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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사순절첫번째주, 2014년3월9일)

하늘기차 | 2014.03.09 16:28 | 조회 2534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한국기독교교협의회 탈핵주일설교)

 

 사순절첫번째주일(탈핵주일)                                                                                                                                      창3:8,9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죽음의 여행’이라는 이름의 사막에서 인류 첫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습니다. 거대한 뇌성과 충격파가 사막을 집어삼켰습니다. 상공 9킬로미터까지 무시무시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당시 이 실험의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힌두교의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소년)란 암호명의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며칠 후 나가사키에 ‘팻맨’(뚱보)이라는 이름의 세 번째 핵폭탄이 터졌습니다. 히로시마에서 16만, 나가사키에서 8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미국에 뒤이어 소련(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 중국(1946년)이 핵무장을 했습니다. 동서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85년에 지구촌에는 약 6만기의 핵탄두가 발사대기 상태에 있었습니다. 냉전이 끝난 지금도 지구촌에는 약 2만기의 핵탄두가 발사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숫자는 줄었지만 파괴력은 더 높아졌습니다. 핵무기의 위협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Gordon D. Kaufman)은 핵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그리스도적이며, 그 자체로 성령의 역사에 반대된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핵무기로 인한 전 지구 생명공동체 멸절의 위협 아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핵발전으로 인한 피폭의 위협 아래 살고 있습니다. 민간인들의 머리 위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것에 대한 죄의식까지 작용하면서 아이젠하워는 이른바 “핵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을 표방하였고, 이후 폭탄용 원자로는 상업용 원자로로 둔갑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영국의 셀라필드와 미국의 십핑포트에 핵발전소가 세워지면서 이른바 핵산업(nuclear industry)이 태동하였습니다. 하지만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핵발전소 폭발과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대참사로 급격히 위축되는가 싶더니, 세계 각국이 지구온난화와 전쟁을 선포하면서 잠시 기사회생하다가, 지난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의 대재앙으로 결국 핵에너지의 위험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20세기 중반 이후 ‘핵 시대’(nuclear age)를 살고 있습니다. 핵 시대란 핵무기와 핵발전이라는 ‘죽음의 놀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세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시대입니다. 핵 시대란 생명을 담보로 평화를 도박하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신앙의 요청은 분명합니다. 죽음과 파멸의 핵 문명에서 탈출하여 모든 생명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세상, 핵 없는 생명과 평화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21세기의 출애굽 운동이 될 것입니다.

  핵은 워낙 잘못된 지식과 거짓 신화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먼저 철저한 ‘탈신화화’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핵무기는 군사용이고 원자력(핵)발전은 평화용이라는 거짓 신화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원자력은 처음부터 군사적 이용, 즉 원자(핵)폭탄 개발을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원자로는 전기를 만들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아니라 본래 우라늄238이라는 물질을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239로 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핵무기와 핵발전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핵발전이 깨끗하지도, 안전하지도, 싸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실제 이유는 그것이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해주기 때문입니다. 핵발전은 핵무기에 대한 야망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핵은 - 무기든 발전이든 – 결코 평화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핵에너지는 온실가스를 방출하지 않는 청정에너지라는 신화를 극복해야 합니다. 설사 발전부문에 국한해서 핵발전이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핵발전의 전 과정에서, 특히 우라늄의 채굴과 가공과 농축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온실가스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핵발전이 청정 에너지가 아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핵폐기물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핵페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아무 근본적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마구 핵발전소를 지어왔습니다. 하지만 단 1그램의 핵폐기물도 안전하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핵폐기물은 최대 100만년 동안이나 무서운 방사선을 내뿜지만 그것을 인간과 생태계로부터 격리시키는 드럼용기 수명은 고작 40년뿐입니다. 지금까지 사용 후 핵연료와 같이 위험천만한 ‘고준위폐기물’을 안전하게 최종 보관할 장소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엄청난 핵쓰레기를 후손들에게 떠넘기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대손손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범죄행위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으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핵무기가 세계평화에 대한 답이 아니었듯이, 핵발전도 지구온난화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셋째로, 핵발전이 싸다는 거짓 홍보에서도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 핵발전에서 온 전기가 더 싼 이유는 아직 요금에 반영되지 않은 숨은 비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핵발전소 안에 임시로 저장되어 있는 사용 후 핵연료는 언젠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처리해야 합니다.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 철거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갑니다. 우리나라는 1978년에 부산 기장에 고리 발전소를 지으면서 매 18개월마다 1기씩의 속도로 지금까지 총 23기의 핵발전소를 지어왔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매 18개월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면 핵발전소를 1기씩 철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핵발전소 1기당 철거비용은 6천 억 원에서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이 비용들이 앞으로 다 우리 전기요금 고지서에 반영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잔치’는 끝났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핵발전을 통한 전기의 풍요라는 ‘단맛’을 봤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핵발전소의 폐쇄와 핵폐기물의 처리라는 ‘쓴맛’을 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돌아보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사실 ‘거짓 풍요’인 것입니다. 당장의 소비지향적인 삶을 위해 후손과 자연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입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절제하고 인내하는 삶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마태 7:13-14)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는 핵발전이 안전하다는 거짓 신화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후쿠시마 이후 이 신화는 이미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핵발전 사고는 매일 일어날 수 있고, 또 실제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핵발전은 실수 없는 인간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핵사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사고입니다. 아직도 거기는 사람이 살지 못합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무려 650번 이상의 알려진 사고가 있었는데, 국내 최고령 핵발전소인 부산 기장의 고리 1호기는 그동안 무려 120 차례나 사고 및 고장이 있었습니다.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에서처럼 노심 용융과 같은 사태로 갈 뻔한 심각한 사고도 2~3번이나 있었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고리 핵발전소 30킬로미터 안에 있는 주민은 약 342만 명, 월성은 127만 명, 영광은 14만 명, 그리고 울진은 6만 명이나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엄청난 인구가 핵발전소 주변에 몰려있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부는 이전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 좁은 땅 위에 앞으로 핵발전소를 14개나 더 짓겠다고 합니다. 이미 핵발전 밀도가 세계 1위인데, 앞으로 20년 후면 우리나라는 핵발전소 보유 수자로 세계 1위가 될까봐 걱정입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핵발전소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는 이 나라에서 아직까지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가호가 아니면 도저히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핵은, 그것이 무기든 발전이든, 결코 평화와 양립 할 수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핵은 기독교 신앙과도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핵은, 일본의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의 말처럼, 절대로 지구 위에서 태워서는 안 되는 ‘하늘의 불’입니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핵융합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핵이 별을 빛나게 합니다. 핵은 이처럼 ‘우주의 불’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생명에게 핵이라는 불은 치명적인 재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우주의 부스러기로 만들어졌습니다. 때문에 생성될 때 많은 방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불’이 다 꺼지지 않아 죽음의 재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지구에 생명이 살 수 없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방사능이 차츰 식은 후에야 비로소 생명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지구를 식히시며 생명의 역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이 살 수 있게 된 지구 위에서 다시 인공적으로 방사능의 불을 일으킨 것이 바로 핵발전인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늘의 불을 훔친 것입니다.

