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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2013년 4월 7일, 부활제2주일)

하늘기차 | 2013.04.07 15:39 | 조회 2128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2013년 4월 7일(부활제2주일) 고전15:12-20

최근 회자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이제는 고전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토대 교수인 강상중님도 ‘살아야하는 이유’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최근 베를린 예술대 교수로 있는 한병철님의 ‘피로사회’라고 하는 책에서도 요지는 해석하자면 현재의 금융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고전적 행복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자본이 인간을 노예로, 기계로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깨우침 이래로 개인은 보다 자유로워졌지만 그 자유로움이 지금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을 내면에서부터 갉아먹는 형국입니다. 공동체, 즉 인간과 인간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나누는 그러한 마을, 또는 동네를 잃어버렸습니다. 대안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자본의 시스템과 힘에 굴하지 않고 자유로움, 평화로움, 마치 자연의 식물들이 한 겨울을 지내고 생명의 싹을 틔우듯이 그렇게 피워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주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나 환경을 떠나 초지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행복 보다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행복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부활의 행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기쁨은 생명의 근원에서부터 올라오는, 생명의 본질과 맞 닿아있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전도서의 솔로몬도 세상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하는데, 그러나 헛되지 않은 것 하나 있으니 기쁨이 있는 삶인데 사람이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것은 어느 절대자가 위로부터 낮은 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그러한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물이지만 단순히 시혜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이 본래 하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진작부터 깨달은 것이지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특히 그 부분을 초지일관 강조하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과 하나다 랄지, 나는 하나님의 뜻 만을 이루려 왔다 랄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든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인 자신을 드러낼 때 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명목상으로는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밖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을 종교와 제사와 율법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자기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나누고 있는 생명의 본질을 깨달아, 하나님 안에 포도나무 비유처럼 머무는 것입니다. 전3:12은 ‘이제 깨닫는다’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 하는 것, 사람에게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합니다. 여기서 헛된 것과 좋은 것의 차이를 가만히, 찬찬히 살펴 보면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다시 말하면 시혜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하나님은 창조자의 존재감을 가지고, 나는 피조물의 존재감을 가지고, 부부는 부부로서, 부자지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노사 간에 자꾸 넘어가지 말고 존중하며 함께 있는 것 나누며 사는 것, 그러니까 무엇을 가지고 있어서 그 것에 만족하는 자기 안에 갇힌 즐거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과 관계함으로서 참 내 안의 생명의 기쁨을 퍼 올리는 삶이고, 그 삶을 다른 존재 인간 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나누는 생명의 모습인 것입니다.

흐, 흐, 흐 성경 공부를 하다 보면 이렇게 신앙적인 논리를 죽 펴다가 그 논리를 한 줄기 샘으로 이어주는 말씀을 만날 때의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늘 말씀하지만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늦기 전에 말입니다. 충분히 다른 것 보다 먼저 시간을 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지혜를 맞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눅20장 27절 이하의 부활 논쟁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형이 후손 없이 죽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형의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수혼법을 근거로 부활을 비아냥 거릴 때, 예수님은 38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
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 아니 모든 피조물들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는 단순히 선물일 뿐만 아니라, 아니 선물은 선물인데 받는 사람이 오해로, 착각으로 잘 못 생각하는 시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피조물로서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분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행복이 아니라 기쁨이라 했는데, 복음이란 바로 기쁜 소식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고전 15:3,4는 그 기쁜 소식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
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 다시 사는 것입니다. 왜 영원불멸이 아니고, 또 불로장생이 아니고 부활일까요? 글자그대로 성경은 ‘다시 사는 것’에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우주의 생명과의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연코 아닙니다. 세상에서 도피해 벗어나려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부활은 글자그대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육은 죽고 영혼만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 어느 철학, 어느 사상에서도 볼 수 없는, 인간의 지혜와 종교로는 드러낼 수 없는 ‘몸이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성경에 보면 중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에대하여서는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종교 뿐 아니라 예술과 문학, 철학에서도 ‘거듭남’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부활’, 즉 ‘다시 사는 것’에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참선이나, 고행, 요가 같은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닫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지고, 느끼는 체험이요, 삶, 즉 생명인 것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아테네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대해 말하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며, 한 쪽에서는 비웃기도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시간이 나면 다시 듣겠다고 합니다. 다시 듣겠다는 것은 역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완곡히 표현한 것입니다. 헬라인 들은, 헬라 철학은 몸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늘 이 시대의 어떤 철학과 종교도 ‘다시 사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종교나, 철학,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그 넘어에 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머리 속이나, 어떤 종교적 성찰과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을 만지고, 보고, 느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두 번째 주를 맞이하며, 벌써 부활의 감격을 잊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누가복음 8장에 보면 ‘무덤가에 사는 자’에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며, 힘이 워낙 세어, 쇄스랑으로 묶어두었지만 다 부수어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무덤가에 산다는 것은 죽음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10년, 아니 5년 전 만해도 이 ‘무덤가에 사는 자’의 이야기는 어느 정신 줄을 놓아버린, 그래서 일반인과 함께 살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 다시 읽어보니 이 모습은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것을 느낍니다. 지금의 세상이 사람들을 그렇게 되어가게 합니다. 폭력적이어서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할 줄 모르게 하는, 더 나아가 스스로를 자해하는 죽음에 붙들리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폭력이지요, 거짓이지요 그리고 그 죽음이 워낙 힘이 세거든요, 그 죽음이 폭력을 휘두르면 아무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 이 한반도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죽음의 힘으로 위세를 부리고 있나요? 눅17:37에 보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또한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안타까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평화에대해 알기를 원하지만 평화에대해 무관심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한반도를 감도는 죽음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말씀의 시대적 배경과 일치합니다. 이 나라가 자꾸 이데올로기를 따지며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다면 결국 죽음의 일들 만이 가득할 것이고, 그러면 독수리가 자연스럽게 날아올 것입니다. 벼랑끝에 내 몰린 사람들이 간신히 숨이라도 틀려고 대한문 앞에 천막을 치고 우리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약속을 지켜달라고 부르짖으며 지냈는데, 그 모습이 보기 싫어 공권력을 동원하여 폭력으로 제압을 합니다, 그 힘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죽음이요, 평화가 아닙니다. 결국 독수리를 불러 뫃을 뿐입니다. 독수리는 생명, 즉 평화가 있는 곳에는 오지 않습니다. 죽음의 폭력이 넘칠 때 독수리는 몰려옵니다. 이 독수리는 로마를 상징하는 휘장의 로고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미국의 휘장과 로마의 휘장이 같습니다. 최근 한반도의 상공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독수리가 날아올랐습니다. B-25에, B-2 까지 핵 항공모함에 온갖 첨단 무기들이 폭력을 드러내며 사자같이 덤벼듭니다. 과연 어느 나라가 전 세계에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힘을 자랑하고 있나요?

