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주 안에서 빛 Ⅲ(2013년 1월 20일, 주현절후둘째주)

하늘기차 | 2013.01.20 10:42 | 조회 1972


주 안에서 빛 Ⅲ
2013년 1월 20일(주현절후둘째주) 엡5:8-14

지난 주에 레미제라블 이야기를 하면서 장발장이 자기 삶 속에서, 자기 의식 속에서,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죄수 번호 24601인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장발장은 19년 형기를 다 마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배려해준 교회에서 은촛대를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에게 붙잡히지만 신부님은 장발장을 나의 손님이라 하며 괜찮다고 인정을 해 줍니다. 성도들의 삶의 출발점은 여기부터입니다. 이 은혜에대한 기억이 없다면, 이 은혜를 모른다면 주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내게 이로웠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해롭게 여긴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는데, 사도 바울은 그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모든 삶이 예수를 만나고 바뀌었습니다. 모든 가치, 바울을 지탱하던 관계, 학문, 로마시민권, 종교. . . 예수가 삶의 믿둥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장발장은 19년의 복역이 끝나고, 잘 살아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보았지만, 그는 항상 죄수번호 24601인 가석방의 죄인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서도 이 24601 때문에 어느 한 고장에 머물 수도, 그러니 취직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무너져 가고 있을 때, 한 교회 신부로부터 한 사람으로, 한 인간으로, 한 인격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현장범으로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장발장의 삶의 모든 삶, 즉 언어와 행동, 그리고 직업, 인간 관계는 인정받는 의로움, 자기보다 높은 윗 사람, 훌륭한 교수로부터 재능과 능력을 인정 받는 차원이 아니라, 한 인격, 한 영혼, 전 존재를 품어주는 하늘의 Justification.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장발장은 그렇게 타올랐던 것입니다.

엡4:2에서 사도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에대해 이야기하는데, 겸손은 자전을 찿아 보니, 겸(謙)은 아울러 가진다는 뜻입니다. 둘 이상의 명사 사이에 쓰여, 두 명사가 나타내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겸한다'라는 말 쓰잖아요, 겸상이라는 말도 있고, 그리고 손(遜)은자기를 낮추고, 사양하며 양보하고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겸손이란 자기 비하적인, 또는 맹목적인 굴종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 정체성에대한 자기 인식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자기를 인정해 달라 할 필요 없고, 인정받지 못해 전전긍긍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당함이 어디에서부터 올까요? 그러니까 겸손할 때 겸은 '함께, 같이'라는 의미이니까, 자기 혼자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함께하는데, 그러니 자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겸할 수 없습니다. 다른 타자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양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니, 얼마나 여유롭고, 넉넉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겸손은 자기 돌아보기, 자기 존중함에서부터 오는데, 장발장은 평생 그러한 존중함을 받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겸손한 모습의 대부분 자기 굴종적인 모습일 수가 십상입니다. 그런데 한 교회의 신부님으로부터 죄인임에도, 현장범인데도, 자기를 죄인으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한 사람으로, 아니 귀한 손님으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겸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나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타자가 있다는 것을, 나만 존귀한 것이 아니라, 상대도 생명이 있던, 없던, 모든 피조물에대한 존귀함이 어디에서부터 올 수 있을까요? 겸손은 그래서 우선 타자에대한 자세이기 보다 자기 자신에대하여 반듯해야 합니다. 자기에대한 존귀함, 자존감, 자기 정체에대한 당당함이 없으면, 타자에대해서도 그만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할 수 없습니다. 천박할 수록 이 겸손이 없습니다. 금방 사라집니다.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합니다. 천박하다는 것은 다른 가치, 딴 생각에 사로잡힐 때 그렇게 됩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이러기 십상입니다. 이것은 그래서 자기에대한 자기 경외 자기 들여다 보기인데, 어떻게 자기를 잘 들여다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 경외로부터 옵니다.

