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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발을 평화의 발로 인도하실 것이다(2012년12월25일, 성탄절)

하늘기차 | 2012.12.25 14:26 | 조회 2213


우리의 발을 평화의 발로 인도하실 것이다
2012년12월25일(성탄절) 눅1:76-79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을 뽑으셨습니까? 저는 지난 5년 동안 생태, 민주주의, 통일, 상생, 언론의 자유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무너졌기 때문에 특히 국가 조직에 의한 폭력으로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 몰렸고, 일자리를 잃었고, 살아오던 집 터를, 가족을 잃어서 이러한 역사의 후퇴를 다소나마 회복시켜 줄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사람들은 정의, 평화 나눔 보다는 무언가 힘을 가진, 상생하며 나누는 지도자 보다는, 국가 조직의 힘에 익숙해 있는 사람을 또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성탄에 마음이 더 아픕니다. 그리고 벌써 벼랑 끝에 몰려있는 사람이 두 명이나 절망하여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우리는 이 번에도 보다 세상이 좋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투표하여 75%가 넘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습니다. 모두들 정치적 메시야에대한 소망을 가지고 투표를 하였습니다. 저도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투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와 똑 같이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가이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눅1:51-53을 보면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
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
으로 떠나보내셨”다고 합니다.

사실 이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구전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은 간절했습니다. 또 성전과 율법과, 제사를 통해 고백되는 신앙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외면당하였지만 그나마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이 남아 있다면 메시야 대망의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요한에게 물은 것 중의 하나가 ‘그러면 네가 메시야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안드레가 형인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들려 로마의 병영으로 끌려 갔을 때에도 사람들은 바울에게
‘사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이 당신이요?’하고 묻는 것을 볼 때, 이스라엘에 메시야 대망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가에서 5병2어의 기적을 보이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아마 이 번 대선 때의 열기 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힘 있는 메시야 말입니다. 물질적 부와 적을 한 칼에 물리칠 수 있는 힘있는 메시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힘 있는 메시야는 없습니다. 허구입니다. 거짓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속아넘어가면 안됩니다. 성경은 힘 있는 메시야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 가까운 지인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시절은 쓰디 쓰지만, 그래도 성탄일은 축하해야겠죠. 예수 같은 혁
명가가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 절실합니다. 그래도, ‘메리 크리스 마
스!’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답글을 보냈습니다.
“폭력에 찌든 이 시대를 평화의 발걸음으로^^ 평~~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79절에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모세와 예수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 아기에게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죽어가는데, 출애굽기는 그제서야 아기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일에 끌려갔다.’, ‘이집트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몹시 싫어하였다.’,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그리고는 그 속에서 바로가 명령을 내립니다. 사내 아이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데, 2장에서 레위 가문의 한 남자가 레위 가문의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임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공권력을 투입하여 아이들을 죽이겠다는데, 무슨 배짱으로 아이를 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 신앙이 아니었나 십습니다. 17절에서 보면 히브리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경제적 문제 때문에 아이 하나 이상을 키우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하여간 남 모르게 3달 동안 감추어 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기의 울음 소리가 커서 밖으로 새어 나가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발라 아기를 그 속에 넣어 강에 흘러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 백성들은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실제 모세는 자기의 정체성을, 자기가 히브리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노동의 현장인 이집트의 국고성을 쌓는 곳에서 히브리인이 이집트의 감독관에게 맞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그 이집트인을 쳐 죽이는 사건에서부터입니다. 모세가 자기 스스로를 깨달은 것은 왕궁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척박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탄에 아기 예수의 평화를 맛 볼 수 있고, 내가 기독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노숙인들이 떠나지 못하고 서성되는 서울역이요, 지금도 이 추위에 새 둥지 처럼, 아니 둥지 보다 못한 철탑 꼭대기에 메달려 있는 평택과 부산의 노동자들이 메달려 있는 철탑 근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마굿간은 우리 교회 앞의 마굿간이 아닙니다. 바로 새둥지 같은 철탑입니다. 그 곳에 평화의 실마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철탑에서 평화를 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제 말이 너무 쎈가 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태어난 곳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 합리성과 논리성으로 무장한 동방 박사들도 별을 따라 가다가 헤롯 왕궁으로 들어가 유아 살해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하여간 저도 그렇고, 힘 있는 메시야를 바라는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은 우리의 발을 평화의 발로 인도한다고 하는데, 그 평화의 발의 시작은 어디일까요? 지금 모두 고통스러워 울부짖고 있는데, 성경은 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조직적인 폭력, 더구나 국가적인 공공연한 폭력에 노출되어 말도 안되는 죽음을 죽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가 태어났어!’하면 무어라 할까요? 돌맞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실제 ‘아이가 태어났어!’하고 외치던 사람들은 그렇게 돌을 맞고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인도의 간디, 우리 장준하 선생님 모두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저는 제가 이 번에 뽑은 문제인 씨는 그의 변호사 시절과 청와대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볼 때역시 그러한 평화의 발걸음을 함께 걸어가려 하던 사람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망설임 없이 문제인 후보를 뽑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아이가 태어났어!’ 합니다. 오늘이 성탄일입니다. 왜 성탄을 축하하나요? 누구를 축하하고 경배와 찬양을 돌리나요? 이미 완성된 평화가 아니라 평화의 순을, 미쳐 아직 싹도 나지 않은 씨앗입니다. 왜 아기일까요? 아기는 사랑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어제도 라온이가 엄마가 성가를 부르는데도 엄마한테 간다고, 그리고는 졸리우고, 다리도 아플텐데 발표가 끝날 때 까지 엄마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사랑을 먹고 큽니다. 그러고 보면 어제 청소년들의 소극 에서도 우리 아이들이 거듭 외친 것은 ‘사랑해주세요’입니다. ‘안아달라’, ‘용돈을달라’, ‘시험망쳤어’ 모두 다 사랑입니다. 평화는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시는 선함을 잘 키워 지켜내 드러내는 것입니다. 평화에는 완성품이 없습니다. 여기에 평화가 있다 하는 것은 가짜이며, 허구입니다. 평화는 ‘어린 아기’입니다.

