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두려워하지 말라!(아직도 믿음이,2013년 2월 3일,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하늘기차 | 2013.02.03 16:42 | 조회 2316


두려워하지 말라!
2013년 2월 3일(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막4:35-41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 편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무리를 남겨 두고’라 하는데, 사람들이 다른 배를 타고 따라왔다는 것을 보면 쉴려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배를 덮쳤고, 배에 물이 가득하여,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님은 배 뒷 쪽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쉴 틈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난 파도에 겁 먹은 제자들이 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그러자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깨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하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 졌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셨습니다.

간혹 갈릴리 바다에는 이렇게 광풍이 불기도 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우선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이 강한 바람이 제자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풍랑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여러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잔 뼈가 굵은 뱃사람들 이었지만 지금 불어닥친 풍랑에는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필사적인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한 말씀하셨습니다. 무어라 말씀하셨는가 하면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찬찬히 보면 우선 이 풍랑을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죽게 되었다는데, 예수님은 배 뒷머리에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난리를 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태생적인 모습입니다. 태어날 때 엄마의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오면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생명은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에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좋다,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생명현상입니다. 이 생명이 자라려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은 사랑을 통해 두려움을 뚫고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 두려움인데, 이 두려움에는 두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떠난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것이 이 영적 두려움, 죄의 두려움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을 떠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 두려움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것에서 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사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면서 인류는 이 근원적 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인류는 부단한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시대 마다 사조와 개념과 주의를 만들어 냅니다. 철학과 이념을 만들어냅니다. 이 두려움은 사람들로하여금 함께 이혜하고 나누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기적으로 일을 처리하게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쟁입니다. 싸움입니다. 벽을 쌓아 소통하지 못합니다. 바벨탑입니다. 자기 성, 자기 탐을 쌓고맙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반대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만나면서 찿아오는 두려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 예수님이 바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눅5:6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배의 동료들을 손짓하여 불러 도와 달라 하여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워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 꿇어 엎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동려들, 형제들이 모두 놀랐다고 합니다. 곁에있던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고 합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하십니다.