평화를 모르는 예루살렘은 결국 폭력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독수리 문양의 깃발을 내세운 로마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희망을 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이 서울을 중심으로한 수도권의 죽음과 폭력 속에서 아름답게 피워나는 평화의 꽃을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대한문 농성텐트가 철거 되자마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트윗으로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죽음의 폭력 속에 평화의 싹을 틔우십니다.

집앞 목련이 살포시 제 얼굴을 드러내고 웃던 그저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데,
어제 오늘 내내 제 마음은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 듯 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겨울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요?
삶의 뱌랑 끝에 서 있는 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미 22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의 비극은 없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그들의 절규에 귀 기울여야합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곳에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요?

상념이 깊은 밤

아마 주님도 서울시 수장의 이 짧은 단상에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 오늘 이 시대에 누가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고 있나요? 현병철 교수가 이야기하듯이 오늘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유는 많아졌지만, 자본의 힘에 붙들리어 결국 끊임없는 욕망의시스템에 붙들려 우울증과 만성적 피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기 살 파먹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3장에서 마지막 때에 고통당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처럼 오늘 이시대의 인간상은 마치 무덤가에 사는 군대귀신들려 그 영과 혼과 육이 황폐헤져 본인에게 상처를 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막을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처럼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다른 종교처럼 중생의 체험은 있으나, 아니 아직 중생의 체험, 다시 태어나지도 못하기도 한, 하여간 우리 안에 ‘다시 사는’ 부활에대한 신앙이 없어 무덤과 같은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 감추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슬퍼하며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 세상 것에 울고, 웃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아둥 바둥, 자기 이기심, 자기 개인의 것 지키며 기쁨 아닌 것에 목메여 소망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교우여러분! 오늘은 부활 두번째주일입니다. 제가 기쁜 소식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 뒤 논 옆 밤나무 아래 작은 들꽃화단이 있는데, 그 곳에 한 7-8년 전에 얼러지 꽃을 강원도 친구 있는 곳에서 하나를 케어 와서 처음자리에 심었습니다. 얼러지는 옮겨심으면 한 5년 걸려야 싹을 틔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나 저제나 했는데, 심은지 3년 만에 싹을 내고 꽃 대를 올려 꽃을 피워 그 아름다움을 만끽했습니다. 그리고 4-5년 동안 감사하게 매 년 꽃 한송이를 피워올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혹한기를 지나 올해에 얼러지가 4개가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냥 한 개의 개체로 피고지고, 피고지고 할 줄 알았는데, 글쎄 이 얼러지가 처음자리에 자리를 잡고 새끼를 친 겁니다. 더구나 가장 추웠던 혹한을 뚫고 말입니다. 한 7~8년 만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입니다. 기쁨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 자리에서 죽음의 정황 속에서 부활의 꽃을 피워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자녀들에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 자리에서 자기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 자녀의 꽃은 기다려 주면 하나님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자기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러나 간섭하고 기다려 주지 못하면 엉뚱한 싹을 냅니다. 그건 기쁨이 아닙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부활은 오랜 기다림 속에 자기 자리에서 자기 꽃 피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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