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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 엘림(주현절후세번째주, 2014년1월26일)

하늘기차 | 2014.01.26 14:00 | 조회 2829



                                                           

 

                                                                   마라와 엘림  
주현절후세번째주                                                                                                                                                  출15:22-27

    오늘 말씀에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집트 바로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광야로 나아가 사흘길을 행하였는데 물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라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서 겨우 물을 발견하였는데, 엎친데 덮친 겪으로 그 곳의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던지라고 하여 쓴물을 단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증을 풀 수가 있었고, 그러고 나서 그 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하십니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고 합니다. 꼭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 같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있고, '은유적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 바꾸면 난처해지며 꽉 막혀 풀어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여간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무심코 지나갈 수 없는 단어가 2개 있는데 그 첫째는 24절의 불평이라는 말인데, 이 불평이라는 말이 광야 40년 동안에 계속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을 가로막고 뒤에서 바로의 군대가 바짝 따라붙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
         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
         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라고 하면서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 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
         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
         습니까?”라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모습을 훨씬 전부터 보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로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어 보내 하나님께
제사 드리게끔 해 달라고 요청하자, 바로는 이스라엘이 일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더 일을 혹사시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하였습니다.

   둘째는 25절에 시험이라는 단어입니다. 신8:16에 보면
        “만나를 당신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다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나중에 당신들이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복을 주시려 한다는 것인데, 이 축복으로 치면 하나님이 모세를 대면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바,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들을 택하여 부르실 때 하신 언약을 이루고자 함인데, 그 약속이 계속 진행중이며, 그 축복이 지금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이라는 단어도 불평이라는 말과 함께 광야 40년 동안에 계속 언급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계속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을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계속 시험하였을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온 것이 백성들의 자발적인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과 가나안으로의 행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자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그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출4:30-31에 보면
        “아론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일러주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그 섭리와 경륜을 모두 이해하고 감당할 만한 확고하고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롬8:28은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로 고통스러워할 때 그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낸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아니라, 그 뜻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선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대해 하나님은 미리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사람들을 불러 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형제들, 즉 뜻대로 부름받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들의 장자가 되게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은 어디 까지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 부름심의 긍국에대해 사도 바울은 롬8:30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은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가 있지만, 씻을 수 없는 죄에 매여 살지만, 이제 내가 죄가 없다고 하였으니 다시는 죄에대한 연민에 붙들리지 말고, 죄 없는 것처럼 자유롭고 당당하게 부름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것입 니다. 더 이상 다시 죄에게 붙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영화로운 자리에 까지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인정 받고 영화롭게 되어가는 과정을 거룩함의 길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놀라운 은혜를 입었지만 자꾸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에대해서도 롬3장에서 역시 아브라함을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부족을 위한 후계자가 없어 흔들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찿아가 협상을 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오직 너에게 난 자식만이 상속자라는 것을, 그러니까 도저희 합리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정황 속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자, 하나님은 아직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 고백을 인정합니다. 롬4:22은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브라함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 까지도 위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는 25절에서 예수님을 통한 사랑으로 그러한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 죽음이 우리의 죄 때문이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인정 받기 위해서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죄가 우리를 죽이지만, 그래서 모든 회복과 생명의 역동성을 무력하게 만들지만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25절 말씀에서처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바로 십자가에서 오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인가 하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에대한 신뢰에서부터 오는데, 그 신뢰란 자신의 모든 것, 즉 생명 까지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내어놓는, 그러니까 자연적인 죽음이나 이기적이거나, 자기 의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그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이, 그 십자가가 바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능력이 되는가 하면 그 죽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리고 죽음에서 아들 예수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능력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연, 혈연, 학연, 부와 명예와 스팩의 힘, 자기 능력의 힘으로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우리 성도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 여기서 부활, 즉 십자가 이후에 잘 될 것 이라는 추론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의 것이라 하는 것을 아버지 뜻 앞에 내어 놓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그러니까 아들 예수를 따르는 그 믿음을 인정하시는 아버지 품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감사요, 은혜인데, 사도 바울은 롬8: 31 이하에서 그렇게 우리를 의롭다 하는 분이 하나님인데 하며 이 세상의 그 어떤 힘과 능력과 박해와 위협과 굶주림, 칼, 권세, 현재의 일, 장래의 일, 그 어느 것도 하나님과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고 믿음의 선언을 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믿음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리와 같은 부름을 받았지만, 이 비밀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3:1 이하에서 그 비밀을 지나간 세대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을 따라 성령의 감동으로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마라에서 쓴물을 만났다고 합니다. 수르 광야 지역에는 먹을 수 없는 물 웅덩이가 흔히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이렇게 갈급할 때 얼마나 이러한 쓴 물 웅덩이를 만나보았나요? 이 먹지 못하는 쓴 물 웅덩이를 앞에 놓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은 이 광야길에서 이스라엘이 쓴 물 웅덩이를 만났을 때에 원망, 시비, 불평하라고 광야로 초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25절에 보면 쓴물을 단물로 고쳐주신 직 후에 ‘그들을 시험 하신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고 합니다.

   시험은 걸려 넘어지지 말고 통과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물에 붙들려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반면 모세는 물이 써서 먹지 못하게 되자 25절에 주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려고 그 어려움과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주님과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광야 길이 그리 만만치 않아  기도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마랄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영적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영적 샘이 솟아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감사와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영적 샘이 솟아나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정황에 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쓴 물을 달게 해 주셨습니다. 마실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 인생이 아무리 쓰고, 고달프고 괴롭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에게서 마실 물, 즉 그 아픔과 고통, 시련이 우리를 영적 샘을 팔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지혜의 길, 소망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샘이 늦게 터질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샘이 내 안에서 터져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도 우리도 모두 공히 영적 샘, 단 물이 솟아나야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27절에 오아시스 엘림이 나오는데, 이것은 광야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사막에서는 한 모금의 물, 한 그루의 나무 그늘도 귀한데 샘이 12이요, 나무가 72그루라고 합니다. 환상적입니다. 요세말로 대박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에 이런 때가 한 번은 오지 않겠나 십기도 한데요. 그렇지만 이것은 위로입니다. 광야의 길을 가야하는 이스라엘에게, 인생을 살아야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은 엘림을 통해 위로를 주셨습니다. 근데 이스라엘은 반금 전 까지 물이 없다고 못살겠다고 그 난리를 쳤습니다. 바로 곁에 그 풍성함이 있는데 말입니다. 왜그랬을까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엘림을 준비하고 계셨고, 이스라엘을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른체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마라에 머물고 계십니까? 아니면 엘림에 머물고 계십니까? 혹 마라에 머물며 쓴 물 때문에 어찌할 줄 모르시겠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니면 엘림에 계십니까? 한 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적지는 엘림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가 좋다고 주저앉지 않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목표는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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