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눈물을 닦아주소서(부활주일, 4월20일)
눈물을 닦아주소서
부활주일 계5:1-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힌지 사흘 째 되는 안식후 첫 날,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 마리아는 막아놓은 돌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에 기가막혀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왜 우느냐?’하고 두 번이나 물으시는데 마리아는 그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 때서야 그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게됩니다. 주님은 우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울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부활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재입니다.
오늘 읽은 계시록 말씀에서도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 손에 들려있는 봉인된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고, 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천지에 아무도 없다고 하자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 중에 한 사람이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 6절에 이어서 보면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네 생물과 24 장로가 어린양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노래하는데,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합니다.
의문스러운 것은 부활하여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에대해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계신 자리는 지상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다 하고 아버지와 함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그 화려한, 대관식의 그 엄위한 고조된 무대에 죽임당한, 그것도 어린 양의 형상이 새겨질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과 영광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요? 이 번 진도 앞바다 여객선의 죽음을 떠올립니다. 하루에도 몇 번 제 마음이 울컥합니다. 이 죽음, 못 다 핀 죽음. 그런데 무수히 많은 이러한 억울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인류의 역사 속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동, 얼마전 4.3제주,4대강, 후쿠시마, 체르노빌, , ,멀리는 아우슈비츠, , . 십자군, 이슬람, , ,더 이 전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 로마제국 아래에서의 참담한 죽음, 지금도 여전히 자본과 제국의 폭력 앞에 무너지는 연한 순 같은, 어린양 같은 이들, 아니 우리들의 죽음을 풀어내지 못하면 생명, 평화, 자유, 더 나아가 부활은 부활일 수 없습니다. 인류 문명이 죽음을 풀어내지 못하면 역사발전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문명이, 지혜가 죽음을, 이 억울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풀어낼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외에 어찌 이 죽음을 풀어낼 수 있을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납양특집의 귀신이야기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그리고 여전히 오늘 이 시대에 죽음의 힘이, 권세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러나 의외로 그렇게 죽음을 불러 일으키며, 죽음을 빌미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떨게 하는 거짓과 허구를 이길 힘은 역설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온 다는 것을 계시록은 짧은 한 마디
‘그 어린양은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로 표합니다. 바로 십자가의 주님이십니다. 모든 인류, 모든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그냥 육신의 죽음,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죽음이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죽음이 부활이고, 부활이 죽음입니다.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참혹함을 보며 부활을 맞이합니다. 지금은 부활을 피워내기 보다는 마음 속에 씨앗으로, 거룩한 부활의 영을 힘입어 씨앗으로 마음 속에 품는 부활로서, 주님께 우리의 눈물을 씻겨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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