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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하나님(사순절두번째주, 2014년3월16일)

wishong | 2014.03.17 00:03 | 조회 2410

내가 아는 하나님 (15:11-32)

 

독일의 어느 신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에 이론 강의를 마친 후 설교 실습에 들어갔습니다. 한 학생이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질문에 학생들이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말하고는 그냥 내려갔다고 합니다.

 

화가 난 교수는 무슨 설교를 그런 식으로 하느냐고 하면서 다음에 다시 하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 두 번째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도 그 학생은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압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을 내가 다시 말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또 내려갔습니다.

 

교수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빴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놈이 보통 놈이 아니구나.’ 그리고는 다음 시간에 또 다시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물었습니다. 세 번째 똑같은 질문에 한쪽에서는 안다고 소리치고 또 한쪽에서는 모른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설교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후로 이 말이 그 학교의 전도 표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주라.” 고 말입니다.

 

저도 이 이야기의 학생처럼 이렇게 설교를 마치고 내려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주십시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를 전해준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소개해 주었습니까?

 

우리는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 각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저희 집에 있는 두 아들도 같은 엄마 아빠 밑에서 자라면서도 각자가 느끼는 엄마와 아빠가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매우 무섭고 딱딱한 분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하나님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서 엄격한 가정교육만을 받고 자란 사람은 친구같은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또 엄마보다 더 다정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은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다가가기 힘들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엄격한 절대적인 존재인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할만큼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일 수 없는 주인이었고 그 앞에서 절대 복종을 해야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상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위 탕자 비유의 아버지가 바로 그 이상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1-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작은 아들이 제 몫의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말없이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묻지도 않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당신의 뜻은 아예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한 일이 있다면 아들이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준 것 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았다면 그가 무슨 수로 집을 떠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그저 아들의 뜻을 따라주고 있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 일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뻔히 알면서도 아들이 원하는대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당신의 뜻을 어김없이 이루시는 하나님, 몸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앞서가시는 하나님에 익숙했을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탕자의 아버지로 비유된 하나님은 얼마나 이상한 하나님이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약과였습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버지가 나누어준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아들이 죄인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스스로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품꾼의 하나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생각하던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20절 말씀입니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22-2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아들이 저지른 명백한 잘못에 대해 벌을 내리지도 않고, 벌은 고사하고 뭐라고 나무라거나 그 많은 돈을 모두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보는 일조차 없었습니다. 뭐 이런 이상한 아버지가 다 있습니까? 집을 떠나서 무슨 짓을 어떻게 했든지간에 이제 돌아왔으니 되었다고, 그것만으로도 오히려 고맙다는 듯이 지난 일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이 이상하지도 않습니까? 우리는 이 탕자의 비유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아버지의 반응을 이미 다 알고 있고, 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런 둘째 아들 같은 아들이 우리집에 있다면 만약 여러분이 그 아버지라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아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법궤에 손을 댈 자격이 없는 웃사가 땅에 굴러 떨어지려는 법궤를 붙잡았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죽게 하셨던 하나님, 그분의 얼굴을 보기라도 하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려운 하나님, 당신의 법에 복종하면 복을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내리겠다고 약속하는 하나님, 그리고 그 약속을 빈틈없이 지키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에 익숙했을 유대인들에게 이 탕자의 아버지가 보여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이런 비유를 들려주는 예수를 살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알고 섬겨온 하나님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상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범죄에 대해 징계하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은 큰 아들의 반응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있을 그때, 큰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음악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가 집을 나갔다 돌아온 자기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베푼 자리라는 것을 듣고는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던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와 벌을 받아 마땅한 동생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29-3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동생이 환영을 받고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도 동생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정말 그들에게 낯설고 이상한 하나님의 모습이었을까요?

 

비록 벌을 받아 마땅한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는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할 것 같은 이들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오히려 하나님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죄악이 가득하였던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 화를 내었습니다.

