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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밑에서 (2012년 12월 30일, 성탄후 첫번째주일)

홍정원 | 2012.12.30 22:16 | 조회 2840


무화과 나무 밑에서 (요 1:43-51)

오늘이 벌써 한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가지요? 여러분에게 올 일년은 어떤 의미이셨습니까? 숨가쁘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그래도 한해를 마무리하며 조용히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셨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곳곳에 많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모임 장소가 밤나무 아래, 단풍나무 아래처럼 나무 아래가 될 때가 많은데요. 그러다보니 “무슨 나무 아래에서 만납시다....” 라는 말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는 참 다정하고 운치있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무 밑에서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참 무궁무진한 것 같은데요. 풍성한 열매를 맛보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기도 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무화과 나무는 단지 우리에게 열매를 얻게 해주거나 그늘을 만들어주는 하나의 나무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밑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이미 보았노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숙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기쓰기입니다. 남자아이라서 그런지 그림 그리고 글씨 쓰는 것도 힘들어하지만, 일기라는 것은 재미있었던 일을 써야하는 것인데,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일기를 쓸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일기는 좋았던 일, 재미있는 일만 쓰는 것이 아니라, 형하고 싸운 일, 속상하고 화났던 일도 쓸 수 있고, 잘못한 일도 쓰고 그래서 반성하고 그러는게 일기야.” 그러면 아이는 그런건 절대로 쓸 수 없다고 절대 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이에게도 인생은 마치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날만 계속되는 것처럼, 아니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일기 속에서만이라도 그렇게 되고싶은가 봅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그렇습니까? 인생이란 웃는 날이 있으면, 우는 날도 있는 것이고, 성공과 기쁨 속에서보다 실패와 좌절, 그리고 슬픔 속에서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릴때 배운 일기를 쓰는 목적은 하루를 반성하고 또 계획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일기 숙제를 내주시는 것도 아마 그런 훈련을 위한 목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일기도 억지로 쓰고, 반성도 숙제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아침마다 명상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루 수업을 시작하는 아침, 낯익은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면 명상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5분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길지 않은 메시지이지만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들을 좋은 음악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내용들이었는지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팍팍한 입시를 준비하는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명상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무언가를 향해 열심히 바쁘게 달려가고 있다면 그때가 바로 돌이켜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때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전도서 말씀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라고 하는 말씀도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돌아보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말씀해주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종종 TV 프로그램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삶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 그것이 결코 당연한 것들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나면, 잠들어있는 남편의 얼굴의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매일같이 정신없이 떠들고 힘들게하는 아이들의 건강함에도 저절로 감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저의 삶을 돌아보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 하나의 프로그램이 저를 더 이상 예전의 기준과 잣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과 감사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게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혹은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를 신앙으로 이끌어주는 계기가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여러분을 지금 여러분이 걷고 있는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까? 혹 여러분 중에 나는 부모님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에도 여러분을 교회 안에 그리고 예수 안에 머무르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에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 만나주신 경우도 있었구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어렵게 예수님을 찾아가 만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소위 전도라고 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누군가에게 예수를 전하고 싶어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이야기들도 등장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시작은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 “나를 따라오너라.”말씀하시며 빌립을 제자로 삼으신 이야기로부터 출발합니다. 빌립을 예수님의 첫제자가 되었던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동네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빌립 역시도 안드레와 베드로의 전도를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까지 어떠한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빌립은 자신이 만난 예수를 아마도 친구였을 나다나엘에게 가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예수를 만나 새로운 길을 찾고 그 길을 가기로 결단한 빌립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그 새로운 길의 동반자로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 맛있는 음식점 한군데만 발견을 해도, 내가 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소개를 하게 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토록 찾고 있던 진리에 관한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빌립은 예수를 만난 기쁨을 혼자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저와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기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넌, 너희 교회가 정말 좋냐?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 교회에 오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좋냐?”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자신있게 “그렇다” 라고 다른 사람들을 초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정말 좋습니까? 정말 가까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권할 수 있을만큼 우리는 예수님을 좋아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빌립이 자기가 만난 예수를 나다나엘에게 증거했지만, 나다나엘의 첫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46절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나다나엘이 빌립의 초청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경건하게 명상하며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써온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볼품없는 출신성분과 출신지에 대해 더욱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당시 유대의 관점에서 예수에 대해 “어찌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나다나엘에 대한 빌립의 대응이 참 지혜로웠습니다. 그는 나다나엘과 논쟁하거나 다투거나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단지 “와서 보라.”라고 대답합니다. “와서 직접 만나보게.” 판단은 직접 만나 본 후에 내려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의 이같은 성숙하고 진실한 권유에 이끌려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만나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진짜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껍데기만을 보고 빌립의 초청을 거절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봐 주신 것입니다. 그가 편견의 껍질을 깨고 예수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비로서 빌립이 전한 예수를 온전히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해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라고 하신 말씀은 정말 놀라운 칭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한 이후에 새롭게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은 거짓이 많은 아주 간사한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받으려고 형과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과거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거짓과 간사함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옛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적용되었던 말이었고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과 진정으로 만난 진실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그 이름에 걸맞는 진실된 사람이 없고 외식적인 모습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나다나엘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거짓이 없다는 것은 절대로 아무런 흠과 죄가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이스라엘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히 인정하며 참회하는 자로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처럼 외적인 종교 행위들로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속이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누구나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선하거나 완벽하게 악한 존재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과 악의 두 힘이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과 형편에 따라 악이 승할 수도 있고, 또 선이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 속에 있는 아름다운 자질을 크게 부각시켜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서로 상대방 속에 있는 천사를 보고, 그 천사의 선한 힘을 키워주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전에 EBS 방송에서 하는 프로그램 중에 “최고의 교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인천의 한 중학교에 계시는 선생님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선생님의 별칭이 바로 칭찬전도사였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매시간 부모님을 칭찬하는 숙제를 내줍니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부모에게 반항할 나이의 중학생들에게 부모님을 잘 관찰하고 부모님께 칭찬해드릴 것들을 생각하고 표현해보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힘들어하며 칭찬 몇줄 채우기도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한학기가 지나고, 일년이 지나면서 한 장이 넘게 부모님을 칭찬하는 내용들을 눈물을 흘려가며 써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년에 한번 학부모님들을 초청하여 아이들이 부모님을 칭찬하고 있는 그 글들을 읽어드리며, 부모님의 발을 씻겨드리고 뜨거운 포옹을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숙제 때문이었지만 칭찬을 하기 위해 부모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동안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늘 자신들에게 잔소리만 하는 부모,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부모님들이 한 인간으로,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존재들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칭찬하심으로 나다나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드러내셨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통해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칭찬에 놀란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초면인데, 어떻게 나의 일상적인 삶, 내 이전의 삶을 꿰뚫어보고 계실까? 나다나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두려움에 떨었을 것 같습니다. 나를 언제 어디서 보셨을까? 내가 뭘 하고있는 걸 보셨을까?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우리는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 밑이라는 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무화과 나무 밑에서 토라를 읽고 묵상을 했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자기 삶을 지배하게 된 그 소리를 그곳에서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도 그곳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회개하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기도하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아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묵상하는 자신만의 시간이었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이러한 중심을,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을 예수님이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나다나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다나엘이 바로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된 바돌로매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진리대로 살려고 조용히 노력하는 삶 속에 이미 하나님은 현존해 계신다는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 속에, 사랑을 실천하는 삶 속에,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삶 속에 이미 주님은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을 묵상하는 우리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이 바로 그러한 우리를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무화과 나무 밑의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의 자리가 있습니까? 자신을 버리고 애타게 하나님을 찾는 그런 공간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 이성미라는 개그우먼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도 많이들 알고 계실 것이고 간증을 들어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 7년을 지내고 다시 돌아와 다시 방송에서 많이 볼 수 있는대요. 그 이성미씨가 생명의 삶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삶을 나누는 글을 쓴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평생 자신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을 때 그녀에게는 슬픔과 상실감이 산더미처럼 밀려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이 마음에 쌓여가던 어느날,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이들과 같이 지낸 시간과 추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고, 더 늦기 전에 아이들이 자신을 엄마라고 맘껏 부르며 부대낄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야말로 훌쩍 캐나다고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곳에서 오직 말씀보고, 기도하고, 아이들에게 온 시간을 들이면서 은혜 속에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춘기 아들과는 늘 부딪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 안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막무가내로 아들에게 독설과 욕을 퍼부어대는 자신을 향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이성미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도록 철저하고 잔인하게 아들을 억압하는 너의 모습이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다.” 라고 말입니다.

