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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으라! 슬퍼하는 자여!(스승의 주일,부활절 제5주, 2014년5월18일)

하늘기차 | 2014.05.18 14:29 | 조회 3182



                                    
복이 있으라! 슬퍼하는 자여!

스승의 주일(부활절 제5주)                                                                                       눅13:1-5

 

산상수훈의 팔복은 세상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입니다. 받아들여 행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서 이 팔 복의 반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반대는 부자입니다. 얼마 전 까지 우리는 ‘부자되세요’하며 진담 반 농담 반 하였던 기억이 나는데, 또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카피를 보며 물신숭배로 가득찬 우리사회, 우리문화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부자되세요 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온유한자라 하는데, 그 반대는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 자기의 계획이나 의지를 능력있게 관철시키는 강한자이지요, 지략도 있고, 순발력도 있고,그런 면에서 성경은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자를 모세라 했으니, 모세가 거대한 제국 이집트와 싸워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그 능력은 모세의 강력한 지도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온유함, 즉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낮추는 겸손함에서 온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 까지 낮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힘, 능력, 빠르기, 등의 강력한 지도력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소수자, 약자에대한 온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강한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합니다. 그 반대가 무엇일까요? 불의요? 아닙니다. 목마다의 반대, 즉 목마르지 않은 것입니다. 간절하지 않습니다. 무관심, 지금의 경우는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요? 교회 앞에 표어가 그대로 말해주네요. ‘잊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 구절이요. 이 구절을 보며 느끼는 것은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마른 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온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주님이 눅19:40에서 그러셨어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

이다”

   그리고 긍휼이라는 말은 불쌍히 여김이지요. 복음의 본질입니다. 오늘 신자유주의의 시스템이 고착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교육부터, 기업, 교회, 삶의 모든 분야에 전방위적으로 피 같이 흐르는 것이 바로 적자생존의 논리입니다. 합리적인 것 같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give&take입니다. 사실은 이 논리는 약육강식의 논리입니다. 없는 사람은 give&take할 수 없거든요.지금은 1대1의 give&take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시대입니다. 마치 사각의 링 위에 헤비급과 핀 급을 올려놓고 give&take을 합니다. 핀급의 주먹과 헤비급의 주먹은 다르지요. 그렇게 세상은 give&take이 그 질서의 바탕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질서의 바탕은 오른뺨 치면 왼 뺨을, 속옷 달라하면 겉 옷을,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며, 달라하는 사람에게 주고, 꾸워달라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시대에 자본의 논리 속에 웃음거리 밖에 안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마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같은 자본의 시대에 긍휼을 받고 긍휼을 나누고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은혜이지요, 나의 공과가 없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없으면 긍휼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받은 궁휼, 자비를 서로에게 나룰 때 결실합니다.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결과가 아닙니다. give&take하며 노력하며, 계획하며 일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에 열매가 맺히듯이 결실하는 긍휼입니다.