  핵에너지는 우리가 사는 일상세계의 에너지와 완전히 다른 에너지입니다. 일상의 조건에서 원자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원자를 구성하는 원자핵은 항상 안정되어 있고, 원자핵의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가 이러저러하게 결합되면서 온갖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가 사물을 만들고 우리의 몸도 만듭니다.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생명의 세계는 이렇듯 원자핵의 안정을 대전제로 세워진 세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핵에너지의 세계는 원자핵의 안정성을 깨뜨린 세계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깨뜨려 얻은 막대한 에너지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핵은 우리의 일상과 생명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위협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폭력입니다.
 
  그래서 핵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입니다.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위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두 93가지의 원소를 가지고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그 93가지 원소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이 원자번호 1번인 수소이고, 가장 무거운 것이 원자번호 93번인 우라늄입니다. 인간은 이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이라는 물질을 추출해 폭탄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핵폭탄 실험의 책임자 오펜하이머의 말처럼,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플루토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설탕만한 크기 5개만 가지고도 일본 인구 2억을 전멸시킬 수 있는 맹독성 물질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손에 쥐고 세상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것으로 절대 권력을 손에 넣어 신처럼 군림하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핵은 전대미문의 권력과 지배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국가들에게 욕망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입니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절대 권능에 대한 금단의 유혹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니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맘대로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담이 그것을 따먹을 줄 미리 모르셨을까요? 모든 것이 허용되었지만 단 한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마치 ‘제왕 같은’ 인간에게 단 하나의 금기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선을 긋고 표시하는 경계석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뱀의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유혹의 핵심은 ‘눈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의 핵심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되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산의 주인이 되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축복이 주어졌으나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신이 되고 싶었습니다. 동산의 주인이 되어 제 맘대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실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담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비로소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며 이렇게 물으십니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 질문은 성서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던지신 가장 첫 번째의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던진 두 번째의 질문은 창 4:9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이렇게 잃어버린 인간을 애타게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향한 첫 번째 질문이 3장 9절이고 두 번째 질문이 4장 9절인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묻고 계신 것은 아담이 숨어 있는 물리적 위치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주인이신 이 광대한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이 본래 있어야 할 신학적 자리가 어디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피조물의 하나로 동료 피조물들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 본연의 자리가 어디냐고 환기시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본래 있어야 할 자신의 자리에서 일탈해 신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모든 탐욕의 인간을 질타하시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지금 핵을 두 손에 들고 마치 자기가 신이나 되는 것처럼 세상을 지배하려는 오늘 ‘핵 시대’의 인류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람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겔 28:2)

  핵 문제는 환경 문제가 아닙니다. 핵 문제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핵 위기는 인간의 위기입니다. 21세기를 사는 크리스천들이 가장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한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과의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고 지구 위에 그리고 생명의 그물망 밖에 군림하려 드는 ‘전능하신’ 인간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제멋대로 사용한 인류 문명에 대해 근원적인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수많은 생물종 가운데 하나이면서 너무도 큰 지구적 변화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모든 위기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광대한 우주 안에서 그리고 그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지구 안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과 서로 의지해 사는 온 생명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스스로를 지구와 우주의 지배자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위기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벌이는 탈핵운동은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와 인간 문명 전체를 통찰하고 회개하는 영적 각성운동입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더불어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출애굽 운동입니다. 그것은 핵을 가지고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된 인간을 다시 동산의 겸손한 그리고 신실한 청지기로 돌려세우는 근원적인 신앙 운동인 것입니다.
 
  후쿠시마 재앙 3주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핵무기와 핵발전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 앞에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죽음의 놀이를 그만두고 핵 없는 세상,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두시고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폭자의 고통과 죽음을 나누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참생명과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 일러주시고 몸소 그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시는 성령께서는(롬 8:22) 온 생명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핵으로 오염되고 파괴되는 당신의 창조세계 앞에서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일구는 당신의 일꾼들로 부르십니다. 누가 이 성스러운 부르심 앞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기쁘게 응답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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