지난 금요일 글쎄다 모임에서 이상권님이 쓴 ‘마녀를 꿈꾸다’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책은 한 아이, 아니 두 아이가 어떻게 태생적인 아픔을 이겨내는지에대한 것을 꿈과 환상과 자연의 구조 속에서 흥미롭게 펼쳐 놓았습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생명의 구조를 이야기 하는데, 죽음을 아주 친근하게 이야기 합니다. 즉 다른 피조물을 먹고, 또 내 생명을 내어주는 생명의 틀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막 살아 움직이고, 먹고, 마시고, 자기 뜻, 생각을 펼치고 하는 그 바탕에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남 만이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 그 생명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탄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이지만, 또한 십자가의 죽음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를 못하여 힘들게 커가는데, 그 내용 중에 이모와 함께 생모의 무덤을 찿아가 자신의 내면 깊숙이에 숨어있는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데, 이야기 중에 냇가에서 이모가 돌멩이를 하나 들어 그 아이의 이름이 수문이인데, 수문이의 손에 꼭 쥐어주는데,
“이모의 체온이 수문이의 손을 타고 돌멩이로 흘러갔다. 봄볕이 어
루만져준 돌멩이처럼 너무 뜨겁지 않은 은은함, 미소 같은 은은함이. 수문이
는 따스함이란 꼭 만져 주어야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만 놓아 버려도
이내 차가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따스함이란 일방적인 체온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 손을 잡아야만 오래간다는 것을 알았다. 수문이는 일어서면서 그 돌멩
이를 떨어트렸다. 다시 손을 뻗어 건져 낸 돌멩이가 너무 섬뜩하게 차가워서
수문이는 얼른 놓아버렸다. 그 따스함이 순식간에 침몰해 버릴 수 있다는 사
실이 너무 무서웠다. 겁이 났다”고 합니다. 평화는 이렇게 따뜻함이 아니라. 그러니까 수십~ 수 백 만원의 비싼 옷과 난방으로부터 오는 따뜻함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통해 흐르는 기성품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라 하는 순간 그 평화는 이내 사라져 버리는 허구 이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아기 예수는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만일 평화가 있다면 그 평화는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주님의 모습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고, 친히 주님께서 우리를 그 평화의 발걸음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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