나팔꽃이 골목길 그늘 창문 아래 쓰레기통 옆에서 냄새나는 쓰레기들과 함께 같이 지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들 꽃들이 사람들이 저기를 아름답다 하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자기 꽃 피우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겸하여 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타자와 자기를 동등하게 바라보며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존감을 세우기에도 하루 하루가 충만합니다. 다른 타자의 판단을 의식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손(遜)하다는 것이 결코 자기를 비하하는 뜻이 아닙니다. 타자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타자존중의 근본은 어디에서부터 올까요? 창조주,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신 분에게대한 존중, 모든 것의 주인 앞에 모두 동일하다는 것, 각 자 자기 역할이 있다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릎을 꿇을 수 있는가 하면 인위적이거나, 강제적이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려면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고아원이나, 보육원의 아이들이 아무리 시설이 좋고, 환경이 좋더라도 부모의 사랑 만 못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 인정받는 의로움은 사랑의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 그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자베르 경감의 법의 의로움 속에는 이 사랑의 의로움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평생, 아니 조상 적부터 하나님이 모르는 율법과 성전과 제사의 종교에 갇혀서 절벽같은 삶을 살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햇불이 활활 타오르며 사그러들며 할 때, 장발장은 자신의 불꽃을 불살랐습니다. 두 개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의 큰 전통적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 왕으로부터 나오는 왕권의식입니다. 이 전통은 힘과 권력, 부와 국가에대한 이미지입니다.그러나 또 하나의 전통은 예언자적 전통입니다. 부당하며, 부패하며, 거짓되고, 위장된 평화에대해 아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역사서를 보면 왕과 예언자 와의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 첫 갈등은 이방에서 발생했습니다. 바로 바로와 모세의 갈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억압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참담한 노예생활에서부터 구출합니다. 그 전통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신약은 그 마지막 예언자의 전통을 세례 요한 까지로 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해방의 역사도 역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적 전통의 큰 흐름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일부러 평택에 찿아가 철탑 아래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한국 근대사 초유의 사건인 한 회사에서 직장을 잃은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 24명이 넘는 사람들의 죽음에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현실의 어두움에 빛으로 나아가기를 원해서입니다. 그 철탑 아래로 다가간다는 것은 오늘 말씀 12,13 말씀처럼 몰래 하는 일들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쌍룡과 관계하는 거짓을 드러내는 움직임입니다. 14절은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고통당하는 분들의 자유, 해방을 원하는 예언자 전통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에 마땅히 따라야 할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역사와 신앙의 고백은 겸(謙)하고 손(遜)하여 함께 갑니다.

하여간 장발장은 그 혁명의 불꽃 속에서 역사의 한 복판에서 또 하나의 불꽃을 피우며 빛을 냅니다. 어떤 불꽃인가요? 지난 주 롬8:30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여 부르시어 의롭다고 한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화로움으로 나아가는 영적 진화의 지난한 삶의 과정을 저는 Santification, 즉 거룩해짐이라 했습니다. 빛을 낸다는 것은 자기를 산화시키는 것인데, 결국 자기를 태우는 일인데, 어떻게 자기를 태우나 곰곰이 묵상해 보니 장발장이 끊임없이 ‘Who am I?'라고 하면서 자기 정체를 거듭 물으며 자기가 죄수 24601이라는 것 때문에 늘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주님 안에 죄인 이라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합니다. 마차꾼을 구해주던 일, 판틴과의 만남, 코제트, 그리고 그 연인 마리우스, 자기와 원수가된 자베르 경감을 놓아주는 것 등 장발장은 끊임없이 자기가 직면한 상황 속에서 자기가 받은 은혜를 따라 갑니다. 매 순간 자기를 죽음에 내어 놓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갈등, 이 긴장감이 장발장을 불타오르게 합니다. 자기 정체성에대한 물음이 없다면, 자기가 누리는 작은 기득권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이미 고목이요. 죽음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열매, 빛과 관계없는 잎 무성한 겉 화려한 공허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내 모습을 늘 지켜내기 위해서는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내 모습. 은혜 받은 내 모습을 이 시대 속에서 살아내려 한다면 끊임없는 자기 각성이 필요합니다. 자기정체에대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수요일에 누가복음의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2,3주 전 등을 등경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말씀을 읽었는데 11:35절에 가면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고 합니다.

