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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나니 (2012년 12월 9일, 대강절 두번째 주일)

홍정원 | 2012.12.09 21:08 | 조회 2105


제목 : 복이 있나니... (창 13:1-18)

오늘이 벌써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2012년 새해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를 나누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어떻게 한해 동안 복은 많이 받으셨나요?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새해에 주고 받는 복 받으라는 인사 속에는 부자가 되라는 것, 그리고 건강하기를 바라고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빈다는 뜻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고기교회를 오기 전에 몇 년동안 개척교회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저를 만나는 분들이 꼭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은 많이 모여요? 많이 부흥했어요?” 그럼 제가 뭐라고 대답할까요? “밥은 먹고 살아요.” 그러면 제 대답을 듣고 “그럼 됐지 뭐. 뭘하고 살든 밥만 먹고 살면 돼!” 라고 이야기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말은 참 말이 안되는 것 같고 웃기는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 말이 참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그 말은 욕심부리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밥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조건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밥만 먹으면 되나? 전도 열심히 해서 교회도 부흥시키고 교회건물도 짓고 그래야죠!”라고 말씀하셨다면, 오히려 그런 말이 저를 더 부담스럽게 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밥만 먹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한 부흥이나 교회건축과 같은 복을 받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원하는 복은 과연 어떤 복이십니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성경의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만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랑스러운 조상이 된 것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만한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축복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2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보면 이런 축복을 내 자식이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만한 좋은 복이 다 담겨 있습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고,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해줄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그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은 모든 익숙함과 편안함으로부터 곧 고향으로부터 떠나 어딘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첫 번째 시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모든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기로 순종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 큰 축복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2절에 “아브람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큰 부자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과 함께 길을 떠났던 조카 롯에게도 양떼와 소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는데 그들이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는 함께 머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두 사람이 이룬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라함과 롯의 소유가 많아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한정된 공간에 가축의 수가 늘다보니 물도 많이 부족했을 것이고, 가축에게 먹일 풀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일을 처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는지 또 한번 발견하게 됩니다. 13장 8-9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난 왼쪽으로 가겠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함께 떠나온 유일한 핏줄인 자신과 롯 사이에, 그리고 자신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땅은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서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삼촌으로서 자신의 권리나 기득권을 주장하기보다 조카인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있습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자신이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에게 선택권을 양보함으로써 역시 복의 근원이 될만한 사람은 다르다고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물도 넉넉하고 가축을 키우기에 좋은 땅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롯이 요단 지역을 선택하고 동쪽으로 떠나게 되자 아브라함과 롯은 처음으로 떨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랫사람에게도 양복의 미덕을 보인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요?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더 큰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14-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마치 양보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아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아브라함이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밟는 땅을 그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아이들이 하나를 가지고 서로 갖겠다고 싸울 때 지금 양보하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더 좋은 걸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다 이 말씀에서 배운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또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온 청교도들이 마치 그 땅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축복으로 주신 땅이라고 여기면서 그곳에 살고있던 인디언들을 내쫓아 버리고 소유개념이 아니었던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유하기 시작했던 것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여기면서 기독교 국가들이 세계를 점령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간 것들도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오해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양보로 롯은 롯대로 좋은 땅에서 살게 되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넘치는 축복의 선물을 받는 것으로 두 집안이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좋았을텐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롯은 기름진 땅을 거쳐 마침내 소돔에 정착했지만 그 땅은 결코 복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부족함 없는 땅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는 죄인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롯은 축복의 땅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모든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내마저 잃게되었고 가까스로 몸만 빠져나와 두딸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서 동굴에 숨어서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롯을 그런 지경으로까지 몰고갔던 것일까요? 혹시 기름져 보이는 풍요로운 땅을 아브라함에게 양보하고 자기가 다른 땅을 가졌더라면 결과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까요? 물론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랬다면 롯 대신 아브라함이 소돔에서 패가망신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는 말이 언뜻보면 양보의 미덕을 두루 갖춘 꽤 근사한 말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네가 어느 쪽을 택하든지 그로써 생기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너에게 있다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9절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도 롯과의 동거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골치가 많이 아팠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웬만하면 나를 좀 떠나가라. 떠나기만 한다면 네가 어떤 땅을 선택하든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카에게 너그럽게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브라함의 행동은 어떻게 보면 아주 무책임한 행동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선택은 이것이 최선이었을까요?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서게 된 이 본문에 대한 대부분의 일반적인 해석은 육신적인 것을 선택한 롯과 영적인 선택을 한 아브라함은 필연적으로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도 말하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선택받은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과 롯의 가정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선택해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하기만 할 수 있었을까요? 혹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토록 간절히 용서를 구하며 멸망시키지 않기를 위해 기도했던 것도 함께 고향을 떠나왔던 조카를 더 품어주고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물론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이랬어야 했다, 혹은 저렇게 했어야 했다라고 말할 자격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우리가 여전히 아브라함의 복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본문에서 분명 배워야 할 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축복에만 눈이 멀어 아브라함의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갈라선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다툼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6-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함께 고향을 떠나온 동지였던 아브라함과 롯이 더 이상 동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유가 많아지니 다툼이 끊일 날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게임기 때문에 싸울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게 없으면 안싸우는데, 있으니까 싸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있어서 싸웁니다. 없으면 싸울 것도 없지요.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서게 된 이유가 그들의 소유가 너무 많아 동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면, 다투지 않기 위해 서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과 제한된 땅에서도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소유를 조금 줄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과연 그들의 소유가 얼마나 많았기에 함께 할 수 없을 정도였을까 궁금하기도 한데요. 창세기 14장 14절 말씀을 보면 가나안 땅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출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318명을 거느리고 자기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집에서 군대처럼 거느리고 있던 사람이 31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면, 그 소유나 재산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와 롯이 가진 소유 때문에 서로 충돌하고 다투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롯에게 따로 떨어져 살자고 말했고 또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한 것처럼 보였지만, 가진 것을 조금만 줄이면 조카와 다투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아브라함은 조카인 롯 대신에 자신의 소유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선택하셨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시대가 누리는 풍요는 과연 축복이기만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풍요가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또 가난한 이들을 더 소외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또 오늘날 우리는 풍요가 축복만이 아닌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때는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남과 북이 분단된 조국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과 북이 통일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남과 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도 알고, 세계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분단상황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주변국들의 욕심에 의해서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위기 가운데 처해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의 경제력을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북한은 북한대로 자신들의 군사력을 손해보지 않기 위해 통일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전쟁을 준비하며 국방비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단상황을 이용하여 국방비를 증액시키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돌볼 예산을 줄일 수 밖에 없는 우리나 오로지 전쟁준비를 위해 주민들의 생계를 돌아보지 않는 북한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자신을 위한 군대를 318명이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고향땅을 함께 떠나온 유일한 핏줄인 조카 롯과 갈라서게 된 것은 아닙니까?

