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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부활 !(2013년 4월14일, 부활절 제 3주)

하늘기차 | 2013.04.14 17:03 | 조회 2395


지금, 여기서 부활 !
2013년 4월14일(부활절 제 3주) 고전15:35-42;빌2:12-18

최근 미국의 팝 가수 로드리게즈에대한 다큐멘터리‘Serching for Surger man"를 보았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의 모태인 디트로이트에서 멕시코 이민자인 자동차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노래 하기를 좋아하여 60-70년대를 풍미하던 통기타에 매료되어 취미로 노래를 부르면서 낮에는 건설 노동 일을, 밤에는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노래 실력이 알려지면서 어느 유명한 프로듀서를 통해 첫 음반‘Cold Fact'를 발매하는데, 주목 받지 못하고 사장되어버립니다. 6장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 들어보니 제 마음을 움직이고, 제 어깨를 흔들게 하는 노래였습니다. 그 음반을 들어 본 전문가들 역시 그의 멜로디, 선율의 탁월함, 그리고 시적 가사의 탁월함에 매료되어 두 번 째 앨범을 완성도 높게 작은 협주단도 불러 ‘Coming From Reality’음반을 내는데, 역시 실패 결국 두 장의 음반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로드리게즈의 노래가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 남단의 한창 인종차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남아공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그의 음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회의식을 담은 로드리게즈의 시적인 가사와 마치 예언자 같은 그의 음성은 남아공의 뮤지션들 뿐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큰 영향을 끼쳤는데, 남아공 정부는 그의 노래를 모두 방송금지곡으로 정합니다. 우리나라의 군사 독재 시절의 김민기나 여러 가수들의 노래가 금지 곡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보수적이었던 남아공 정부에게는 로드리게즈 역시 ‘불온한 사상’을 퍼뜨리는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금지하는 그 당시에 로드리게즈의 노래는 남아공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끌어 앉아주는 노래요, 막힌 담을 허무는 그러한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래가 70년대의 남아공 국민들의 마음을 적셔주며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가면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지에대한 궁굼증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로드리게즈에대한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공연 중에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했다는 둥, 공연 중 분신하여 극적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로드리게즈의 열렬한 팬이면서 중고 LP판 상점을 윤영하던 스테판과 음악 저널리스트인 크레이그라는 사람이 로드리게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의기 투합하여, 우유 팩에 그의 사진 까지 넣은 광고를 실어 행방이 묘한 로드리게즈를 찿기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놀랍게도 로드리게즈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두 장의 앨범이 모두 참담하게 실패하고 난 1972년 무렵, 다시 건설 노동자의 삶으로 돌아갔고, 결혼도 하여 세 딸을 키우며 살게됩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자니 캐시처럼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전화도 없이 도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탁월함은 그는 노동자이면서 대학에 들어가 철학과 논리학, 그리고 윤리학을 공부하였고, 그 후에 디트로이트시를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으며 디트로이트 시장으로 출마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평범한 노동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로드리게즈를 찿아다니던 두 사람이 20년이 지나 1997년에 로드리게즈와 극적으로 전화 통화를 하고, 만나게 됩니다. 죽은 줄 알았던 로드리게즈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만났고, 그리고 두 열열한 팬은 로드리게즈를 1998년 3월 남아고의 수도인 케이프 타운에 초청을 합니다. 27년의 침묵을 깨고 5천명을 수용하는 공연장에서 극적인 공연이 시작됩니다. ‘I wonder'라는 강한 베이스 기타의 울림이 ‘두 두 두 두~두~두 두’하면서 노래의 시작을 울리지만 로드리게즈는 선뜻 무대에 서지 못하고 몇 분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지만 그가 서 있다는 존재감 만으로도 무대와 공연장은 재회의, 아니 다시 살아난 로드리게스를 만나는 기쁨에 서로가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전 15장에서 부활에 대하여 우리가 씨를 뿌린다고 합니다. 벼의 부활은 벼 이삭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물고기의 부활은 물고기 알에서 오는 것이지 개구리 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개구리 알의 부활은 개구리입니다. 모두 각 자의 존엄성을 가지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홍택이의 부활이 ‘섭’이나, ‘삼열’이의 부활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홍택이의 부활은 홍택이의 한 생애의 삶의 씨앗으로부터 드러내는 존엄한 자기 영광인 것입니다. 온갖 피조물이 생명이 있든 없든 그것은 인간의 관점이고, 살아계셔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은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명이라는 개념이 그저 단순히 살아있는 입장에서 숨쉬고 행동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모든 피조물이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면 피조물 중에 어떤 탁월한 존재도 그는 죽은 것입니다. 