자신은 새벽기도 다니고, 늘 말씀보고 예배드린다고 신앙이 좋은 양 교만을 떨면서, 정작 사랑은 없이 원칙과 율법으로 아들을 정죄했던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들에게 폭언을 하며 형편없는 아이라고 아들을 향해 온갖 부정적인 말을 쏟아 붓던 자신에게 어느날 하나님이 “네 아들,. 네가 말한대로 만들어줄까?”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순간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는 말씀처럼, 만일 내가 아들에게 말한대로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신다면 어떻게 될까?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들에게 욕을 한번도 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기 시작하자자 아들과 꼬였던 관계가 실타래처럼 하나씩 하나씩 풀리며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우치고 변화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아들의 입에서 “엄마가 변한 걸 보니 하나님은 살아계셔. 그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거든!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제야 말씀하신 거야. 17년이나 걸렸잖아!” 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성미라는 한 사람에게 캐나다라는 땅은 무화과 나무 밑의 영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스타, 연예인이라는 자리를 내려놓고, 엄마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딸로서 그 무화과 나무 밑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함께하셨고, 자신을 돌아보며 이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러한 무화과 나무 밑의 공간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할 수 없고, 어떻게든 내 생각과 내 계획만을 이루려는 간사한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화과 나무 밑의 공간이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우리가 얼마나 사랑없는 율법의 신앙으로 살아가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무화과 나무 밑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들이 다들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에도 나에게 무화과 나무 밑의 공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비참해져서 어쩔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무화과 나무 밑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의 삶 속에서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겸손함이 있습니까?

또한 우리의 이 공동체 안에 이러한 무화과 나무 밑의 영적 공간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해 자신있게 “와서 보라.”는 권면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쉼과 위로가 필요한 우리 이웃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무화과 나무 밑이 되어줄 때, 비로서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 공동체를 통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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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일반]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56 2012.11.30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