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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주시는 영(2013년 4월21일, 부활절 제 4주)

하늘기차 | 2013.04.21 16:27 | 조회 2461


생명을 주시는 영
2013년 4월21일(부활절 제 4주) 고전15:45;눅7:11-17

성경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읽을 때 느끼는 것은 우선 당혹스럽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야 하나?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다시 죽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로운이 아빠가 가까운 젊은 애기 엄마인데
위급하다며 기도를 요청하며 그 안타까움을 이야기 할 때, 그리고 결국은 운명을 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갓 난 애기가 있는데 하며 다시 살아나면 얼마나 감격적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성경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을 우러러 기도하는 엘리야 그리고 바울, 베드로 사도의 신앙이 떠 올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오늘 이러한 신앙은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죽음을 앞에 놓고 다시 살리실 것을 간구하는 믿음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아직 이러한 기도는 생각 조차 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왜 지금 이 시대 속에서는 다시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교우 여러분들도 모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전에도 이야기 하였지만 이렇게 죽었다 살아나는 이야기를 우리가 종종 한 여름밤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에 둘러앉아 수박 잘라 먹으며 들려주면 이건 영락없이 납양특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에대해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9장에 보면 욥바의 여제자 다비다가 죽자 욥바의 사람들이 마침 욥바에 내려와 있던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나서 홀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이 다비다를 살려냅니다. 성경은 다비다에대해 자선을 많이 베푼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여제자 다비다가 죽었을 때 욥바의 과부들이 그렇게 슬피 울고, 안타까워했던 모양입니다. 죽지 말었어야 할 사람이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 여제자 다비다, 헬라어로는 도르가인데, 그 이름의 뜻이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슴’인데, 이 여제자를 살려낸 것입니다.