 

요나서 4장 말씀에는 화가 난 요나가 주님께 기도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2-3절 말씀입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멸망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던 니느웨 백성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용서받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어서 그 모습을 보지 않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요나의 원망과 불평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라고 오히려 요나를 책망하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주는 것조차 하기 싫어 도망을 치기까지 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집을 나갔던 둘째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신 것처럼 니느웨 사람들이 전심을 다하여 뉘우치는 것,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2절 말씀을 보면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때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면서, 죄인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님께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알고계신 하나님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으로,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모습으로, 잃어버린 아들은 되찾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혹시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책을 쓴 필립 얀시라는 작가는 우리 생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곳에 줄곧 하나님이 계셨다고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뜻밖의 장소에서, 참으로 예상 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에 전문가셨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배당 벽 안에만 제한하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의 경건한 자들에게서가 아닌, 돈이라고는 두 렙돈 뿐이었던 과부나, 어떻게 기도해야할지조차 알지 못했던 죄인인 세리 같은 자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셨습니다.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 집사님에게서 그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했던 노력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도 만나는 것 같은데, 자신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분은 교회의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밤을 새워 성경을 읽다가 새벽예배에 가기도 하고, 마치 종교에 중독된 사람처럼 살아가면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 집사님은 목사님이신 시아버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오죽하면 그 아버님께서 밤에 검은 봉지에 맥주를 사오셔서 그것을 먹고 잠을 좀 자라고 할 정도로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예배 중독에 빠진 자신에게 새벽예배와 금요기도회에 나오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금요일마다 남편과 데이트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들은 금요기도회를 참석할 시간에 남편과 함께 친구를 만나 삼겹살에 소주를 한잔 마시고 있었는데, 이 집사님은 그곳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찾으려하고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이 얘야, 내가 지금 여기에 너와 함께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후 이 집사님의 삶은 너무나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렇게 찾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하나님이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이미 함께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일하시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모습 밖에는 그분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소개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지 2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모세의 하나님, 상을 내리고 벌을 주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만을 경험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알던 하나님은 바로 그 율법으로만 만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이 아는 하나님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전하던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주님을 만난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였습니다. 그날도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 길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오히려 그분을 핍박하는 일이었다니요. 이 음성을 듣고난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던 자에서 스스로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하였고, 예수를 핍박하던 자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삶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되는 은혜의 자리는 바로 그렇게 우리 자신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인임을 깨닫는 자리에서부터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낮은 마음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빨리 지옥에 가고 싶어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오지에서 의료활동을 펴온 산부인과 전문의 이선영 박사라는 분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분은 3년전부터 나이지리아와 남수단, 라오스 등지에 파견되어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 환자를 돌봐왔습니다. 국내에서는 노숙인을 위한 무료병원과 산부인과 전문병원에서 일하다 의사회의 부름을 받으면 장소를 불문하고 그곳으로 날아가 1년에 3-4개월씩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가장 최근에 다녀온 곳은 남수단인데, 이곳은 아직도 내전이 진행중인 데다가 지구상 최빈국 중 하나일만큼 여건이 열악한 곳이기도 하고,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이었던 고 이태석 신부가 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남수단을 다녀오고나서 지옥이 있다면 거기에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남수단이라고 했다고 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한 곳이기도 합니다.

 

치안상태가 엉망인 것은 둘째치고 쓸만한 생필품 하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든 곳, 50도를 넘는 불볕 더위에도 에어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한의 여건 속에서 병원이라고 있는 것도 외양간 같은 수준인데 환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밀 듯이 밀려와 눈 붙일 시간도 없이 한달 가량 일을 하고 나면 몸무게가 7-8킬로그램은 그냥 빠지고 이러다 죽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여건이 좋은 것도 아닌데 이 박사님은 그 지옥에 하루 빨리 가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몸은 고달프지만 환자들이 또롱또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전폭적인 믿음과 사랑을 보내줄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진료할 때는. “환자들이 돈을 낸 만큼 서비스를 잘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곳에서는 환자들의 시선에서 정말 고맙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마음이 진하게 전해져 의사로서 진정한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는 곳에 누가 찾아와 은혜를 베푼다고 한다면 그런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지옥이라고 표현될만한 그런 환경가운데 아무도 자신들을 돌아볼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당신이 나를 위해 정말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군요.” 라는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는 그 모습을 떠올리면 빨리 그 지옥으로 가고싶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죄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오늘 분문의 큰아들처럼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버지 앞에서 권리는 주장하는 아들보다, 나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오는 둘째 아들에게 오직 그 아버지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아들에게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향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죄인인 우리를 위해 이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해 아들을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소망없는 죄인인가를 깨닫는 사람에게,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 당신이 정말 나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주셨군요.” 라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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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일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주현절후첫번째주, 2013년1월12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902 2014.01.12 14:28
456 [일반] 감사로부터 오는 소망(새해첫번째주, 2014년1월5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617 2014.01.05 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