과연 축복이란 무엇일까요? 창세기에는 복을 좇아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었던 야곱입니다. 야곱은 이미 배속에서부터 형과 경쟁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으로 태어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오직 형 몫으로 주어진 장자의 축복을 받겠다고 형을 속이고 아버지까지 속여서 그토록 바라던 축복을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가 받아낸 축복의 권리 때문에 고향을 떠나 부모 형제와도 떨어져 모진 세월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좇고 있는 축복도 바로 야곱이 추구했던 그런 맹목적인 축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야곱에게 축복이 있었다면,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피해 삼촌의 집으로 도망가던 길에서 언제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하셨던 그 하나님을 깨달은 것이 그에게는 축복이었을 것이구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형을 만나기가 두려웠지만 천사와 씨름하고 난 후에, 두려움 없이 형과 대면할 수 있게 된 평화가 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구약의 관점에서는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고 소유가 풍성한 거부가 되는 것이 축복이었고 우리가 기대하는 축복도 구약적인 축복에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뒤엎어버리는 복이 아닐 수 없는데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팔복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이 우리에게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고기리로 이사오기 전에 반지하에서 몇 년을 살았었는데요. 제가 요 몇 주 동안 저와 저희 집에 대한 정보를 정말 많이 드리는 것 같습니다. 저희 큰 아들이 하루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엄마, 우리 집은 참 좋다. 여름에는 시원한데, 겨울에는 또 따뜻해. 그치? 그리고 아무 때나 뛰어도 괜찮고 안그래?” 가끔은 집이 좁다고 툴툴대기도 했었는데 지하에서 사는 복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저도 집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미안한 마음도 많이 있었는데, 어느덧 아이가 커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가난한 자의 복과 가난한 자가 누리는 천국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물론 크고 좋은 집에서도 더 따뜻하고 더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겠지만, 그때 누리는 기쁨은 가난한 자가 고백하는 감사와는 많이 다를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아브라함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받고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복들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연 자신의 몸에서 약속하신 복을 누릴 상속자가 태어나게 될 것과 이 모든 땅을 자신의 소유로 받게 될 것인지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 묻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 증거로 보여주신 응답이 우리의 기대와는 많이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반드시 내가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을 아들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차지할 자손들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 자손들이 다른 나라의 종으로 사백년이나 괴로움을 당하고 그 후에야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니요. 이것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또 출애굽기의 기록을 보면, 사백년의 종살이를 마치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까지 가는 동안에도 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애굽을 그리워하던 그 자손들은 과연 축복의 자손이 맞기는 한 것입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그들이 원하던 진정한 축복의 땅이었겠습니까?