     청결하다 했습니다. 깨끗해야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이 번 세월호 침몰을 통해 깨끗하지 못함을 봅니다. 치욕스럽기 까지 합니다. 이 나라가 부끄러워 이민을 가겠다고 합니다. 마음이 왜 더러워졌나요? 돈에 오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하나님을 바라야 깨끗해 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갤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지금은 희미하지만 마치 거울을 보듯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경제 논리고, 세상의 언어입니다. 자본과 짝하여 언론은 늘 불확실하며, 어렵고, 불안하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는 투명하고 분명하고, 명확 판명합니다.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화평케하는자라 했습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번 세월호에 함께 탑승하여 제자들과 함께 제주도 수학여행에 나섰던 단원고 교사들은 제자들을 위해 살신성인의 자세로 임했던 것으로 압니다. 숨진 대부분의 교사들은 탈출이 비교적 쉬웠던 5층에서 머물렀지만 세월호에 이상이 발생하자 학생들이 몰려있던 4층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모두 12명의 교사분들이 학생들과 함께했습니다. 구조된 학생들이 증언한 내용을 보면 선생님들은 목이 터져라 외치거나 절망 중인 학생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한명이라도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팔복이 이룰 수 없는 복인 줄 알았는데, 그 복을 거꾸로 해 보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팔 복이 세상에 없으면 망할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팔복이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해야 하나요? 말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세상의 공동체, 종교단체, 사회단체일 수도 있지만, 교회이지요. 당연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돌들이 소리칩니다. 최근 한국에 온 세계적 신학자 희망의 신학의 위르겐 몰트만은 인터뷰에서 가난의 대안, 배고픔의 대안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 하였습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이 번 세월호 침몰에 있어서 안타까운 것은, 그러니까 가족들과 국민들을 더 슬프고 분노하게 한 것은 희생자, 실종자의 가족의 마음을 끌어 안고 받아주어야 할 대통령과 관료 엘리트들 그리고 관과 결탁한 기업들, 그리고 언론인들이 세월호에 접근하는 모습입니다. 세월호 피해 가족들과 그리고 함께 아퍼하는 국민들과 전혀 정서가 틀립니다. 그런데 그 정서를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감성이 아니라, 그 삶의 방향성, 그 삶의 관계, 죄송하지만 계층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급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개인이라는 말이 나오고, 여전히 종북이라는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급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지켜져야 할 공공성이 있고,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공권력의 폭행, 남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용산에서, 강정에서, 평택에서, 그리고 밀양에서 어떻게 성경에나오는 ‘내피림’처럼 국가의 공권력이 국민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도시 문명을 위해 4대강의 자연을 파괴하고, 구제역, AI조류 독감으로 가축들을 참혹하게 몰살시키는지를 보아왔습니다. 오늘은 5.18 34주년이기도 합니다. 광주가 어떻게 공권력에의해 참혹하게 학살당해는지, 제주도 3.4까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세계가 핵발소 증설을 멈추었는데, 오직 한국 만이 증설을 국가 계획 안에 넣고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래도 백성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지난 대통령 선거 부정이 엄연히 드러났고, 그 주체가 누구인지도 확연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몰아간 국정원이 조작하고, 검찰이 편들어준 간첩 사건, 국방부 사이버 사령부의 선거개입도 드러났음에도 이것은 정말 탄핵대어야 할 사안임에도 백성들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 침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돌들이 소리칩니다. 8복이 살아있어야 건강한 사회요, 소수자들, 약한자들이 숨 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물신의 가치로 덮인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살아나야 합니다.

     세월호 침몰의 죽음으로 가족들이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팔복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벅차지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두 번째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내야 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창38에 보면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아들 요셉이 사자에게 찢겨서 죽었다는 거짓소식을 다른 아들들에게서 듣고 슬퍼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아들을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아들 딸들이 다가와 위로를 하는데, 35에서

“그는 위로받기를 마다하면서 탄식하였다. "아니다. 내가 울면서,

나의 아들이 있는 스올로 내려가겠다." 아버지는 잃은 자식을 생각

하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지금 세월호 침몰로 가족과 자녀들을 잃은 가족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지옥에라도 내려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세월호 희생 가족들의 마음입니다. 어느 것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이러 저러, 이 책 저책 기웃 거리다가. 김우현 전 KBS PD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는 최춘선 할아버지에대한 다큐 이 후 두 번째로 만든 ‘애통하는자’에대한 다큐 동영상과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분은 ‘애통하는자가 복이 있다’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였나 하고 책도 읽어보고 동영상도 보았습니다. 살펴보니 그 내용 전체가 죽은 사람들에대한 이야기였습니다.

