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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풀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2013년7월21일,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 )

하늘기차 | 2013.07.21 14:57 | 조회 2302


내가 풀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
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 욥42:1-5;시73:1-3,16-17

오늘 1절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대해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그리고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그만 그 확신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잃고 미끄러질 뻔 했다고 합니다. 믿음이 독실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신실한 믿음이 왜 무너질 뻔 했을까요? 10,1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
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 마저도 그렇게 하나님에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요? 3절 말씀입니다.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만한 자를 시샘했다고 합니다. 눈 꼴이 신 것입니다. 눈 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 거들먹거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 평안하거든요, 못된 짓을 한 사람이 저렇게 평안하게 맑은 웃음을 지으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니 부끄럽게도 속으로 부러웠던 것입니다.

‘왜 악인이 형통한가?’ 라는 주제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데, 욥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욥은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가지고 있던 재산, 그 다음에는 가족, 그리고 마지막에는 건강도 잃고 말았습니다. 부인은 그렇게 사느니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오죽하면 그렇게 말을했겠습니까. 성경은 욥이 끝까지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 후 부터입니다. 위로하러 친구가 찿아오면서 욥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욥은 자신이 왜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하는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은 악한자는 벌하시고 의인은 행복하고 잘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인데, 네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너의 죄 때문이니 하나님께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바로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빨리 너의 죄를 고백하라는 그 당위성이 싫은 것입니다. 욥은 차라리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제 더 이상 사는 것이 지겹다고 합니다. 그러자 욥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욥에게 충고하지 않습니다. 위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친구들은 욥을 중상하며 못됐다고 하며, 사탄이 승리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친구들 마저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상투적인 마치 돌팔이 의사와 같은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합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하나님께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에게 이 고난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는데,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며,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대해 고통스러운 질문을 합니다. 이제 욥은 직접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인과응보와 스스로 결백하다는 논리에 그만 갖히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우주와 역사를 자유롭게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천사들이 기뻐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하면서, 온갖 피조물의 존귀함과 자존감과 그 피조물들이 어떻게 한 생명체로 조화롭게 순환하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눈과 비가 어떻게 내리며, 바람은 어디서 불며, 까마귀가 새끼들의 먹이를 어떻게 구하며, 염소가 어떻게 새끼를 치며, 야생 들소가 힘이 좋지만, 그 들소에게 네가 쟁기를 멜 수 있느냐? 타조가 빠르게 달리지만 황새처럼 날지는 못하지 않느냐? 내가 말을 메뚜기 처럼 뛰게 만들었느냐? 들짐승들의 먹이가 푸른 풀이라는 것, 연꽃 잎과 갈대밭과 버드나무 그늘에서 짐승들이 숨기도 하고 쉬어가는 것을 아느냐? 누가 구름을 셀 만큼 지혜로우냐고 거듭 묻습니다.

하나님은 38장 14-15에서 욥이 궁굼해 하는 정의를 어떻게 하나님께서실현하는지 말씀합니다.
“대낮의 광명은 언덕과 계곡을 옷의 주름처럼, 토판에 찍은 도장처
럼, 뚜렷하게 보이게 한다. 대낮의 광명은 너무나도 밝아서, 악한
자들의 폭행을 훤히 밝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 마치 어두움 속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면 보이지 않던 모든 만물이 밝히 드러나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선악 간에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 하늘의 수 많은 별들, 온갖 삼라만상의 식물들, 동물들에대해 하나님은 자분바분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것의 돌아가는 이치를 아느냐, 보았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 부활, 회복이 모두 은혜입니다. 인과응보나, 원인과 결과에 구속되지 않으십니다. 정의와 평화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자유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로움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가, 이 생명을 위해 내가 한 홀이라도 주관한 적이 있는가 라는 것에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은 욥40:8에서 욥에게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어디 해 보라 하십니다. 전통적으로 악을 상징하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코를 꽤어 잡아보라 하십니다. 이들도 내가 만든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의함도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악을 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거룩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또한 자유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십니다. 스스로 닫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 자유함이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은 선악 간에 우리에게 찿아오셔서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정의가 항상 정의가 아닙니다. 악이 또한 항상 악이 아닙니다. 최고의 선도, 최고의 악도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순결한 개인 뿐만아니라 타락한 사람 각 자를 존중합니다. 사악하게, 그리고 그릇되게 행동해도 하나님은 즉각 벌하시지 않으십니다. 그야말로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기다리심에 함께 하려면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합니다. 공간에 머물려 하지 말고 시간에 머물러야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처음에 욥은 푸념섞인, 불만이 여전히 있는, 마지못해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억지로 절받기 입니다. 이 때는 자기 자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42장에서 욥은 스스로 깨달아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도 인정한 스스로 결백하다는 것과 친구들의 인과응보의 논리에 그만 갖히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욥은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나라 니느웨의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하자 요나는 그것이 싫어 다시스로 줄행랑을 칩니다. 결국 다시스로 돌아와 니느웨의 심판을 선언하자, 그 원수의 나라가 왕으로부터 가축에 이르기 까지 모두 회개를 합니다. 그것이 못 마땅해 괴로워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 넝쿨 하나를 통해 니느웨의 수 많은 생명의 존귀함을 말씀하십니다.

