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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히 돌보시는 주님(성령강림후일곱번째주)

하늘기차 | 2013.07.07 15:09 | 조회 2094


각별히 돌보시는 주님
성령강림후일곱번째주 출14:13-18;시4:1-8

우리는 언제 기도할까요? 오늘 말씀에 지금 시편 기자는 곤궁에 빠져 막다른 길에서 어떻게 이 곳을 빠져나와야 할 지를 구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빠져나오는 경험을 조상들을 통해 하였습니다. 출애굽하여 홍해를 앞에 두고 이스라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앞에는 홍해요,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달려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만물을 주관하시는,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기도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손 길입니다. 그런데 출14:11을 보면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하였다고 합니다. 원망은 이스라엘의 트랜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13절에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지켜보는게 아닙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무어라 말씀하는가 하면 “너는 왜 부르짖느냐?”고 핀잔을 주십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지켜 볼 수 있었던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짖었다’는 것은 모세가 스스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대하여 하는 말입니다.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너의 기도를 들었는데, 왜 망설이고 있느냐, 앞으로 나아가라고 이스라엘에게 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이 막다른 길에 다달아 어떻게 빠져나올지 모를 때에 하나님은 17절 말씀을 보면 ‘이집트 사람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이 이래! 할 수 있지만 바로와 모세와의 기나긴 싸움을 보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희를 뒤 쫓게 할 것이라 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을 막다른 곳에 내 모는 이집트에대하여 일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가 마지막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을 광야로 보내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 까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빠져나간 이스라엘에대한 소식을 들어보니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 태어난 것들의 죽음으로 이집트가 초죽음 상태였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또 이집트의 경제를 떠 받치고 있는 하비루 노예들을 내어놓으므로 이집트의 국가경제를 휘청하게 하는 것은 이집트를 책임지는 바로로서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비루 노예들이 믿는 하나님의 재앙으로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지들이 가면 어딜 가 하는 마음으로 홍해 앞에서 서성대는 이스라엘을 향해 군사력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달려간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보잘 것 없는 히브리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데 말입니다. 바로는 자기 무덤을 판 것입니다. 그의 끊임없는 욕망이 이집트 군대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을 뒤 쫓게 하였고, 결국은 홍해에 수장되고 맙니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이 서성됨으로 바로에게 빌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막다른 골목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아 온 이스라엘이 기도하여야 마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편과 불만만 넘처났습니다. 바로는 이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14:20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앞에서 인도하던 구름기둥을 진영 뒤로 돌려 이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아 이스라엘은 환하게 밝히고, 이집트 진영은 어둡게 하여 이집트가 밤 새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바다위로 팔을 내밀게 하셔 밤새 강한 동풍을 불게 하여 바닷물을 뒤로 밀어내어 땅이 드러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때 사탄 마귀는 신속하게 공격해 들어와 무장해제를 시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시작하는 일은 마치 뿌리없는 나무요, 모래위의 집입니다. 그것은 신앙인에게 수치요,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건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첫 번 째 태어난 것이 모두 죽음을 당할 때, 이스라엘에 속한 것들은 그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바르면 여호와의 신이 그 집은 넘어가 죽음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서 시와 역사, 지혜, 예언을 통해 끊임없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피 속에는 이 유월절 사건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출발은 바로 이 유월을 통한 것입니다. 한자로 넘을 유(踰), 넘을 월(越)입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빼사흐( Pesah)이고, 라틴어로는 빠스카(Pascha)라고 하며 영어로는 Passover입니다.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넘어가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하였습니다. 넘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넘어간 상황입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내 스스로는 넘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넘어간 것을 체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것을 빠스카라고 하여 신앙과 전례에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데, 신구약을 전부하여, 또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유월’이라는 것은 그렇게 신앙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싸움과 분쟁에서, 화해와 평화로, 미움에서 사랑과 관용으로. . .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어떻게 보면 삶은 넘어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곳은 그런데로 알겠는데, 넘어가야 할 저 곳은 잘 모릅니다.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처럼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짜증이 나오고, 미워지기 시작하고, 원수맺기 시작합니다. 교우여러분 이렇게 막혀있을 때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냥이 아니라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가로막히자 건너가기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가로막히면 숨이 막힙니다. 