     2004년 9월13일 카자흐스탄에서 강도들의 침입으로 죽음을 당한 김진희 선교사. 처음으로 한국도 아닌 이국나라에서 자기 집 생겼다고 그렇게 좋아하던 분이셨는데, 정말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또 같은 해 6월 22일에 이라크 이슬람 무장단체에 인질로 납치되어 살해당한 김선일 선교사. 태국 단기선교에 참여해 빠마이 공동체에 우기 때 진흙길을 시멘트로 포장하기위해 일하다가 쓰러진 이상렬 선교사. 김우현 PD는 더 나아가 외국 선교사들의 죽음,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목을 베이고 죽은 토마스 선교사, 더 나아가 미국의 짐 앨리엇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남미 에콰도르아마존 유역의 원주민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전해보지도 못하고 창에 찔려 죽음을 당한 이야기. 모두 애잔한, 가족들에게 애통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아우카 부족은 수백년 동안 외부인을 죽여왔다는 사실을 알고도 20대의 엘리엇과 그 친구들이 함께 그 곳으로 들어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사진잡지 LIFE는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하며 의문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옷의 아내 엘리자벳은 기자들에게 정색을 하며 “말씀을 삼가 주세요. 낭비라니요?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이 주신 자기의 책임을 수행하고, 생의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도 역시 그 부족에게 복음을 들고 들어갔는데, 놀라운 사실은 아우카 부족은 외부에서 찿아온 남자는 죽여도 여자는 죽이지 않는 풍속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엘리사벳은 그 곳에서 열심히 그 부족을 섬겼는데, 5년 뒤 선교를 마치고 떠나는 추장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냐고 물었을 때, 5년 전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부족은 물론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이우현 PD는 이것이 진정한 애통이라 합니다. 애통(哀痛)이 사랑 애(愛)의 애통(愛痛)이 되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윤동주 시인입니다. 이우현 PD는 그의 시에서 애통함을 본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였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시를 통해 윤동주의 애통을 본다고 합니다. 윤동주는 꽃 다운 나이에 일본군의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윤동주가 그를 생체실험한 일본인을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사랑 애(愛)의 애통(哀痛)하는 자입니다. 애통은 사랑입니다. 김우현 PD는 바로 그것이 위로라고 합니다. 다시 생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애(愛)의 애통(哀痛)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바로 그 윤동주 시인이 ‘팔복’이라는 시를 썼는데, 들어보셨나요? 그 시에서 윤동주 시인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8번 반복해서 쓰고 마지막 구에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쓰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애통함이 팔복의 근원인 것을 싣적 상상력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사랑이고, 그 애통하는 슬픔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애통함이 복이 있다는 말이 아직도 와 닿지가 않습니다. 현실적인 복이 아닙니다. 애통함의 자리에 깊이 머물러 있는 것에서부터 오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애통함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애통함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애통해 하며 이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애통함이 사랑의 애통함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애통함입니다. 온 생명, 온 우주의 온 역사와 인류 문명과 천지를 회복시키는 애통함을 애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들 예수가 왜 애통하는자가 복있다고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지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저의 카톡으로 문자가 왔습니다. 밀양의 활동가들의 채팅입니다. 밀양이 궁굼하면 저에게 연락주십시오, 제가 초청을 하겠습니다. 근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타분회장님의 정동진에서의 유언을 문자로 올렸고, 그 내용이 이 문제가 해결될 때 까지 화장하지 말라며, 미안하다, 감사하다, 승리를 기원한다는 내용이었고, 그 분의 시신은 지금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사회의 현실입니다. 미개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죽음을 전혀 모를 것입니다. 마지막 글이 조합원 중에 00의 아버지가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는데, 병원비가 산더미 같다고 하면서 병원비 부탁드리나는 것입니다. 애통한 죽음입니다. 이 문자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아! 그렇구나, 우리 예수님의 삶의 일상이 바로 이러한 죽음과 가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사로, 어느 회당장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아! 누구 보다도 주님이 이러한 애통하는 죽음의 자리에 많이 노출되었구나 싶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이러한 수 많은 애통하는 죽음에대해 무어라 말씀하셨을까요?

‘애통하는자는 복이있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입니다. 모두들 멸시하고, 천대하며, 가까이 가기를 싫어하며, 천벌을 받았다거나 하는 그 죽음을 품으시고 위로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류와 우주 속의 생명을 향하여 ‘애통하는자는 복이있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하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정도입니다. 이렇게 머리로 밖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우여러분! 이 애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인데, 하늘이 아니라, 항상 땅 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미쳐 깨닫지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앞에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하오니 이제 체휼(體恤)은 우리의 몫입니다, 세월호의 아픔을 몸으로 공감하는 것, 우리 한국사에서 일어난 애통하는 아픔을 체휼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히4:15,16은 한글개역으로 일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

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고 합니다. 애통하는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그래서 하늘의 위로를, 애(愛)의 애통(哀痛)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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