최근 김지하씨가 안타까운 발언을 하여 그분에게 영향을 받고, 그 분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 안의 빛이 어두워진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류영모 선생님이 그랬습니다. 자기 집 오리 한 마리 없어지면 온 동네 방네 소문내며 찿아다니는데, 자기 마음 잃어버리면 잃어버린줄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마음 지키기 위해 성령을 요청합니다. 롬7:24-25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내면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
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탄식을 합니다. 그러면서 롬8장으로 넘어가며 성령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지않고 어떻게 내게 주신 선물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은혜 중에 은혜는 무엇인가요? 기도의 은혜입니다. 빌4;5에 보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빛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오시니 기쁨이 넘칩니다. 그 기쁨으로 6,7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
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
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
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이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기도를 통해, 말씀의 묵상을 통해 내 안에 찿아오신 주님의 빛을 맛 보며, 그 빛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갈 때 우리는 빛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어두움에 붙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의 일을 하고, 빛은 빛의 일을 합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이 어두운지요? 혼돈한지요? 공허한지요? 여러분에게 찿아온 어두움에 시비걸지 말고, 나의 참된 주인이신 주님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빛을 구하십시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움은 물러가고, 여러분에게 감사와 기쁨,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평화가 찿아올 것입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29/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597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36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13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04 2005.09.02 16:30
415 [일반] 2013년 부활절 남북(북남) 공동기도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65 2013.04.01 15:36
414 [일반] 나는 나다 !(2013년 3월24일, 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30 2013.03.24 13:34
413 [일반]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2013년 3월17일, 사순절 다섯 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18 2013.03.17 14:43
412 [일반] 핵 없는 세상을 위해(2013년 3월10일, 탈핵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3 2013.03.10 14:57
411 [일반] 변화를 받자(2013년 3월 3일, 사순절 세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2 2013.03.03 14:27
410 [일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2013년 2월17일, 사순절 둘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94 2013.02.24 10:51
409 [일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2013년 2월17일, 사순절 첫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2 2013.02.17 15:39
408 [일반]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라(2013년 2월10일,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23 2013.02.10 10:41
407 [일반] 두려워하지 말라!(아직도 믿음이,2013년 2월 3일, 주현절 후 네 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16 2013.02.03 16:42
406 [일반] 주 안에서 빛 Ⅳ(2013년 1월 27일, 주현절후세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13 2013.01.27 15:05
>> [일반] 주 안에서 빛 Ⅲ(2013년 1월 20일, 주현절후둘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73 2013.01.20 10:42
404 [일반] 주 안에서 빛 Ⅱ(2013년 1월 13일, 주현절후 제1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69 2013.01.13 14:53
403 [일반] 주 안에서 빛(2013년 1월 6일, 주현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9 2013.01.06 15:17
402 [일반] 무화과나무 밑에서 (2012년 12월 30일, 성탄후 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2841 2012.12.30 22:16
401 [일반] 우리의 발을 평화의 발로 인도하실 것이다(2012년12월25일, 성탄절) 첨부파일 하늘기차 2214 2012.12.25 14:26
400 [일반] 누구를 위해 오셨나? (2012년 12월 23일, 대강절 네번째 주일) 첨부파일 홍정원 2339 2012.12.24 11:11
399 [일반] 친히 베푸신 은혜 !(2012년12월16일, 대강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7 2012.12.16 13:27
398 [일반] 복이 있나니 (2012년 12월 9일, 대강절 두번째 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2105 2012.12.09 21:08
397 [일반] 진리와 자유 (2012년 12월 2일, 대강절 첫번째 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1983 2012.12.02 20:35
396 [일반]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56 2012.11.30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