살은 것 같지만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스스로도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일부러 죽음에대해 알고 싶지도 않고,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죽어도 살며, 살아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36절 말씀에 무어라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죽음은 하나님 떠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또 다른 죽음인데, 그러니까 로드리게즈가 두 장의 음반을 발매했지만 첫 앨범은 6장 밖에 팔리지 못할 정도로 참패를 당했는데, 죽은 것이지요. 그는 음악인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앨범에 수록된 ‘I WONDER', ‘Suger Man'등의 노래가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에서 저항의 노래로 입에서 입으로 불려지기 시작하여, 30년이 지나 5천명이 운집한 남아공 케이프 타운의 공연장에서 부활합니다. 그 곡이 그대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 부활에대해 고후15:38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고,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드리게즈의 노래에 몸을 주신 것입니다. 로드리게즈는 미국 자동차 공장 지대인 디트로이트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노동자로 살면서 당시 디트로이트의 삶의 모습을 노래로 부르며 자기 삶을 살았습니다. 열심히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두 개의 앨범을 냈지만, 오늘 말씀으로 보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로드리게즈는 음악의 씨앗을 성실히 뿌리고 음악인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혀 예측하지 못하게 38절 말씀대로 ‘고유한 몸’을 주어 로드리게즈의 노래 한 곡 한 곡을 극심한 인종차별로 고통당하는 남아프리카 사람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30년 후에 로드리게즈를 남아프리카의 5천명의 사람들 앞에 세워 함께 부활의 영광을 맛 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저는 부활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저 먼 훗 날 죽은 후의 부활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려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기 직전, 동생 마르다에게 부활을 묻자 마르다가 요11:24절에서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안다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
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씀은 마르다가 이야기 했듯이 먼 훗 날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이 삶의 자리, 이 역사적 시간 속에서 부활이 일어나는 것을 믿느냐는 뜻입니다. 부활은 먼 훗 날에 일에 한정되리만큼 그렇게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일어나야할 생명의 빛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다시 태어나는 것에대해 이야기 할 때에도 니고데모가 자꾸 하늘 에대해 집착을 보이자, 땅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겠느냐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고전15:37 이하의 말씀처럼 우리는 씨를 뿌리고, 주님은 부활의 몸을 주시는 것입니다. 뿌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거둘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부활의 씨를 뿌리지도 못하니 언제 부활을 맛 볼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이 번 주에 심방을 잘 다녀 왔습니다. 심방을 하면 이야기가 풍성해 집니다. 이야기야 말로 생명을 담을 수 있는 멋진 그릇입니다. 어제 아침에 정은이를 만나고 왔습니다. 7년 전 뇌 수술을 받고 식물 인간으로 누워있던 정은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 같이 앞 뇌를 일부 절단하였음에도 그래서 언어 능력을 상실했음에도 지금은 말을 하고, 이제는 보호자가 자신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 다리에 힘을 주어 도움을 줄 정도가 된 과정을 죽 봐 왔습니다. 권사님, 이모 할머니, 그리고 이모인 연혜경 집사님, 그리고 이모부인 이 섭 집사님, 안병우 집사님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새벽에 정은이를 위해 기도 할 때 마다 ‘왜?’, ‘언제까지?’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왜 하나님은 이 키도 훤칠하고 이쁜, 그리고 주일이면 주일학교에서 어린영혼을 위해 교사로서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던 딸을 하루 아침에 이렇게 하셨을까? 그런데 물론 이렇게 회복되어가는 것도 기적이지만 ‘언제까지 일까?’ 하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어제 나눈 말씀 빌2:12-18중 우선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에대해 읽고 그 말씀을 나누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통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빌립보 교인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농사꾼이 할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서 못자리 내려고 고운 흙을 받고, 벼의 싹을 틔워 모종을 하고 그리고 로타리 치고, 거름하고, 모내기, 피뽑기 등. . . 벼농사를 지으려면 무수한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와 바람을 보내지 않으신다면, 그리고 벌들이 수정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농사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일 하나님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할 일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벌이 하는 일을 사람도, 하나님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그렇게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일단 정은이 어머니이신 연권사님께서 지금의 상황 속에서 정은이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최선을 다해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14절 말씀처럼 불평과 시비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평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15절 말씀을 읽어보니 아! 구원을 위해 불평과 시비가 아니라 기쁨으로 정은이와 함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하는 당위성을 보았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
