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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려운 것(2013년8월4일,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

하늘기차 | 2013.08.04 15:00 | 조회 2928


참으로 어려운 것
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 왕상19:19-21;왕하2:9-12

오늘 말씀은 한 마디로 엘리야와 엘리사가 세대 교체를 하는 내용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기의 외투를 던지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달려와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고 합니다. 번역이 좀 애매모호한데, 공동번역을 보면 확연합니다. “어서 가보게. 내가 어찌 작별 인사를 금하겠는가?”라고 합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네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다시말해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어서 다녀오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겨릿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사르고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고 곧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12겨릿소로 밭을 갈았다는 것을 보면, 그 땅이 얼마나 척박한 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겨리라 함은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겨리라고 하며, 소 한 마리가 쟁기를 끌 때 호리라고 합니다. 경기도 이남은 주로 호리를 사용하지만 땅이 척박한 강원도나 북쪽지방에서는 소 한 마리로는 힘에 부쳐 겨리를 사용하곤 합니다. 아마 왠만한 사람은 포기할 만한 땅이 아니었겠나 십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묵묵히 그 돌과 나무 뿌리와 넝쿨로 뒤엉킨 밭을 갈아 엎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의 모습 아닌가 싶습니다. 쉬운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인생도 12겨리 소를 힘에 부치게 몰며 우리인생을 열심히 가꾸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일에 몰두해 있었을 텐데, 엘리사는 밭일에 메이지 않고 일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엘리사는 기꺼이 소를 버려두고, 엘리야에게 다가 갔고,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는 겨릿소를 잡고, 멍에를 불살라 마을 사람들과 고기를 삶아 나누어 먹고는 바로 엘리야를 따릅니다. 주님의 은혜를 따를 때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 은혜를 입을 때라 생각이 들면 바로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삭캐오가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날 때, 이 때가 아니면 안되겠다 싶으니 체면무시하고 바로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18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사리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아무튼 롯의 아내처럼 뒤 돌아보시지 않기 바랍니다. 엘리사는 지금이 그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 털어버리고 엘리야를 따릅니다.

엘리사는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열두겨리 소로 밭을 가는데, 열 한겨리를 앞세우고 열두 째 겨릿소를 끌고서 밭을 간다고 합니다. 맨 앞에 서는 겨릿소는 리더 격이고, 말을 잘들어 꼭 소리지르지 않더라도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다 아는 소입니다. 엘리사는 이 소를 맨 앞, 자신과 멀리 떨어진 앞 쪽에 세우고, 그리고는 엘리사는 직접 맨 마지막의 두 마리 소를 직접 끌고 밭을 갑니다. 이 마지막 열두번째 겨리 소 두 마리는 아마도 어려서 경험이 없거나, 늘 자기 고집대로 가는 소입니다. 엘리사는 그 두 마리소를 포기하지 않고 끌고 밭을 갈고 있습니다. 끌고서 밭을 가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맨 뒤 겨리소를 끌고 밭을 갑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신앙에 일천한, 아직 신앙에 익숙치 않은 사람을 끌고 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소와 소를 하나로 묶는 것은 멍에입니다. 멍에가 없으면 겨릿소는 아마도 따루 따루 놀기가 싶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멍에가 있으니 둘이 하나가 되고, 24 마리 소가 하나가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내 멍에를 메라 하십니다. 교회의 성도들과 성도들을 겨릿소와 같이 하나되게 하는 것은 바로 말씀의 멍에요, 기도의 멍에요, 교제와 봉사, 헌신의 멍에입니다. 이 신앙의 멍에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맞는 멍에를 얹으시고 말없이 밭을 가십니다. 땀흘림의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겨릿소로 넘쳐 묶은 밭을 척척 갈아엎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때가 어느 때 인가하면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때입니다. 엘리야는 승천을 준비하기 위해 2절에 보면 베델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여리고로 갔다가 다시 요단강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리를 옮길 때 마다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주님의 분부대로 벧엘로, 그리고 여리고로, 또 요단강으로 간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뜻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옮길 때 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 까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나는 하나님의 축구공이라 하면서 평생 동안 이리차면 이리굴러 가고, 저리 차면 저리 굴러 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엘리야는 야웨께서 지시하는 대로 순간 순간 대치하는 모습을 봅니다. 지난 수요일 시편61편에서 다윗은 주님은 나를 지켜주는 견고한 망대라고 하였습니다. 망대는 성곽에서 제일 높이 올라 있습니다. 그 곳에 서면 성 안팎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적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한치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멀리 내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지금 여기서 어린아이 같이 주님이 주신 것 가지고 기쁘고 즐겁게 평화를 맛 보며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멀리 보는 것은 주님이 보십니다. 우리는 양처럼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 기독교의 특징 중에 하나는 도사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냥, 주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호흡하며 생명을 맛보며, 즐기며 사는 것,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나와 사람과 관계와 그 외의 것들을 보면 복잡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면 단순합니다.