2007년인가에 인도네시아에 들이닥친 10m 높이의 시속800Km 속도로 밀어닥친 쓰나미로 500만의 이재민과 20만명이 사망하였는데, 언젠가 김홍도 목사님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관광지인데 하나님 믿지 않는 나라 라고 하면서 불신에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몰지각한, 부끄럽기 까지한 망발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진리가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욥의 친구들 수준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사람들이 스스로 신본주의라고 하니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믿음을 잃고 미끄러질 뻔 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악한자들이 잘 되는 것에 그만 미끄러졌다고 하는데, 그 것은 중심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욥의 논리에 빠진 것입니다. 선과 악의 논리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악한자가 잘 되는 것 같은 것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삶의 기준이 부, 권력, 명예, 물질의 풍요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풀잎에 맺힌 이슬 같다고 합니다. 안개같이 허무하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기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보고 비교하면서 미끄러진 것입니다. 그러나 잘살고 못사는 것에대한 기준과 그 내용이 여전히 잘 알길 이 없습니다. 시73:16절에서 인생의 문제를 풀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지혜에 고개를 끄떡이지만 마음으로는 확신이 안갑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하고 말했다며”하는데, 이것은 나도 그렇게 적당히 살아야지 하고 마음이 설왕설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지혜로운 것은 이러한 알 수 없는 미쳐 깨달을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혼자 끙끙 앓은 것이 아니라,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난해한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은 성소였습니다. 마치 욥이 마지막에 하나님과 일대 일로 서있는 형국입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고, 맛 볼수 있을까요?

신6장은 성도들이 마땅히 가야할 유일한 한 가지 길에대해 이야기 해 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모두 뫃아놓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치라 하면서 5절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이것을 가르치는데 어떻게 가르치는 가 하면 집에 앉아 있을때나 길을 갈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 중 근심과 걱정을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구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을 때, 그 먼저라는 말은 나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가치에 제일 우선하는 것, 가치 1위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대한 사랑, 헌신을 삶 속에서 제 일로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이 1등이 됩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온갖 잡다한 것들이 내 안에서 1등하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집단들이 질서 정연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 무리들 속에 우두머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 집단은 와해대거나, 싸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내 중심에 가짜 주인 말고 진짜 주인이 주인되지 않으면 욥이 자기 의로움과 친구들의 주장에 갖혀버린 것처럼 그렇게 헛된 것에 모든 삶을 다 쏟아 붓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하나님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판단하는 삶, 니가 옳고 그르니 하며 따지는 삶, 자기 개인적인 욕심에 자기 인생을 다 쏟으며 그것이 인생의 행복인 것처럼 느끼는 허무함에서 벗어나 은혜의 삶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에서 브레드 피트가 열연한 둘 째 아들이 마약과 도박으로 인해 누군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를 당한 후에 목사인 아버지가 설교를 하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둘째를 다 이해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도박, 방랑, , , 그러나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에
“실제로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을 거의 돕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무엇을 도와야 할지 모르기도 하고 때로는 원하지 않는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합니다. 완전
한 이해 없이도 우리는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교회 텃밭의 작물이 어떻게 크나요? 집의 강아지나 가축들이 어떻게 자라나요? 여러분들의 가정의 자녀들이 결국 모든 장애와 시험을 극복하고 어떻게 성장하나요? 사랑입니다. 요한사도는 요일4:10-12에서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
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
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이라 합니다. 18에서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합니다.

욥이 제안한, 아니 온 인류가 풀려고 하는 정의와 불의, 의로움에대하여, 톨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고민하였던, 지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을 국가가 몰수하려고 하는 즈음에 진정 의로움이란 하나님의 생명의 사랑으로 풀어나가지 않으면 풀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강 줄기가 우리들 속에 흘러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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