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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기도의 사람(성령강림후열일곱째주일, 2014년10월5일)

하늘기차 | 2014.10.05 15:22 | 조회 2980


                                                   다윗은 기도의 사람.
성령강림후열일곱째주일                                                                                                                                             시4:1-8

 

    다윗은 왕이요, 군인이요, 목자요, 시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모습을 바쳐주는 다윗의 진정한 자아는 기도자입니다. 시편은 다윗의 그러한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하는 탄원의 시가 있고, 하나님의 이름, 그 위대함에대한 찬양이 있고, 또 감사의 기도, 순례자의 기도, 여호와의 주권을 찬양하는 대관시가 있고, 지혜와 교육을 위한 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시편 4편과 그리고 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배반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에 하나님에게 드린 개인적인 탄원의 시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납니다. 다윗은 이 반역이 자신의 범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힘든 것은 그 심판이 아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만 열왕기서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아직도 다윗에게는 주변 국가들의 전쟁 속에서 산전수전을 다 격은 1당 100의 용사들이 즐비한데, 그럼에도 스스로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이 머물고 계시는 거룩한 성전에서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윗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고, 또한 아들과 전쟁을 한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따르는 가솔들과 신하들과 함께 피신을 갑니다.

   피난하는 중에 사울왕의 친족인 시므이가 도주하는 다윗일행에게 계속 저주를 퍼붓습니다. 살인자라고 하며 불한당 같은 자라 하면서 사울의 집안을 다 죽인 피 값을 주께서 값으신다고 하며 계속 괴롭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불순종을 심판하시고, 다윗을 기름부었기 때문에, 지금 시므이의 소란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가뜩이나 심신이 지쳐있을 때여서, 보다 못해 측근인 아비새 장군이 당장 처형하겠다고 하는데도, 다윗은 혹시 주께서 저주를 허락한 것이라면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그대로 그 저주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시므이가 한 저주를 오히려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고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이 문제를 잘 알고 계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곤고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을 찿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찿을 때 보면 항상 하나님에대한 신뢰가 매우 깊게 묻어납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뉴스앤죠이’와 ‘목회멘토링 사역원’에서 주최한 ‘마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워크숍에 사례 발표자로 참석하였는데, 20일(월)에 우리교회를 탐방한다고 합니다. 하여간 그 때 한 젊은 목회자가 목사님의 그러한 지역과 함께 하는 목회에서 영적, 신앙적 힘은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 개신교는 소위 기도의 시간, 기도의 깊이로 따지면 불교나 힌두교나, 캐톨릭과 비교해 볼 때,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인다고 하면서 개신교의 영적 바탕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분이 이해를 하였는지 모르겠는데  히4:12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하며, 엡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고 합니다. 말씀의 영적 힘,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말씀이 나의 마음을 품어주는 은혜에 참여하는 신앙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의 말을 그대로 스폰지와 같이 빨아들이는 것 같이 말입니다.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자기 고집 부리며 자기 성을 쌓는데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라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신앙의 모델을 지금까지, 그리고 아직은 다윗을 쫓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을 깊이 연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이 매 순간 풀어야 하고, 답해야 하고, 결단해야할 때 다윗은 늘 한 결같이 하나님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불안과 걱정이 아니라, 시편 131:2처럼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마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때 스며 길바닥에 두러눕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엄마 품에 안겨 평안히 잠자는 아이의 모습과 같은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며 수퍼 마켓이나 길거리 바닥에 두러눕는 모습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첫 마디도 ‘의로우신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찿습니다. 저는 이 한 마디 속에 ‘아빠! 또는 엄마!’가 느껴집니다. 나의 모든 것, 이기적인 것 까지도 다 포함해, 잔 머리 굴리는 것 도 포함해,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것 같은 투정에 이르기 까지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신뢰가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다윗의 그동안의 삶의 여정 속에 함께했던 하나님에대한 신뢰가 철철 넘칩니다. 이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져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아바’는 아람어이고,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이 풀어서 아버지라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감람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할 때 간절히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되어야 맞습니다. 나의 뜻을 관철 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물으며, 그 기다림의 침묵 속에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평화로움 속에 자유를 맛보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 침묵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신비요, 기도의 신비입니다. 이 체험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도라는 것이 결국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기도의 시작인 그 대상을 부를 때 어떻게 부르는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버지 라고 부를 때 기도의 첫 응답은 무슨 계시를 받았다가 아니라 평화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다윗의 기도에 그 평안함이 있습니다. 저는 주일 대표기도를 통해 종종 위로를 받습니다. 언제 위로를 받는가 하면 특히 그 기도 속에 아버지 하나님에대한 신뢰, 함께함이 묻어날 때입니다.

   2절에서 다윗은 인생의 의미 삶의 목적을 잃어버려, 무너진 공허환 삶을 질책합니다. 리차드 로어라는 분의 ‘불멸의 다이아몬드’라는 책에서 저자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골로사이 3:3) 자신들의 객관적이며 전적으로 주어졌으며 또한 수고하지 않고 얻은 정체성을 아직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정체성이 바로 프란체스코와 클라라 같은 성인들이 받아들였고 누렸다고 하는데, 저는 다윗이 그 원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믿음의 선배들도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냈지만 말입니다.  리차드 로어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종교의 일차적이며 대체할 수 없는 직무는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근본 진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완전히 의식하도록 끌어올리는 일이다. 이것이 거룩함에 대한 유일한 참 뜻”이라고 합니다. 어렵게 풀어서 그렇지 한 마디로 포도나무와 그 가지입니다.

   수고하지 않아도, 열심하지 않아도,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일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것을 좀 더 풀어내자면, 온 우주와 역사와, 이 지구 상의 들 꽃들, 하늘에 반짝이는 별, 흐르는 강, 높이 솟아 나무와 동물들을 품고 있는 산들, 넓고 깊은 바다, 이 모두가 인간들과 함께 하나님 안에 하나로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종교라 했는데, 우리 언어로 풀면 교회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마땅히 해야할 우선적인 일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 나의 정체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해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의 정체를 드러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신뢰, 이 신앙이 바로 어린아이처럼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자유를 맛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허무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4,5절을 통해 다윗은 거듭 고백을 합니다. 다윗이 지금 힘들어하는 것인데, 배반, 원수들에의해 모든 것을 잃게 되었지만, 분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반성하며 눈물을 흘리라고 하는데, 번역이 좀 껄끄럽습니다.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한글개역이 문맥상 맞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라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말씀과 기도 중에 나의 생각, 언어, 느낌, 의식 모든 것을 멈추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5절에서 올바른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거룩한 산 제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복을 달라, 좋은 일 하나 없는 것에 불평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시어 얼굴을 마주대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그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상급이나, 보상이 없이도, 그것으로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7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읽기만해도 좋습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
         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크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며 본래의 나 아닌 다른 모습으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나’를 찿은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인간다운 모습을 찿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스스로를 인자라 부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 즉 종교성에 익숙해 있어 사람다움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느8:10은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합니다. 그 기쁨은 다윗에 따른다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누가 빼앗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시편의 기도를 통해 늘 하나님에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아버지 하나님 안에 머무는 평화가 자유가 기쁨이 넘치는 삶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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