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
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아! 이제 알았습니다. 왜 정은이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금 우리와 함께 하는지 말입니다. 시대가 구부러지고, 뒤틀렸다는 것입니다. 정은이 몸의 왼 쪽에 마비가 있습니다. 좀 뒤틀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뒤틀려 있는 정은이와 가족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통해 왜곡되어버린 세상 속에 순결함과 흠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하도 거짓 된 것이 많아 하나님께서 정은이와 그 가족,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 모두의 흠없고 순결해짐을 통해 온전함을 드러내 보이시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세상 속에서 별과 같이 빛나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모두 ‘거짓 목사, 가짜 지도자, 가짜 스타’를 바라 보며, 거짓된 꿈을 부풀리는 시대 속에 정말 스타가 무엇인지를 정은이를 통해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6절 말씀처럼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아닌 것에 목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결코 헛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16절 마지막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 말씀은 ‘왜?’라는 질문과 ‘언제까지’라는 질문에 답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은이와 함께하는 이 7년의 날들이 세상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가족들은 묵묵히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근원에서부터 오는 기쁨을 맛 보며 하루 하루를 기꺼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진짜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물으실 때 오늘 빌립보서 말씀 2:16절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
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
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성도들의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내야하는 삶을 신실(信實)하게 살 때, 그런데 어떻게 신실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실(實)은 있는데, 신(信)은 없기가 다반사이거든요, 그러니까 열심, 행위는 있는데 신, 즉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깨우칠 때 신실한, 그러니까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은 모르지요, 어떻게 눈물로, 날마다 기도하며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삶을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직 사슴이 시냇물을 찿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구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지요. 어떤 사람은 부끄러운 부활로, 어떤 사람은 자랑하는 부활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자랑거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이미 자랑거리를 이 세상에서 다 드러내 바닥이 드러나지는 않았는지요?

정은이와 함께하는 세월이 아마도 나는 죽고, 주님 만이 사는 과정일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죽지않고 어떻게 부활하느냐고 말씀합니다. 볍씨가 볍씨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벼로 부활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볍씨는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아니라 불평과 시비로 점철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로를 베푸십니다. 성도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쫗아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없으면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여정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여행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위로를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늘 위로로 함께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목이 마를 때, 바위에서 샘을 터뜨리셨습니다. 결정적으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여정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이 많은 위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그 위로함에 목을 맵니다. 그러면 주저앉을 수 밖에 없고, 더 큰 위로를 받고 싶어 애굽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위로는 위로이고,

우리의 목표는 가나안입니다. 바로 부활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말씀에 의지하여 신실한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은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에 우리를 별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며, 또한 주님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과 성령님과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존엄과 존귀를 드러내 초시간적, 초우주적 하모니를 연출 할 그 영광의 날에 우리는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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