요즈음은 이러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 만나 정면으로 대하며 자기가 스스로 성령의 감동으로 죄인임을 깨닫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경이로움 말입니다. 이 모습은 지금은 눈이 덮여있지만 잔설에 교회 논 한 쪽에서 노란 몽우리를 틔어올리는 복수초와 같은 황홀함과 경이로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갈 때 도저히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침묵하며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러한 하나님 만나는 경외로움, 경이로움에는, 항상 먼저 초청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 날 때에도 예수님이 초청을 합니다. 깊은데로 가자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 날 때에도 예수님은 초청하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 좀 달라고 하다가, 네 남편 데리고 오라는 개인적인 깊은 이야기에 까지 물흐르듯이 초청을 합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초청합니다. 내가 오늘 너희 집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소유의 절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주구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요즈음 사회 복지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는데, 이렇게 감동으로 스스로를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자꾸 숨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처음부터가 반듯하지 못합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찿아와 유혹할 때 보면 거짓말을 합니다. 이 건 초청이 아니라 꼬드김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미혹한다고 합니다. 미혹하여 혼란시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추락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됩니다. 인류 문명의 한 단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추궁할 때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합니다. 뱀 보다 못한 미물로 추락하고 맙니다. 지금 인류가 그러한 지경으로 가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두려워 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두려움에 익숙해 지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 집니다.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잘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경외함으로부터 오는 자기 존중도 잃어버립니다. 그러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블레셋과 대면하여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군사력을 보면 이스라엘은 3천명이었다고 하는데, 불레셋은 병거가 3만, 기마가 6천, 보병은 바닷가의 모레알처럼 많아 셀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겁이나 바위, 굴에 숨고, 달아나며 무서워 떨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주일에 오겠다던 사무엘은 오지 않지, 군사들은 진영을 벗어나지, 일주일이 되자 사울은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자 마자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왕을 꾸짖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사울이 변명을 합니다. 제사장님은 오지 않고, 블레셋 군은 모여드는데, 블레셋 사람이 길갈로 내려와서 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할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 여러분 이 생각이 말입니다. 이 생각이 가치 중립적입니다." 이 생각, 이 합리성, 이 논리적인 것이 죄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죄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고, 조건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맞지 않으면 항상 이기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평가와 판단을 내립니다. 지금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정확히 판단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아주 약하고 연약합니다. 늘 이야기 하지만 시대의 흐름, 시대정신을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풍조에 떠내려가기 십상입니다. 늘 자기를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하고 예수님에게 뭐라합니다. 죽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것이 집단적인 생각이 되버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독일이 그렇게 집단적인 거짓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을 전쟁의 죽음으로 내 몬 것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죽게될 것 같다는 집단적인 생각에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차마 상상하지 못 할 죽을 일들 해낸 것입니다. 유태인 학살, 생체실험, 정신대 등. . 그런데 요즈음 또 세계 각 곳에서 '죽게 되었다'는 집단적인 생각들이 불쑥 불쑥 솟아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입시생들을 보면 처음에는 그런데로 마음 다짐도 해 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런데, 첫 모의고사 치르고, 중간 고사 보고 조금 성적이 나빠지거나, 아니면 다른 친구들의 성적이 일취월장 하면 처음 먹었던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작은 파도가 큰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쳐 자멸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경우 스스로 그 생각을 키워 그 무게에 짓눌려 주저 않기 십상입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을 가장 두렵게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닥쳐올 때 여러분은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나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또 하나의 문제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아니면 자꾸 사람 찿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가만히 보면 그 배에 예수님이 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피곤하여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에게는 광풍으로 다가와 죽을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주무십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면 마치 깊은 심연과 같습니다. 폭풍, 광풍, 돌풍, 해일이 와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 같은 주님이 지금 같은 배에 타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처럼 평화입니다. 믿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 따라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모세가 바로를 만날 때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이스라엘을 이끌 때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하셨습니다. 후계자가 없어, 아들이 없어 전전 긍긍하는 아브라함에게 찿아와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벌거벗은 태생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영적 두려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수태고지에서 천사가 나타나 아기 이름을 임마누엘 예수라 하라 합니다. 예수의 말 뜻은 구원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함께한다’는 것입 니다. 그러니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늘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은 시23:4에서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
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두려울 때 주님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29/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98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36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13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04 2005.09.02 16:30
415 [일반] 2013년 부활절 남북(북남) 공동기도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5 2013.04.01 15:36
414 [일반] 나는 나다 !(2013년 3월24일, 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30 2013.03.24 13:34
413 [일반]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2013년 3월17일, 사순절 다섯 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8 2013.03.17 14:43
412 [일반] 핵 없는 세상을 위해(2013년 3월10일, 탈핵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3 2013.03.10 14:57
411 [일반] 변화를 받자(2013년 3월 3일, 사순절 세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2 2013.03.03 14:27
410 [일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2013년 2월17일, 사순절 둘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94 2013.02.24 10:51
409 [일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2013년 2월17일, 사순절 첫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2 2013.02.17 15:39
408 [일반]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라(2013년 2월10일,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23 2013.02.10 10:41
>> [일반] 두려워하지 말라!(아직도 믿음이,2013년 2월 3일, 주현절 후 네 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17 2013.02.03 16:42
406 [일반] 주 안에서 빛 Ⅳ(2013년 1월 27일, 주현절후세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13 2013.01.27 15:05
405 [일반] 주 안에서 빛 Ⅲ(2013년 1월 20일, 주현절후둘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73 2013.01.20 10:42
404 [일반] 주 안에서 빛 Ⅱ(2013년 1월 13일, 주현절후 제1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69 2013.01.13 14:53
403 [일반] 주 안에서 빛(2013년 1월 6일, 주현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9 2013.01.06 15:17
402 [일반] 무화과나무 밑에서 (2012년 12월 30일, 성탄후 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2841 2012.12.30 22:16
401 [일반] 우리의 발을 평화의 발로 인도하실 것이다(2012년12월25일, 성탄절) 첨부파일 하늘기차 2214 2012.12.25 14:26
400 [일반] 누구를 위해 오셨나? (2012년 12월 23일, 대강절 네번째 주일) 첨부파일 홍정원 2339 2012.12.24 11:11
399 [일반] 친히 베푸신 은혜 !(2012년12월16일, 대강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7 2012.12.16 13:27
398 [일반] 복이 있나니 (2012년 12월 9일, 대강절 두번째 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2105 2012.12.09 21:08
397 [일반] 진리와 자유 (2012년 12월 2일, 대강절 첫번째 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1983 2012.12.02 20:35
396 [일반]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56 2012.11.30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