그렇숩니다. 주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 때에는 그만한 이유와 뜻이 있습니다. 죽은자를 살리는 경우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죽은 다비다를 살릴 때에는 교회가 어렵게 어렵게 세워져 나갈 때입니다. 복음이 이제 세상 속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죽음과 신앙을 맞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실제 많은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 속에서, 사자굴에, 원형경기장에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온 곳에 드리울 때에, 죽음의 힘이, 죽음의 권세가 강하게 힘을 뿜어낼 때에 주님께서 귀한 주의 여종을 살리셨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생명이시며, 죽음을 이기시는 분,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지않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이 기적이 요한복음에서는 마지막 7번째 기적인데,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 속에서 죽음의 권세를 깨고 이기시는 부활의 비죤을 보여주십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교회라고는 어느 곳에도 세워지지 않았던 때 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를 돌아보면 어느 곳에도 교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교회 마다 기적을 일으키시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훼손되고 말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죽은자가 살아나고, 저 교회에서 전의식이 없이 몇 년 째 누워있던 사람이 한 순간에 일어나, 이 곳, 저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필요한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위해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생각이 드는 것은, 꼭 죽었다 살아야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지금은 남양만에서 두레교회 목회를 하고, 최근에는 수도원 운동을 하겠다고 변신에 변신을 더하는 김진홍 목사님이 청개천에서 도시빈민 목회를할 때, 폐결핵으로 다 죽어가는 사람이 온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 살아난 사람의 부인이 찿아와서 내 남편 내 놓으라고 하며 소동을 피웠다는 겁니다. 왜그런가 했더니 끊었던 술을 다시 먹기시작하여 한 겨울에 술 마시고 동네 길 모퉁이에 쓰러져서 동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이렇게 살아난다면 차라리 죽음 만 못한 것입니다. 참 잘 살아났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지 왜 살아났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을 선포합니다. 성경의 부활도 이렇게 다시 살아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고전15:45에 보면 부활에대해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새 생명의 본’이 되었을 뿐만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삶의 변화의힘이요, 다시 살리는 능력이요, 새 생명을 주는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언젠가 한 외국인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자기가 본 천국에대해 간증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대단했었지요. 그 분의 이야기인즉슨 천국에 가니 무엇도 있고, 이 것도 있고, 저 것도 있고, 없는 것 없이 쏟아내는데,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보니,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그 분의 이야기는 이 땅에서 누리던 욕망을 천국 가서도 그대로 누리겠다는 것이요, 아니 이 땅에서 미쳐 못 다한 것 천국에 가서 다 얻겠다는 지상에서의 욕망을 그대로 구현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바로 그 것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신 욕망의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SBS에서도 방영이 된 이야기인데, 한 교회의 예배당 벽에 예수님의 초상이 나타나서 기적이 나타났다고 한 때 시끌벅적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놀란 것은 그 기적의 초상이 아니라, 그 기적을 보러
온 성도들을 위해 봉투에 ‘예수님초상현현감사헌금’봉투, 그리고 그 기적현상을 어떻게 보면 더 실감나게 볼 수 있는 가에 대해 A4용지에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안내지를 예배당 입구에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새로워졌고, 불신에서 신앙으로, 거짓에서 참으로, 두려움에서 용기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변화, 이것이 기적을 통해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적의 뜻, 의미, 하나님께서 이 기적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 깨우쳐 주시려고 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지는 보지 않고, 떡 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떡을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한 번으로 족한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말씀드렸지만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여전히 옛날의 나쁜 습관, 언행, 불신, 절망의 몸짓, 폐쇄적인, 닫힌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차라리 그냥 죽음만 못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인이라는 성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성에서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례행렬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을 앞장 세우고 성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관 안에는 외아들이, 그것도 과부의 외아들의 시신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마도 뒤에 따라오는 어머니의 울음이 그 주변을 진동시켰을 것입니다.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최대의 숙적인 죽음이 맞 부딪쳤습니다. 죽음들이 뫃여있는 묘지로 향하던 죽음의 행렬이 생명과 만나자 그만 그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행렬은 화려하고, 어떤 장례는 장엄하기도 합니다. 특히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장례를 보면 대단합니다. 왕의 장례도 얼마나 장엄하고 화려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속은 죽음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보기좋게, 화려하게 해 놓아도 죽음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좀 더 가까이 관에 접근하여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말을하게 되었고, 그 곳에 뫃여있던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지금 장례행렬에 서 있나요? 아니면 생명의 행렬에
서 있나요? 다시 말하면 오늘 말씀에서 처럼 시신을 앞 세워 묘지로 향하는 죽음의 행렬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누구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관을 중심으로 뫃여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죽은 사람을 죽음의 동산에 묻고 슬퍼하는 일, 아니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어디 슬픔뿐이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죽음이 생겼습니까?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결국 평생 동안 자기 욕심, 자기 욕망에 묶여 헤메다가 크게 벌린 죽음의 구덩이로 빨려 갈 운명에 처해있지는 않은지요? 무절제한 욕망에 허우적거리지는 않는지요? 거짓되고 허황된 바램들에 속아 지금껏 줄달음쳐 오지는 않았는지? 구하지 않아도 될 것을 구하며 허송세월하며 살지는않았는지?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향락에 빠져 사는 이는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죽었다는 것에대해 단지 숨이 끊긴 것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에 붙들려 있는 영혼에대해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욕망, 헛된 소망, 무절제한 욕구에 붙들린 사람에대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었다 살아나도 다시 옛 모습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무어 기적인가요?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지요. 진정 참된 부활은 오늘 말씀 고전14;45 처럼 새 생명을 주는, 새 생명을 전하는 영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 편의점 주인의 자살 이야기를 언론보도를 통해 듣고, 보았는데,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이 어떻게 사람들을 노예로 전락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요즈음의 사회 문제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성경의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인류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더 듭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편의점과 다른 가게입니다. 어제 동천동 이우생협에서 장터가 열렸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거나, 만든 것을 내놓고 장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 큰 장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윤 보다는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사고 파는 장이 열린 것입니다. 삶의 이야기 꽃이 피어납니다. 서로 간에 삶의 수고를 격려하고, 나누는 것이 더 소중한 자리일 것입니다. 안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팔리면 팔리는 대로 말입니다. 생협, 신협, 의료협동, 사회적 기업, , 등 생명을 살리는 일들을 만들어 가야한다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원주에서, 지금은 가기가 시워졌지만 오래 전에 원주는 머나 먼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원주의 장일순 선생님께서 한 살림을 창설했습니다. 살림이 무엇일까요? 글자그대로 살린다는 것입니다. ‘한’, 그러니까 크게, 또는 유일하게 살려보겠다는 뜻입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로 만들어 내는 먹거리가 아니라 생명의 밥상을 차리기 위해 유기농 먹거리를 유통시키고자 창업을 하였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리석은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한 살림은 그나마 협동의 불모지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모범입니다.

이렇게 고전14;45 말씀처럼 새 생명을 주며, 새 생명을 전하는 영적 존재가 되는 것에대해 요일3:14는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
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육적인 죽음만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기적이고 부활입니다. ‘새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마음에 자물쇄를 꾹 잠그고 죽음 가운데서 머물지 마십시오. 죽음의 냄새가 여러분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을 죽게합니다. 이 죽음의 힘은 파괴력이 제법 셉니다. 우리가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지 마십시오. 은혜에 머물며, 그 은혜를 나누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사는, 즉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살았데요. 그런데 뜻밖에도 토끼가 거북이를 짝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늘 느리고, 또 등에는 무거운 짐짝을 지고 힘들게 사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그러한 토끼의 애뜻한 마음을 몰랐다고 합니다. 하루는 토끼가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늘 자괴감 속에 살아가는 거북이의 기를 살리고자 거북이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자고 제의를 합니다. 그날 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는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 한번 붙어보자!"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 나란히 손 잡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 하던 토끼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네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의 기쁨이 자기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의 전도사가 됩시다. 미움은, 원망은, 불평과 시비는 저 멀리 보내 버리고 이제 사랑합시다. 부활은 생명을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 주께서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함으로 영적 생명을 나누는 부활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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