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을까?(2013년7월28일, 성령강림후열번째주)

하늘기차 | 2013.07.29 14:39 | 조회 2502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성령강림후열번째주  시24:1-10

오늘 시편기자는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라고 선언을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은 대체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감, 또는 존엄성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늠합니다. 자신의 학문, 사회적 지위, 권력, 땅, 부동산, 자동차, 패션, 학벌, 혈연, 지연, 그러니까 내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표현합니다. 가족도 내 존재감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종 가족에대한 영화를 보면 가정이 건강해야 그 구성원의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의 존재감도 건강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드러내나요? 또 자신의 취미 생활로 치면 내가 목공을 한다. 내 기타 실력이 어느 정도다 등 이러한 자신의 삶의 표현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 내지는 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고 그렇게 또 상대방을 알아갑니다. 밤토실 글쎄다에서 청소년에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간이역 여행도 다녀오고 그랬는데, 그 때 한창 지금도 그렇지만 인문학의 위기다 할 때, 인문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며 밤토실, 청소년 인문학교실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담백, 정확하게 표현 전달 할 수 있고, 또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했고, 지금도 그것이 유효하고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참 멋진 정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것이 바로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 존재감을 내 것, 나와의 관계를 통해 느끼며 키워가며, 알아갑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건강한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십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 존재감을 이제는 하나님에게서 찿겠다는 것입니다. 그 첫 일성이 바로 ‘모두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가치, 모든 인식, 경험, 관계, 존재감,,, ‘나’라고 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입니다. 내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하나님 안에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농부요, 나는 포도나무이니 너희는 가지라 하는 말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관계가 무너지면서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소유를 통해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며, 폭력, 전쟁, 부당한 소유, , ,그리고 굶주림이 만연해 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바로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열왕기상 8:5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 조상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 내실 때에,
주님의 종 모세를 시켜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그들을
주님의 소유가 되도록, 세상의 모든 백성과 구별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아니면 오늘 이 시대를 주관하는 자본의 굴레에서, 물질 가치만 괴물처럼 살아있는 시대에서 우리를 건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서 건져낸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는 내 것이라’하며 구별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이 세상의 가치체계로부터 구하여 생명의 잔치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앉아있다는 것은 그 구원의 은혜에 초대 받은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 많은 가치 체계 속에서 삽니다.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 인간의 합리성. . . 사실 인간의 이성은 늘 가치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진리 보다는 불의하더라도 용기없어 스스로 편하고, 유리한 쪽으로 기울기 십상입니다. 믿을 만 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래로 수많은 판단과 가치 체계, 선악의 문제에 붙들려 헤어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또 다른 나무인 생명의 나무로 인도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자 마자 차단되어버린 길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열어 제꼈습니다. 바로 너는 네 것이 된것입니다. 물질 소유의 끝없는 욕망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죄로부터 구원받은 은혜가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삶의 자리가 수 많은 관계 속에 순연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주관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시대정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아름답고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좋은 것들은 보통 감추어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기 십상인데, 나쁜 것들은 소리를 내고, 겉 포장을 합니다. 사람들은 연약하고, 분별력이 없고, 어리석고, 그리고 용기없어 그 세속적인 흐름에 휩쓸리기 십상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의 가치들이 포장되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주인 노릇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아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을 하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 7-10절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고백의 극치는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매스미디어 즉 T.V나 신문, 잡지, 인터넷등의 매체들은 세상을 찬양하고 영광을 세상에 돌린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t.v를 키면, 인터넷과 접속하는 순간, 신문을 펴 드는 순간 모두 세상에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최근 남성연대라는 단체의 대표가 인터넷상에 국민을 대상으로 회비가 잘 안 걷혀 1억을 모금한다고 하면서, 일억이 안 걷히면 한강에 투신한다고 공개적으로 카페에 올리고는 정말 한강다리 난간에 메달려 있다가 떨어진 것입니다. 참 말도 안되는 일이 황당하게 일어납니다. 최근에 정수장 공사에 폭우가 내리는데 안전장치 없이 작업하다가 노동자들이 익사한 일, 청소년들이 해병대 정신훈련한다고 갔다가 참사를 당한 일, 세상의 미디어를 보면 모두 찬양하는 것이 보면 사고요, 죽음, 폭력의 일들입니다. 