해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요한복음을 읽으며 창조의 하나님, 말씀의 하나님이 어떻게 내면화 하여 말씀이 빛의 지혜로 내 안에 거하여 모든 장벽을 허물고 참 인간으로 설 것인가에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때 요1: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14절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서 ‘~ 계셨다‘~ 되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하면서 어떻게 초월적인, 저 위의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의 나약하고, 부족하며 유한한 나의 모습이 되었는가 라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데, 더 나아가 ‘~이다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이 사도 바울의 고전3:16로 넘어 가면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성전이라 하는데, 그것은 지성소의 영광이 우리 연약한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지혜로 함께 한다는 탁월한 비교 불가의 생명의 은혜인 것입니다.

   '자유'의 삶이 아닌 '부자유'의 삶을, '치열성'이 아닌 '상투성'의 삶을 강요하는 종교적 삶은 빌2:12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그리고 요4: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는 주님의 메시지의 의미와 정반대에 서있으며, 일요일마다 세계 곳곳에서 '예수의 종교적 상품화'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 그 안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종교적 부품'으로의 존재방식을 의미로운 삶이라고 착각하고 살게 한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반문합니다. 이름이 문제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 아래, 교회와 성도들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내용의 삶을 살아갑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비예수, 반예수적 삶을 교회가 반복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데, 어디에도 자신의 삶에대해 전혀 성찰함이 없이 습관적인 종교적 프로그램에 함몰되어 살아갑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알리는 장면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알려달라는 모세에게 왜 나는 나라고 하였을까요? 나는 나라고 부를 때, 한 번 해 보시지요. 나는 나, 어떤 가요, 나를 돌아보지 않나요?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나라고 할 때 를 성찰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고대 5천년 전의 신관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탁월한 이름입니다. 하나님도 나는 나, 나도 나는 나입니다. 어떤 나인가요? 모세는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봅니다. 이 떨기는 중동의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짝 말라버린 소목인데 뜨거운 태양에 오래 노출되면 한 순간에 불이 확 붙어 타버리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보잘 것 없는 떨기 나무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것을 봅니다. 모세는 그 타지않는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초라한 모습, 그리고 지금도 바로의 억압에 고통당하는 히브리민족을 본 것입니다. 태양을 상징하는 바로의 불에 다 타서 재가 되어버릴 모세가, 히브리민족이 아무 존재가치가 없는 노예들이(위안부 할머니들이. 416 가족들이,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숙인들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족들이, 친구들에게 외면당하는 아이들이, 성소수자들이, 다민족가족들이)확 하고 타오르는데, 보통 때 같으면 다 타서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릴 가시떨기가 타지 않고 그대로 였습니다. 신비로워 다가서니,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동안 모세는 자기 동포를 구원할 외부의 무언가 힘 있는, 능력있는 존재를 바라며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이 확 타오르는 그 순간, 당신 스스로를 고통하며 신음하는, 탄식하고 부르짖는 그 자리에 구원의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련한 모습으로 히브리민족으로 나는 나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거나, 하나님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질문에 붙잡히어 코가 꿰이는 그러한 부자유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하고 물어서 나타나 우상이 되어버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네가 누구냐?’, ‘네가 무슨 권한으로 이러한 일을 하느냐?’하고 예수님을 추문하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좀처럼 당신이 누구인지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가나의 결혼잔치 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근데 아무도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드러내 밝히지 않으면 우리는 모릅니다. 근데 간음의 문제로 시끄러워진 자리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 . .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밖히실 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는 나아닌가요? 내가 나 아니고 누구인가요? 그러면 내가 나인 것을 누가 알아주나요? 가장 가까운 사람. 그렇지요. 다른 사람은 나를 몰라주어도, 나와 가장 가까운 내 아내, 우리 아빠, 내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나를 알아줍니다. 그렇지 않다구요?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구요? 그래서 속상합니니까?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가족들이, 친구들이, 교회에서, 직장에서 안 알아준다구요? 그런데 내가 나인 것을 사실은 나도 잘 모르지않나요? 그렇지만 염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심으로 내가 나인 것을 드러내 보이신 예수님께서 내가 나인 것을 알아주십니다. 8:28에서 예수님은 내가 나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는가 하면 인자가 높이 올려질 때라고 합니다. 그 때야 비로서 나는 나인 것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어떻게 죽는가 하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다른 죽음, 자연사나, 돌연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는 나는 나가 아닙니다. 욕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나는 나가 되셨고, 우리도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나입니다. ‘내가 나아닌 사람과 어울리면, 나는 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나는 나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죽기 까지 따른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는 그렇게 나는 나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는 나입니다. 한 번 옆을 보시지요. 나는 나라고 한 번 해 보세요. 아내하고 싸우고 나왔으면 집에가서 나는 나세요. 아이들과 얼굴 붉혔으면 아이들과 나는 나해 보세요. 그러려면 주님이 보여주신대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2:20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고기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를 나는 나로 불렀습니다. 그동안 기독교의 이름 아래 너는 너구, 나는 나야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나도 우리 모두 나는 나입니다. 돈에, 땅에, 자식에 눈이 어두우면 나는 나의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왜곡한 선전선동에 휘둘리지 말고, 이름 만 걸어 논 기독교 아래 나란히 줄 서는 성도 되지 말고, 나는 나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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