두렵습니다. 이럴 때 시편기자는 주님께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시4:3절 말씀에 보면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시는 것을 기억하라 하면서 주님께서는 부르짖을 때에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들어주신다는 말은 영어성경에 보니'response'가 아니라 'hear'라고 되어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응답해 주신다는 개념 보다는 들어주신다는 말이 더 깊고 품이 넓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각별히 돌보아 주신다는 것일까요? 헌신한다고 합니다. 한글개혁, 이나 공동 번역에서는 경건한 사람이라 되어있습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공경할 경(敬), 공경할, 정성을 다할 건(虔)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수 많은 벼랑 끝, 막다른 골목에 처했던 사람입니다. 시56편을 보면 정황을 설명하는 글에서 블레셋 사람이 가드에서 다윗을 붙잡았을 때 라고 합니다. 삼상21장, 27장을 보면 그 실제 상황을 볼 수가 있는데, 사울에게 쫓기다 쫓기다 결국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에게로 피난을 가는 처지가 됩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나아가 침을 질질 흘리며 벽을 박박 긁으며 미친짓을 하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다시 블레셋에 들어가 작은 성읍을 하나 얻어 블레셋에 부역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사울왕이 다윗을 몰아붙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더 이상 발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다윗을 옹호하던 아히멜렉 제사장과 함께하던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이 몰살 당할 정도였으니 그 잔혹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쫓기는 와중에도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종을 사람이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두 번 다 사울을 살려줍니다. 시56에 보면 원수들이 나를 거칠게 공격하고 짓 밟아 3절에 보면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나에
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
겠습니까?”라고 고백을 합니다. 두렵다는 것입니다. 저 쪽으로 넘어가야 하겠는데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찬양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감히 어찌하겠느냐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며 느끼는 것은 정말로 두려워 할 대상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은 태생적입니다. 동굴 속에서 생활하던 원시시대의 삶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저 넘어는 항상 존재하는데, 그 넘어의 일이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습니다. 바로 유한한 인간의 태생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저 쪽에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망 저 넘어의 희망, 전쟁과 싸움 저 넘어의 평화, 미움 저 넘어의 사랑, 용서, 관용, 벽 쌓기를 넘어서의 화해, 불신 저 넘어의 믿음, 신뢰, 저 넘어의 것들, 지구, 태양계, 은하계 저 넘어의 것에대해 우리는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음도 마찬가지지요. 이 때에 우리는 이 두려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해야한다는 것, 즉 저 넘어의 것,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에 머물러 있지 말고, 저 넘어의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분에게 경외를 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두려움을 쫓아낼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도 인용을 하였는데 렘9:24입니다.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
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
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쪽에, 이 쪽에 없는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경외함을 받아야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광야로 나아간 이스라엘이 마땅함에도 하나님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람과 자연을 두려워 합니다. 홍해 앞에서 두려워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라고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하는지를 보라는 말은 바로 지혜를 뜻합니다. 방금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저 넘어에대해 두려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태생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넘어의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 곳에서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떨칠 수 있으려면 바로 그 두 분을 알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요17:3은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을 떨치려면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앎은 지혜의 앎입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성의 지혜로는 저 넘어의 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깨우치고, 알게 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벧후3:18은
“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합니다. 다윗은 시56:4에서 두려움이 온통 자기를 휩싸는 중에도 우상이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 한다고 합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냐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 아는 지혜입니다. 경건은 지헤로부터 옵니다. 깨닫지 못하면 경건할 수 없습니다. 거짓 경건에 매이게 됩니다. 즉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듯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 지혜로운 자를 하나님께서 각별히 돌보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시4:6에서 시편 기자는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달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4:6에서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
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혜가 충만하니 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
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이 찿아옵니다. 8절 말씀입니다.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러한 각별한 보살핌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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