그런데 그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러나 너는 여기에 남아있으라고 합니다. 지금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야합니다. 인간의 도움이나, 관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감당하듯이, 오직 야웨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을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면서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스승 엘리야와 함께 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했습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떡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형에서를 속이면서 까지 아버지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습니다. 그릇된 욕망입니다. 평생을 자기 방식대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야곱을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결국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한 결국이 얍뽁나루터입니다. 얍뽁나루터는 야곱의 지금까지의 인생의 모든 결정체입니다. 그 곳, 얍뽁나루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개입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자기 방법대로 살다가 벼랑 끝에 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잃느냐, 아니면 하나님 앞에 전 생애를 걸고 구원을 받느냐 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과 씨름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싸움에서 집니다. 하나님은 싸움에서 져주십니다. 아빠하구 아들이 팔씨름을 하면 아빠가 져줍니다. 그럼 아들ㅇ은 자기가 힘이 써서 이긴줄 압니다. 아빠는 지구도 흐믓해 합니다. 아들이 기뻐하니까요. 하나님은 져주셨습니다. 그래야 야곱이 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살기 때문입니다. 져줄 줄 알아야 합니다. 져 주어야 다른 사람이 삽니다.

오늘 엘리사는 맹세코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고 3 번이나 거듭 강조합니다. 이렇게 영적, 신앙적인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단강에 이르자 엘리야는 겉옷을 벗어 요단강을 치니 강이 갈라져 요단강을 건넙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주님이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고 묻자, ‘능력을 갑절로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너는 참 어려운 것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엘리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는 아합왕 때였습니다. 엘리야가 450명의 거짓된 우상숭배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 것을 드러내는 외로운 싸움을 한 직후입니다.그야말로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헌정질서가 무너지는 때였습니다. 나봇이라는 성결한 사람의 포도원을 공권력과 아첨배들과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는 사법권의 힘으로 빼앗아버립니다. 엘리사는 당시 나라가 이세벨에의해 농락당하는 것을 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왕하 2:3을 보면 예언자 수련생들이 등장합니다. 지금으로치면 신학교죠. 엘리사는 농사꾼인 동시에 예언자 학교의 스승이었습니다. 벧엘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오늘 선생님의 스승인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알고 있으니 조용하라 합니다. 여리고의 제자들도 그렇게 반복하여 묻습니다. 당시 곳곳에 예언자 학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 예언자는 하나였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에 이르자 강을 건넜고, 그리고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놓고, 회오리바람이 불어 엘리야 만을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기적의 사건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능력, 천군천사가 엘리야와 함께함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엘리사는 이러한 능력을 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야 지금과 같은 시국에 엘리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하며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하고 크게 부르짖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을 누가 지켜냈는지 알았습니다. 아합왕의 바알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와 어떻게 단기필마로 싸웠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제는 그 역할을 엘리사가 맡아야 하니, 어깨가 천근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갑절의 영감을 달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답은 엘리사가 ‘참 어려운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사가 자신이 행한 것들을 보면서 자기에게 그러한 능력을 요구한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은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함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엘리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9절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데, 이것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엘리야가 만에 하나라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할 때, 엘리야의 심중에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제자 엘리사에대한 배려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일러 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어리석게 구하지 않는 깨달음, 지혜가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 엘리사에게 하나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속한 것에대해 이야기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일 자꾸 되도않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찿고 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적 틀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낮춤, 순종입니다. 엘리야는 이동할 때 마다 “분부대로”라는 토를 답니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분부대로 할 때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로서 겨릿소를 끄는 엘리사의 한 가지 모습을 보니 그 모습이 보입니다.

교우여러분 참으로 어려운 것을 쫓지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마땅히 구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분부대로 순종, 순결한 교우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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