오히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백년 동안 그들은 가난했고, 또 억압받으며 애통해했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고 그래서 구원의 소망과 위로가 있었던 그 시절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증거로 보여주신 축복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길이 없는 요단강 물에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으며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한 자들이 결국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그들의 하나님을 자신들을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내신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에도 초막을 짓고 초막절을 지키며, 가난과 억압과 애통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건져내시며 광야의 모든 길 가운데 함께하셨던 그 하나님이 그들의 복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복은 그 가나안 땅에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는 그 땅을 향해 가는 가난하고 고단한 나그네 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는 것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전쟁의 포화 속에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더 이상 땅을 위한 전쟁을 그치고 형제로서 동거할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

법정스님은 그분의 법문 속에서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에 자족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겠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에 끌려 살아간다면 여전히 우리는 궁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도 이웃도 모두 다툼의 대상이자 경쟁상대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한정된 자원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누군가는 그만큼 자기 몫을 빼앗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서로서로 자신의 소유만을 지키려고 한다면 더불어 화목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그래서 소유가 많아지는 물질적 복이 아닌, 마음의 가난에서 오는 평화가 있는 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끝이 없는 욕심에서 벗어나 가난해지고, 그러나 여전히 가난해지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위해 애통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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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 [일반]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라(2013년 2월10일,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23 2013.02.10 10:41
407 [일반] 두려워하지 말라!(아직도 믿음이,2013년 2월 3일, 주현절 후 네 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17 2013.02.03 16:42
406 [일반] 주 안에서 빛 Ⅳ(2013년 1월 27일, 주현절후세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14 2013.01.27 15:05
405 [일반] 주 안에서 빛 Ⅲ(2013년 1월 20일, 주현절후둘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73 2013.01.20 10:42
404 [일반] 주 안에서 빛 Ⅱ(2013년 1월 13일, 주현절후 제1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70 2013.01.13 14:53
403 [일반] 주 안에서 빛(2013년 1월 6일, 주현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9 2013.01.06 15:17
402 [일반] 무화과나무 밑에서 (2012년 12월 30일, 성탄후 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2841 2012.12.30 22:16
401 [일반] 우리의 발을 평화의 발로 인도하실 것이다(2012년12월25일, 성탄절) 첨부파일 하늘기차 2214 2012.12.25 14:26
400 [일반] 누구를 위해 오셨나? (2012년 12월 23일, 대강절 네번째 주일) 첨부파일 홍정원 2339 2012.12.24 11:11
399 [일반] 친히 베푸신 은혜 !(2012년12월16일, 대강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28 2012.12.16 13:27
>> [일반] 복이 있나니 (2012년 12월 9일, 대강절 두번째 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2106 2012.12.09 21:08
397 [일반] 진리와 자유 (2012년 12월 2일, 대강절 첫번째 주일) 사진 첨부파일 홍정원 1983 2012.12.02 20:35
396 [일반]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56 2012.11.30 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