대중매체들은 그렇게 죽음의 일들을 찬양합니다. 하여간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어떤 광고와 선전 등 모두 세상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찬양을 멈추게 하는 시간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입니다. 지금, 여기서 드리는 예배, 이 것 마저 우리가 잊어버리고, 놓쳐버린다면 저는 그렇습니다. 아마 숨이막혀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떼제 찬양 기도 예배가 좋습니다. 화곡동 한국지부 찬양 기도 예배가 매 주 금요일 7시30분에 열리는데 참 좋습니다. 우리 교회도 조만간 이렇게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을 호흡하는 예배시간을 성가대와 함께 준비하려고 합니다. 온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의 감정이나 틀을 배제한체 최소한의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데 너무 좋습니다. 지금의 경배와 찬양과는 질적으로 틀립니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해 분위기를 흥분시켜 집단카타르시스를 종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하여간 온 시간, 온 공간이 세상을 찬양하는 것으로 가득찬 이 때에 그 세속의 것들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찬양과 존귀를 돌리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시간을 낼 가치가 있고, 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7절은 머리를 들고, 문을 활짝 열어 제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올 해 광화문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했습니다. 관, 정, 법, 시민들이 모두 함께하였습니다. 대통령의 다양한 패션이 입에 오르 내리기도 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축제의 한 마당이었지만, 모든 백성이 함께 할 수 있는 취임식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은 왕의 성전 입례식인데, 이 입례식은 사무엘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에게 빼앗긴 율법궤를 그 동안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두었는데, 다윗이 왕이되어 율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깁니다. 큰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대상15:26-28은 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레위 사람들을 도우셨으므
로, 그들이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제물로 잡아서
바쳤다. 다윗과, 하나님의 궤를 멘 레위 사람들과, 찬양하는 사람들
과, 찬양하는 사람들의 지휘자 그나냐가 모두 다 고운 모시로 만든
겉옷을 입고 있었으며,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을 입고 있었다.
온 이스라엘은 환호성을 올리며, 뿔나팔과 나팔을 불고, 심벌즈를
우렁차게 치고, 거문고와 수금을 타면서, 주님의 언약궤를 메고 올
라왔다”고 합니다. 다윗은 너무 기뻐 하체가 드러나는 것도 모르고춤을 덩실 덩실 추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빼앗겻던 하난미의 말씀을 다시 찿은 기쁨에 다윗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며 세상의 일들에 매여 하나님에대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기도를 잃어버립니다. 봉사와 헌신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오는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너무 좋와 춤을 덩실덩실 춘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의 탁월한 영적 지도자이신 유영모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집에 오리 한 마리 잃어버리면 온 동네, 산으로, 들로, 냇가로 찿아다니는데, 믿음 잃어버리면 그 잃어버린 것도 모른다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어떻게 진정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다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은 바로 영적 회복, 다시 찿음을 의미합니다.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하일 히틀러!’하며 극존칭으로 존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니 엉뚱한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문제는 그 주인 행세하는 가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가짜가 폭력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주인, 참 사랑이신 하나님 아닌 주인행세 하는 가짜는 욕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참 주인이 주인이 아닐 경우 모든 것들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에 묶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다시말하면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거룩한 곳에 설 수가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렵게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성산, 즉 거룩한 산에 오르며,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한 마디로 누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4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깨끗한 손과 해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
리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5절에서 주님이 베푸시는 복을 받고,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이 4절 말씀은 출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면서 제사장 아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제사를 집전할 때에 입어야 할 의복에대해 쭉 설명을 하는데, 그 때 36절에 보면 아론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에봇이라는 겉 옷을 걸치는데, 이마에 관을 쓰고 정금으로 만든 패를 다는데 그 패에 무어라고 쓰여있는가 하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습니다. 의복이 다 준비되고, 제물도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음입니다. 성결이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어제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 4절 말씀에 꽉 메여 풀리지를 못하였습니다. 깨끗함, 해맑음, 거짓맹세하지 않기. . .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주 우리는 우리의 성도들이 드러내야할 성도들의 신앙의 덕목을 그저 용서함,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총으로 다 덮어버립니다. 그것은 성도로서, 교회로서 직무유기입니다. 교회는, 크리스찬은 신아하는 것에 있어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성도로서 최소한의 기독교적 윤리가 있어야 합니댜.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넘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종일 그랬습니다. 빌2:15절은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
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
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 합니다. 바울 서신 속에서도 아니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서는 이 보다 더 강력하게 예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죄사함의 은총으로 이 예수따르기의 기독교적인 최소한의 윤리를 뭉겐다면 그건 하나님 앞에서 직무유기입니다. 오늘 말씀 4절은 바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의 마지노선입니다. 이 신앙의 영적 전선에서 후퇴한다면 우리는 크리스찬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서신,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구약의 지혜서들을 통해 볼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윤리의 가장 돋보이는 덕목은 깨끗함, 순결함,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순결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그래서 이 말씀에 걸려 넘어질뻔 했는데, 5, 6절 말씀이 저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복이 있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렇지요. 복 받고 인정을 받는데, 내 스스로 감당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주님을 찾는 사람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찿는 사람. 사슴이 시냇물을 찿듯이 영혼이 갈급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약 창세기 믿음의 조상인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누구인가요, 해 맑음, 깨끗함, 거짓맹세 하지 않기, 헛된 것에 마음 팔리지 않기와는 정 반대의 사람 아니었습니까? 당대의 사기꾼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마지막 금의환양 할 때 까지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죽이려 하는 형의 칼을 피하려 잔 꾀를 부리던 야곱입니다. 그런데 하니님께서 그 러한 야곱의 전 생애를 지켜보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에 홀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서게됩니다. 하나님께서 말 없이 기다리던 순간입니다. 모든 과정을 야곱이 다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마지막 순간 그 자리, 그 시간, 하나님의 시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멈출 수 밖에 없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야곱과 절대절명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하나님이 진 것입니다. 그 싸움을 통해 야곱은 변화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전 욕망 사로잡혔던 야곱이 아니라, 순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받게됩니다.

바로 그렇게 야곱을 기다려주던 하나님의 얼굴 찿는 자가 바로 4절 말씀의 사람이라고 주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바로 이렇게 사모하며 갈급한 ㄱ사람이 성산에, 거룩한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복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28/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44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4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54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46 2005.09.02 16:30
435 [일반] 가장 약하고, 가장 어린 사람(2013년8월18일, 성령강림후열세번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1 2013.08.18 16:20
434 [일반] 부르짖는 삼손(2012년8월11일,성령강림후열두번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0 2013.08.11 14:19
433 참으로 어려운 것(2013년8월4일,성령강림후열한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28 2013.08.04 15:00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을까?(2013년7월28일, 성령강림후열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03 2013.07.29 14:39
431 [일반] 내가 풀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2013년7월21일,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 )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3 2013.07.21 14:57
430 [일반] 단 하나의 소원(2013년7월14일,성령강림후여덟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35 2013.07.15 12:35
429 [일반] 각별히 돌보시는 주님(성령강림후일곱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4 2013.07.07 15:09
428 [일반] 공법을 물같이 정의가 강처럼(성령강림후여섯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98 2013.06.30 15:57
427 [일반] ‘내가 곧 나’(2013년6월23일, 성령강림후제5주 )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1 2013.06.23 13:54
426 [일반]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 성령강림후네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09 2013.06.16 15:44
425 [일반] 십자가 평화로 부활하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11 2013.06.11 18:34
424 [일반] 생수가 강물처럼(성령강림후세번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610 2013.06.09 15:46
423 [일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물(환경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68 2013.06.02 16:20
422 [일반] 항상 함께 있으리라!(성령강림주일, 스승의 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87 2013.05.19 16:23
421 영적 아버지(어버이주일, 부활절제7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701 2013.05.12 15:47
420 [일반] 돈 없이, 값 없이(어린이주일, 부활절제6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13 2013.05.05 16:39
419 [일반] 그래도 씨를 뿌린다(2013년 4월21일, 부활절 제 5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73 2013.04.28 16:22
418 [일반] 생명을 주시는 영(2013년 4월21일, 부활절 제 4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62 2013.04.21 16:27
417 [일반] 지금, 여기서 부활 !(2013년 4월14일, 부활절 제 3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95 2013.04.14 17:03
416 [일반]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2013년 4월 7일, 부활제2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9 2013.04.07 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